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존 맥아더 목사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 구원 개념이 불분명하다

장두만 박사는 존 맥아더 목사의 구원 개념이 불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맥아더 목사의 목회 경험에 대한 기술을 문제 삼는다. 맥아더 목사는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다시 침례를 준다’고 말하였는데 장두만 박사는 ‘이런 자들이 언제 정확하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맥아더 목사의 입장은 아리송하다고 말한다. 최초에 결단한 사람의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침례를 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맥아더는 처음에 침례 받을 때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존 맥아더는 정확히 반대를 말하고 있다. 맥아더 목사는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믿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이 거짓이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참된 구원을 얻었을 때 그들이 원한다면 침례를 다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그레이스 교회에서 실제로 지켜본 모습이다. 매 주일 저녁 침례식에서 침례에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 간증을 하는데 종종 과거에 자신이 믿었다고 생각하고 침례도 받았지만 실제로 그 구원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장두만 박사가 지적한 첫 번째 비판은 존 맥아더가 FG(Free Grace) 진영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다. 

“그들은 침례를 받을 당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해 구원은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믿고 있다”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이 문장은 존 맥아더 목사가 주재권 구원을 강조하면서 일관성 있게 비판해온 이분법적 사고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첫 번째 비판은 잘못된 비판이다. 존 맥아더 목사의 가르침과 실질적인 적용을 제대로 안다면 이러한 비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객관적인 주재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결단, 소원, 각오와 실제적 주재권(실제로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것)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객관적 주재권(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이 삶 가운데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주재권을 완벽한 순종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제기한 비판이라고 판단한다. 실제로 문맥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한일서의 경우 이렇게 강조하며 말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장두만 박사의 비판대로라면 사도 요한 역시 실제적 주재권과 객관적 주재권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범죄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를 보거나 알지도 못하였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신서의 앞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요한은 완벽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을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오히려 완벽하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1:10). 3장 6절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빛이신 하나님,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을 보고 알고 사귐이 있는 자는 당연히 죄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여기서 객관적, 실제적 주재권을 구분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하나로 묶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성경은 실제적, 객관적 주재권을 억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존 맥아더는 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한다. 존 맥아더가 실제적 주재권을 강조할 때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도 요한처럼 맥아더 목사는 완벽한 순종을 해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회개하고 자백하여 죄 사함을 얻고 은혜를 누리라고 권한다. 

그 완전한 기준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패할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형편없이, 자주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참된 신자는,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며 나아올 것이다(요일 1:9) – 존 맥아더, “참된 무릎꿇음”, 350p

 물론, 믿음이 죄 없는 완전함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가 아니다…믿는 자들은 순종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불완전하게 따를 수도 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귀신에 사로잡혔던 소년의 아버지의 간청을 이해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 311p

그리스도에 대한 온 마음을 다한 헌신은 우리가 온전히 순종한다거나 완벽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죄로 물든 육체의 흔적은 자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한다(롬 7:15).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불순종보다 순종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특징이 됨을 뜻한다…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순종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실패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빌 3:12~15)…그러나 구원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실질적으로 의롭게 한다는 진리를 그런 사실이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 40-41pp

오히려 실제적 주재권과 객관적 주재권을 구분하는 것은 주재권 구원이 비판하고 있는 이분법적 구원론의 아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스크린샷 2017-05-10 오전 11.46.04

주되심 믿음(객관적 주재권)과 주되심 순종(실제적 주재권)을 구분한다면 언제가 구원의 시점이라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누군가가 주되심을 믿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를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주되심을 믿은 상태(1)에서 주되심을 순종하는 상태(2)로 자라나는 동안 열매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맺는다면(Q2) 이를 아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참된 믿음으로서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하고 그것이 차차 열매로 드러난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객관적인 주재권이 완벽한 실제적 주재권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객관적 주재권을 인정하는 시점과 실제로 그 주재권이 드러나는 순종을 구분하는 것은 주재권 구원이 문제로 삼은 내용을 스스로 취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스크린샷 2017-04-27 오전 11.30.19

참된 믿음에는 주되심을 기반으로 한 행함이 포함된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나타나는지는 영적 성장의 속도와 신자가 경건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열심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객관적 주재권 혹은 주되심 믿음은 결국 주되심 순종으로 드러나야 진실성이 입증된다. 주재권 구원이 완벽함을 요구하게 될 때 행위구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객관적 주재권을 실제적 주재권과 분리하려고 하는 노력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얻는 참된 믿음의 변질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3. 구원의 확신이 약화된다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을 믿고 순종할 때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면, 결국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을 것이라 말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행위로 드러나는 것만 집중하다 보면 연약하고 부족한 삶의 열매가 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주되심은 완벽함(perfection)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direction)을 요구한다. 영적으로 태어난 아기는 넘어지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만(완벽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자라난다. 영적 완성이 아니라 영적 성장이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의 확증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심지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마치 사도바울이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만일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면, 달려갈 길을 가지 않고,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 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다는 것을 그의 삶에 드러난 열매들을 제거한 후에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엔 주재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확신을 강화한다. 주관적인 결단, 소원을 참된 믿음으로 인정하고 객관적 진리만 인정하면 영적으로 태어난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 확신을 가져다주는 무서운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주재권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을 약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이 행함을 강조하다 보니 완벽한 행함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비판하는 것 같다. 존 맥아더 목사가 분명하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행함을 강조한 부분에서 균형을 잃고 행위 구원처럼 들리게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해 쓸데없는 혼란을 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이에 대하여 “주재권 구원” 시리즈에서 다룰 예정이다.

주재권 구원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사람 중에는 완벽한 행함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기준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존 맥아더가 지켜내려고 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마치 칼빈의 바른 교리를 칼빈주의자들이 망친것처럼 성경 자체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율법주의와 행위구원으로 빠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러한 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의 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아주 강력하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한다. 말씀을 읽고 대할 때마다 “이건 이런 식으로 대충 하라는 거지 완벽하게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야”라고 말해야만 균형이 잡힌 성경해석, 성경 읽기가 되는 것일까? 성경의 표현 그대로를 인정하고 문맥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십자가의 보혈과 넘치는 긍휼,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강조하는 본문을 통해 구원은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주어진 선물인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주셔서 우리의 죄를 씻고 의로 옷 입혀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믿음을 통하여 주신다. 믿음 그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인데 씨앗과 같은 이 믿음은 심기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짜일 수가 없다. 자라는 속도와 맺는 열매의 수가 다를 수는 있어도 이 씨앗은 자란다.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강조하는 본문을 만날 때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푯대이며 달려갈 길이고 지켜야 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