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박창고와 눈 곳간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바른 이해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욥 38:22)

예전에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평하는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많은 댓글이 달렸다. 그중에 성경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믿을 수 없는 신화나 오래된 고대 문서 혹은 지어낸 소설이라고 말한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성경이 무오하다면 우박창고는 어디 있냐?”고 물었고 “성경이 모두 사실이라면 왜 사본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냐”라고 물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어떤 배경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찾아 들어가 보면 신학교를 졸업했거나 심지어 현직 목사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오늘 해가 아침 일찍 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인가?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누구도 “너 왜 아침부터 거짓말하니?”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듣는이가 알기 때문이다.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 진리다. 

또 만일 내가 “나는 300명이 모인 교회에 다닌다”라고 말할 때 실제 교인 수가 312명이라면 나는 거짓을 말하는 것인가? 정확한 숫자를 요구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우리는 어림수를 사용한다. 이것이 거짓인가? 아니다. 내 의도는 정확한 수를 이야기하여 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듣는이도 그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어림수만 제공해도 충분히 내가 전달하려는 것을 전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만일 내가 “네 마음이 참 호수처럼 넓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인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호수처럼 넓을 수 있는가? 호수라면 어느 정도 크기의 호수를 말하는 것인가? 듣는 이는 이런 것을 따지면서 내 말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듣는 순간 비유적으로 ‘마음이 넓다’라는 칭찬으로 알아 듣는다. 

존 프레임은 “무오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무오적 언어는 그것이 주장하는 바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무오성을 더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말할 때 성경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성경이 주장하는 것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신학자들이 때로 무오성의 자격 요건이라 불리는 것들을 열거한다. 즉 무오성은 정제되지 않은 문법, 비 연대기적 내러티브, 어림수, 부정확한 인용, 과학 이전의 현상학적 기술(예를 들면, ‘태양이 떠올랐다’), 숫자와 상징의 사용, 부정확한 묘사(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갔다고 전하는 마가복음 1:5과 같이)와 양립이 가능하다. 나는 이런 요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들을 무오성의 ‘자격 요건’으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무오성이 가진 기본적인 의미의 적용일 뿐이다. 즉 정확성이 아닌 진리를 주장한다. 무오적 언어는 생각 없는 독자들이 무오의 언어에 관해 주장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주장하는 바에 충실한 언어이다

나는 성경은 무오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은 진리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명제적 정보를 주실 때 그것은 전문적 언어가 아닌 일상의 평범한 언어로 표현된다. 더 나아가 기록된 말씀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언어 메시지만큼이나 무오하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음성만큼이나 무오하다.” – 존 프레임, “성경론”, 284-6pp

욥기에 등장하는 눈 곳간과 우박 창고는 시의 형식에 담긴 표현이다. 가령 내가 ‘양털 구름’이라고 표현할 때 아무도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지적하지 않는 것처럼 시의 형태에 등장하는 ‘우박 창고’와 ‘눈 곳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나님은 욥에게 우박 창고와 눈 곳간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네가 그것을 찾을 수 있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어디에 저장되어 있다가 쏟아져 나온 것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 눈과 수없이 내리는 우박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지성이 있냐고 물으신 것이다. 당연한 대답은 욥이 한 것처럼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이다(욥 40:4).

프레임이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은 성경의 일상적 표현은 ‘무오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서로의 말하는 진실성이 충실하게 표현될 때 이러한 표현 방식에 문제를 제기 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의 무오성 역시 그러하다.

성경은 때에 따라 일이 일어난 순서를 섞어서 과거를 재구성한다. 성경은 어림수를 사용한다. 성경은 짧게 정리하여 인용할 때도 있다. 숫자와 상징을 사용하기도 하고 부정확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오류’라고 비판받는 표현 방식들은 우리가 오늘날 진리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듣는 이에게 더 분명하게 전달할 때가 있다. 숫자를 어림잡아 말하기도 한다. 남이 한 말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옮기지 않는다. 일어난 사건에 대한 묘사를 객관적으로 오류가 없으나 주관적인 관점에서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오류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표현 방식이라고 말한다. 화자가 말하는 것의 진실성을 충실히 제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그 진실을 충실하게 듣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오성’을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이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게 표현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용어(더 정확하게는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 그 배경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표현 방식)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박 창고’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우박 창고’라는 표현으로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네 마음은 호수’라고 말할 때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고 ‘호수’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 해석학에서는 이를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문맥을 파악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하려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함이다.

이처럼 ‘무오성’에 대한 개념의 올바른 정립이 성경의 무오성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개념을 오해한 경우를 넘어서 무오성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달라고 요청한 한 감리교회 담임목사의 글이다.

