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존 맥아더 목사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4. 주재권 구원은 구원과 제자도 또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장두만 박사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성화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칭의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복음에 주재권에 대한 고백을 첨가하는 것은 복음의 강조점인 은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얼마만큼의 주재권이 돼야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나?”라고 묻는다.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세심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두만 박사의 논점은 옳다. 칭의와 성화는 개념상 구분이 된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 없이 주재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복음의 강조점을 멀리 벗어난 것이다. 구원의 결과를 조건으로 만들면 안 된다. 필자는 존 맥아더가 장두만 박사의 이러한 논점에 모두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주재권 구원이 가르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주재권 구원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칭의와 성화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인 참된 믿음은 그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칭의를 얻는 사람은 성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 열차의 각 객실을 세심하게 구별하는 것은 옳으나 그 객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기장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목적지까지 이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옳다(롬 8:30).
장두만 박사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자”라는 단어가 항상 “제자”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제자”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신자를 제자라고 할 때 주와 스승이신 예수님이 요구하신 제자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이다.
장두만 박사는 어떻게 신자와 제자를 구분하는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가?
구원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믿어라’라는 것이지만, 제자도의 조건은 ‘거하라, 순종하라, 사랑하라, 자신을 부인하라, 십자가를 져라, 따르라, 자기 생명을 버려라, 가족을 미워하라’와 같은 것들이다. 구원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모든 생애에 걸친 성장 과정이다. 구원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현세의 상급과 영원한 상급을 결정하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행위로 얻는 것이다.
주재권 구원은 이렇게 묻는다.
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도 않고 자기 생명과 가족을 가장 사랑하는 자도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생애에 걸쳐 아무런 성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나? 현세의 상급과 영원한 상급을 위해 경주하지 않는 사람이 도달할 영원한 운명은 무엇인가?
주재권 구원은 둘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를 억지로 구분하고 떼어 놓는 잘못된 복음에 반하여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고 있다.
5. 주재권 구원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
장두만 박사의 지적처럼 성경엔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고린도교회 성도들(고전 3:1-4),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계 3:1-22)과 같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등장한다.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이 이러한 자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가지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중간에 이러한 애매한 자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참된 믿음/거짓 믿음)은 성경에 기반을 둔다. 사도 요한은 빛과 어둠으로 구분을 하고, 예수님은 주 안에 거하는 자와 밖에 있는 자로 구분하신다. 주여 주여 말만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로 구분하신다. 필자의 생각엔 오히려 주재권 구원의 원리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준이 된다. 신자의 마땅한 삶의 방향, 마땅히 맺어야 할 삶의 열매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성도에게 바울은 경고하고 그들의 현재 상태를 책망하는 것이다. 때로 바울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확증하라고 권고한다. 정말 거듭난 것이 확실한지 점검하라고 말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반대로 칭의와 성화를 억지로 분리하고 그 연결고리를 강조하지 않을 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는 무엇인가? 그는 성화가 덜 된 사람인가? 아니면 칭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인가? 필자는 이 경우가 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는 확실히 믿는다”라고 말한다면 전혀 성화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태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완벽하지 않지만 그가 달려가고 있는 길이 성화의 길이라면 칭의에 대한 그의 지식이나 주관적인 경험이 약하더라도 살아있는 영혼이라 말할 수 있음은 참된 믿음은 행함을 포함한다는 주재권 구원이 주장하는 성경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헛된 확신을 가진 육신적인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그가 바라봐야 할 푯대인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판단하고 행위로 구원을 얻고 확증하려는 율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비참한 영혼에게 새 생명을 줄뿐만 아니라 연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고 새 생명의 목적인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에 강력한 소원과 능력을 더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주재권 구원이 그것을 말한다. 구원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6.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나 헌신이 없는 구원은 ‘값싼 신앙’이라 하여 매도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장두만 박사는 기독교 진리 자체를 믿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값싼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훈련을 받고 양육받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첫걸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장두만 박사의 말처럼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는 구원의 교리를 값싼 신앙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그 태도에 있어서 그렇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다. 칭의도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의 증여자가 아니라 취득자로서 온전히 은혜로 누군가가 받은 것의 값을 평가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다음 칼럼 시리즈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주재권 구원’의 원래 의도를 벗어나 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를 사용하고 있다.
‘값싼 신앙’은 참 자극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참된 가치를 생각해보면 전적인 순종과 헌신을 배제한 구원은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낮아지셨나?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창조주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 악한 원수인 사람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은 얼마나 큰가?
사실 주재권이 실현되어 순종의 열매를 맺는 근본적인 원인과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원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 같은 사랑.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완벽한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순종과 헌신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원의 참 가치를 안다면 순종과 헌신이 조금도 없을 수는 없다.
자녀는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처음부터 깊이 알지는 못한다. 그 나이에 맞게 표현하지만 어렸을 때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부모에게 베푼다. 그러나 아이가 자랄수록 그 마음에 부모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표현된다. 부모의 내리사랑의 크기를 깨닫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가 자기에게 쏟았던 사랑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철부지 시절 부모를 대했던 모습을 부모의 사랑과 비교할 때 너무나 값싼 사랑이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라면서 가져야 할 사랑의 크기는 분명하다. 부모의 사랑의 크기를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분명하다.
만일 구원에 있어서 순종과 헌신이 배제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충분하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필자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철부지 사랑 혹은 값싼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태어나는 것도 자라는 것도 아버지 하나님 없이 되는 것이 없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신자의 사랑은 순종과 헌신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결론
장두만 박사는 구원 얻는 믿음이란 지식 이상이며 분명한 열매를 맺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고백만 하고 나중에 돌아선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것이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 한하여 한 번 구원이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것이 존 맥아더가 말한 주재권 구원의 핵심이다. 장두만 박사의 비판은 그가 동의한 주재권 구원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장두만 박사는 맥아더 목사의 주재권 구원을 비판했을까?
장두만 박사의 비판은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다. 주재권 구원이 오용될 경우 그러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주재권 구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장두만 박사처럼 오해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왜, 어떻게 주재권 구원이 오용되고 있는지 다음 칼럼부터 살펴보기 원한다.
존 맥아더가 회복하려고 했던 구원의 본질, 성경이 말하는 주를 인정하는 복음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강조하고 부르신 이가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강조된 올바른 복음이다. 행함이 결과로 따라오는 것을 포함한 참된 믿음이 강조된 복음이다. 야고보와 바울의 조화로운 교리연결이다. 또한, 주가 요구하신 제자의 삶이 제대로 담긴 복음이다. 성경이 억지로 분리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적인 복음이다. 이것이 필자가 그레이스 교회와 마스터스 신학교에서 직접 듣고 경험한 복음 교리이다.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주재권 구원의 핵심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후자는 부정한다.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주재권 구원은 반대한다. 왜 그럴까? 주재권 구원이 오해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