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을 실망하게 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무리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다시는 그분을 찾지 않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오천 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신 엄청난 사건으로 많은 지지를 얻으시고 나서 바로 다음 날 일어났다. 그날에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님에게 빵을 요구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이 빵과 물고기가 아니라 바로 내가 너희의 영원한 양식이다”(요 6:48).

로마를 정복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회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리고 영원한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 믿었던 예수님은 실망스럽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들은 약속된 땅과 백성과 그들이 원하는 복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죽이는 것을 기뻐했다.

 

얼마 전 한 청년이 <왕의 재정>을 쓰고 가르치는 김미진 간사의 강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청년에게 확실하고 분명한 답을 주고 싶어 1시간이 훌쩍 넘는 강의 영상 4개를 찾아 들었다. 

참 많은 생각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 사람의 강의는 정확히 예수님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 이와 같은 메시지가 있었다면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던 이들은 아마 이 메시지에 열광했을 것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거기 있으니 말이다.

김미진 간사는 자신이 믿는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시를 사용한다. 가령 자신의 교육을 따르는 이들이 십일조를 1천9백3십만 원 했다고 한다(그러니 그 외의 수입은 얼마나 많겠는가?). 자신이 과거엔 50억의 빚을 졌으나 현재는 82개국의 아이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5천 명의 아이들을 먹이며 교회를 100개를 짓고 사역자 100명에게 6천만 원씩 헌금했고 현재도 자기 밑에 1500명의 간사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강의를 예약해서 기다리는 곳이 천군데 있고 전세계적으로 입양을 하고 있으며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도 종종 한다.

나는 강사가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이룬 것을 너무 구체적으로 말할 때의 부작용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높아지는 것처럼 전달되는 것, 위화감 조성, 번영신학, 기복신앙의 색깔을 전하게 되는 점 등은 넘어가더라도 이와 같은 방식의 강의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 강의와 다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셨고 제자들은 성전 문 앞에 구걸하는 병자에게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에게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치지 않았는가? 그녀가 자신이 이룬 거대한 일들과 그녀를 따르는 자들이 얻은 엄청난 수익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 아브라함 자손이 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여기서 받는다.

김미진 간사는 계속해서 자신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문제가 되는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는 그녀의 가르침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녀의 성경해석 방식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데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창세기 역사는 말 그대로 역사다. 하나님이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분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한 부족을 사용하셨는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김미진 간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고 그분을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는 맞는 말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이 얻게 될 영적인 복을 처음으로 약속받은 사람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물질적인 축복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사람, 나라를 문자 그대로 우리가 얻게 될 것이라는 해석에 있다. 그것도 여기 이 땅에서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뭐라고 답할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부터 이어져 온 모든 구약의 성도들이 기다렸던 복은 이곳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땅과 나라 역시 이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 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땅에서 얻는 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다가올 그 본향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나라와 땅을 차지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왕의 백성이 이 땅에서 충분한 재정을 누리지 못하였다. 도리어 그들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했다. 죽음의 위기에 몰리고 때론 가족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한 것은 왕이지 왕이 주는 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정으로 유일한 생명의 떡이며 우리가 구할 단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적은 무리에게 하나님은 그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이와 같은 성경해석의 치명적 오류는 김미진 간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강의시간 내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하여 모두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간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을 수 있지만(가령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 감사하는 삶 등) 그녀의 메시지는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2. 재물의 복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여러 번 “구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눅 12:29). 야고보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문제를 지적했다(약 4:3). 이건 모순이 아니다. 무엇이든 구하되 무엇이든 바른 중심을 가지고 구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하셨다(요 14:14). 무엇을 구하는가보다는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뜻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김미진 간사는 재물의 복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재물의 복을 구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이 누리는 참된 축복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무언가를 자신의 공로로 여기는 자가 있다면 “다른 복음”을 믿는 자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궁극적으로 요구한다면 그가 찾는 것은 복음의 본질 가운데 없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그분의 뜻대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요구해야 할 바로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모든 권리를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자기 부모, 형제,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어떤 축복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보물로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려고 한 것이 죄의 문제였다. 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 오직 하나님만 구하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그러면 재물은 구할 수 없나? 아니다. 구할 수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자로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로서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구하는 것이다. 재물을 움켜쥔 손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한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한쪽에는 하나님을 다른 쪽에는 재물을 두셨다. 