성서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원본은 무오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본들을 다 합친다고 원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문서들을 완벽하게 해석한 일치된 의견도 없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오류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는 무오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성서에 담긴 영원불변의 진리라는게 뭘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혹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만 통하는 신앙고백을 영원한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서에는 오히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온갖 편견과 오류들이 가득합니다. 성서의 대부분은 여성들에 대해 차별적이었고, 노예제도를 인정했으며, 자연에 대해 지극히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했고, 그 안에 담긴 법과 윤리들은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끔찍한 것들도 많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틀릴 때도 있었고, 바울은 아담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으며, 아가서 같은 책들은 꿈보다 해몽이 더 좋지 않고서는 도대체 왜 이게 성서에 포함되었는지 알기조차 어렵습니다. 계시록은 바르게 해석하면 유익하다고 하지만 역사 속에서 바르게 해석된 경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온갖 이단과 사이비 종말론으로 이끈 혼란스러운 문서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무오하냐구요? 아니오. 네버! 모순과 오류 투성이입니다. 좋은 부분도 있지만 나쁜 부분도 많습니다. 맞는 말도 있지만 끊임없이 현대 사회에 맞게 재해석 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로운 내용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하고 배타적이었던 고대의 문서이고, 피해망상에 찌든 소수민족의 환타지일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안에 영원불변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지만 기독교 바깥의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별 의미도 없는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위와 같은 경우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개념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실성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다. 그는 몇 가지 이유로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다.

첫째, 원본이 없다.

성경만큼 많은 사본을 가지고 있는 고대 문서는 드물다. 그러나 그 많은 사본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사본에 대한 이론이 다양하고 사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오성’이 저자의 진실성이 충실하게 제공되는지에 달려 있다면 원본이 없다는 이유가 성경을 유오하게 만들지 않는다. 

가령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간다’가 나의 원래 했던 말인데 그것을 여러 사람이 옮겨 적기를 ‘나는 매일 학교에 간다’,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간다’,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온다’라고 했다고 하자. 서로 다른 표현이 원래 화자인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진실성을 해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의 사본은 놀라울 만큼 일치하며(학자에 따라 90%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단어나 표현 역시 저자의 의도에 의문을 가져올 만큼 치명적인 것이 없다. 오히려 수많은 사본이 있고 그것이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의 진실성을 충실하게 제공한다는 면에서 사본학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둘째, 성경은 시공간적으로 제약된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성을 차별하고, 노예 제도를 인정했으며, 자연에 대해 지극히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기록했고, 끔찍한 법과 윤리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을 잠시 생각해보자. 성경이 여성을 차별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다. 노예 제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원한 뜻이라고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이 과학 교과서처럼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쓰인 책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성경을 그런 책으로 묘사했을까? 당시 문화가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였고, 당시 사회가 노예를 인정하는 사회였으며, 당시의 자연에 대한 지식이 오늘날 같이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어떤 영역에서 또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과학이 따라 갈 수 없는 자연에 대한 놀라운 지혜가 그들에게 있었다).

당시의 사회, 문화, 역사 가운데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의 일상 용어로 제시한다. 여성을 차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 속에서 올바른 남녀의 역할을 다하라고 명령한다.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발전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으로 노예를 대하고, 노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그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확장된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펜을 들지도 않았다.

끔찍한 법과 윤리는 어떠한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그 법을 찬양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공의와 사랑이 풍성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범죄자의 인격을 존중하자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지지자들은 구약의 율법이 끔찍하고 비윤리적이라 말할 것이다. 돌로 치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쪽에 서 있는 피해자들의 관점에서는 오늘날의 법에서 공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계속 피해를 입게 되고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은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발전된 윤리와 법은 부익부 빈익빈을 해결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법은 부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더 부자 되게 해준다. 성경의 율법은 가난한 자를 돌아보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게 한다. 

끔찍한 형벌과 처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도덕법, 종교법이 어우러지면서 가끔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그들의 문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데 있어 완벽한 법이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특별히 그 법이 오늘날 신자에게 그대로 요구되지 않지만, 구약의 법정신이 변함없이 유효하게 신약의 법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현대인이 제정한 발전된 법과 윤리는 어떤 영역에서 더 끔찍한 현실을 조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구약에서 요구하신 법의 정신에서 멀어질수록 더 현실은 참혹하다.

구약의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법을 공부하고, ‘나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 즉 율법의 법정신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사제도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제사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율법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고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찬양하게 된다.

셋째, 성경을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이 사람은 예언자의 예언이 틀릴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틀린 적이 없다. 거짓 선지자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경우나, 예언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 변경된 적은 있다. 가령 요나가 니느웨 성에 성이 무너질 것이라 선포하였지만, 하나님은 성의 백성이 회개했을 때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 이것은 요나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요나의 경고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 그들이 회개했을 때 심판을 거두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이 다시 범죄하고 돌이키지 않았을 때 니느웨는 심판을 당하게 된다.

또 이 사람은 바울이 아담을 실존 인물로 믿은 것을 비판하는데, 성경은 아담이 실존 인물이라 말하고 있고 바울이 그것을 믿는 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한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진실성을 거부하여 아담을 상징적인 인물로 보기 때문에 이를 비판한 것 같다.

또한, 아가서를 성서에 왜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계시록은 많은 혼란을 가져온 문서라고 평한다. 그렇다. 그가 말한 대로 “바르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진실성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충실하게 기록된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 목사의 성경에 대한 평가를 읽어보면 상당히 많은 외부 요인에 의해 성경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이 목사가 성경 자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그 안에 영원불변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지만 기독교 바깥의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별 의미도 없는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과연 당신은 어떻게 성경을 바라보는가?” 그것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분명히 이렇게 묻겠죠. 그러면 너는 왜 목사하니? 왜 교회 다니니? 성서는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니?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서에는 무언가 더 나은 인생, 더 나은 미래와 세상을 위해 질문하고 답을 찾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죄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인생이 다 은혜롭지도 않고, 그들이 내놓은 답이 다 정답도 아닙니다. 따라서 (해청쌤 말씀대로) 그들의 실패를 밟고 서서, 때로는 거슬러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또다시 답을 찾고, 때로 실패하기도 하는 인생의 디딤돌이 저한테는 성서의 의미입니다. 그걸 통해서 더 나은 인생, 아직 그 누구도 드러내지 못한 인간성의 참된 이상, 참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 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성서가 그 자체로 인생의 닫힌 결론을 내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최근에 알게 된 어느 페친분이 성서를 “창문”이라고 비유하셨는데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성서는 창문이고 우리는 그 앞에 책상 놓고 앉아있는 학생입니다.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는데, 그 창에는 금이 가서 테이프로 붙여 놓은 곳도 있고, 손자국도 많이 있고, 먼지와 거미줄도 장난 아니게 붙어 있는 것이죠. 왜 하필 기독교냐구요? 제가 하필 그 창문 앞에 앉아 있으니까요. 그 창가에 앉아서 거미줄도 치우고, 먼지도 불어내며 바깥을 보는게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언젠가 다른 창으로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지만…)

이 목사의 대답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실패한 인생이 있고 성공한 인생이 있다. 믿음의 조상의 삶 속에도 연약함과 실패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얼마나 불순종하였는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이를 삶아 먹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얼마나 처참한가?

하지만 이 목사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하여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권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는 그 모든 기록된 역사와 가르침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창문의 비유를 다시 언급하면 성경은 맑고 투명한 창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내용이 맑고 투명한 것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진리가 맑고 투명하다는 말이다. 성경은 금이 간 인생, 그래서 테이프로 붙여진 인생, 손자국이 많이 남은 인생,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진 인생을 담고 있지만, 그 모든 역사를 통해 맑고 투명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이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의 참된 의미다.

치워야 할 거미줄이 창문인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맑고 투명한 성경은 내 안에 치워야 할 거미줄을 보여준다. 먼지는 성경에 쌓여 있지 않다. 맑고 투명한 성경이 내 안에 쌓인 먼지를 보여준다. 성경에 기록된 인생들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진리를 선포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마지막으로 이 목사는 “언젠가 다른 창으로 자리를 옮길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성경이 흠이 많은 유오한 존재라면 바깥을 바라보게 하는 다른 창문으로 옮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진실로 믿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성경의 저자가 속한 사회, 역사, 문화 속에서 일상의 용어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전하기 원하셨던 절대적 진리가 충실하게 전달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은 존재하는 많은 도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창문으로 옮겨 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할 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결론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뒤흔드는 문제를 가져온다.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요 17:3).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요 5:39), 신약 성경은 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전 2:2).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계시 기록이며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된 계시 외에 다른 가르침은 성경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후 11:4; 갈 1:8).

쉽게 말해 다른 창문은 없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다른 창문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된 것은 성경뿐이며 그리스도가 증언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뿐이다(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므로 다른 창문으로 이동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전파한 말씀이 아닌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찾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못 박았고(갈 1:7) 사도 베드로 역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행 4:12).

참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도구로서 성경은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 책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며 이 책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없이 우리에게 맑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그분의 영광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육신을 입은 말씀을 우리에게 다른 그 어떤 수단과 방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다면 그리스도가 성경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기준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성경에 대하여 가졌던 판단보다 낮고 부족한 판단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지에 대해 물음표가 따라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주가 가지셨던 판단 기준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