재물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죄다. 김미진 간사는 하나님께 재물을 구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복음이 아니다. 참된 복음은 하나님만 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 정직한 마음만 가지면 하나님께서 양손에 쥐고 싶은 것을 다 쥐게 하신다고 말하지만, 아니다. 한 왕 예수만 섬기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그리고 재물을 얼마나 주시던지 그분이 선하신 뜻 안에서 풍성한 은혜로 허락하신 재물에 감사하며 청지기처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참된 복음을 깨달은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1천여 곳에서 김미진 간사의 강의를 기다린다고 한다. 아무리 유명해도 그녀가 전도자로서 전할 것은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복음이다. 물론 그 복된 소식을 붙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베푸신 은혜를 충분히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베푸신 특별한 은혜를 어떤 특별한 자세와 태도, 방법을 취해 모두가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은 가는 곳곳마다 우리가 전파해야 할 “그 메시지”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다. 강사가 전해야 할 것은 그 역사하시는 왕이지, 그 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재정이 아니다. 왜 그녀는 계속해서 이 강의를 통해 당신은 돈과 사람과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하는가? 그녀가 전하는 것은 진정 복음인가?

빵과 사회적 위치를 기대하고 온 팬들에게 “내가 바로 빵이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복음과 얼마나 다른 메시지인가?

 

3.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세상에 복을 퍼뜨리신다

김미진 간사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하나님이 개인에게 얼마나 물질적인 축복을 더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평사원이 갑자기 회장이 되고, 수억의 돈을 받고, 초고속 승진으로 짧은 기간에 빚을 청산하는 등 드라마에 나올법한 간증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유튜브나 왕의 재정학교에 물어보면 조작이 아니라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상에 복을 선포하시는데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마음을 품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먼저 부하게 하셔서 그리 하신다고 그녀는 말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가장 많이 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중심)을 가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누구보다도 세상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먼저 부요하게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바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울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 그런데 정작 세상 사람이 볼 때 그는 가난한 자 같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았다. 그는 세상 사람을 복음으로 부요하게 했고 그 복음을 위해 그가 감수한 삶은 가난하고 무명하고 징계를 받고 근심하는 삶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했는가? 머리 둘 곳 없는 삶, 가난한 삶, 조롱과 핍박받는 삶, 따귀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억울한 심판을 받고 죽임당하는 삶 아니었나?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온 인류에게 영원한 복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기 백성을 통해 세상에 복을 선포하신다. 그러나 그 복이 물질적인 복이 아니고 나에게 먼저 부어주신 복도 물질적인 복이 아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복이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 안에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영을 부어주셔서 그분의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게 하였다는 것이 참된 복이다. 영원한 복,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왕의 재정 강의에서는 듣기 힘든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모두 그분을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은 그들이 원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축복은 없고 사람들의 지지나 권력과 명예를 얻는 삶도 아니고 오히려 많은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삶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는 삶을 통해 그 삶 가운데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함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그들도 이미 손에 쥐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하는 소망의 이유다. 오직 그리스도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안과 기쁨과 참된 만족의 이유가 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결론

김미진 간사의 의도나 동기에 대해서는 드러난 것이 없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녀의 강의 중에는 감동적인 간증이 있고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조언과 교훈도 있다. 그러나 <왕의 재정>이라는 강의가 결국 청자에게 “구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왕이 부어준다고 약속한 “재정”이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고 하지만 결코 성경이 말하는 원래 의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다 받는다고 주장하는 몇몇 극단적인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은 아니더라도 마음을 곱게 먹으면 하나님이 물질을 부어주신다고 말한다는 면에서 분명히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의 범주 안에 있다. 솔직히 조엘 오스틴이나 베니 힌 등 번영신학의 대표주자들도 “사랑”, “신뢰”, “감사”, “정직”, “만족”이라는 미덕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신학을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 “그의 뜻”, “사역”이라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같다. 그러니 번영신학이라는 비판은 앞으로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기만 한다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쓴다면, 가난한 자를 돕는다면, 그런 마음으로 순수하게 구한다면 엄청난 재물이 나에게 주어질 것이고 세상에 나를 통해 복이 흘러갈 것이라는 말은 절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욥과 같이 그 모든 것이 나에게서 사라질지라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실 자도 여호와이시니 오직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복음이다. 모든 인간의 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엄청난 재물을 헛되다고 말한 솔로몬이 전한 복음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 빵을 구하러 달려간 무리가 서 있는 곳으로 가보자. 그들은 예수님께 여전히 물질을 구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희가 구해야 할 단 하나의 빵,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그분을 찾지 않는다.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자리에 남아서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고 하자.

“예수여, 저는 정말 당신만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일생을 드리기 원합니다.
그러면 제게 5000명을 먹이고도 12 바구니 남을 만큼의 빵을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실까?

<왕의 재정>의 메시지는 그 사람에게 약속한다.

“당신이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엄청난 빵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 같다.

“너는 지금 나를 구하고 있느냐? 아니면 나의 빵을 구하고 있느냐?

두 주인이 아니라 하나만 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