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능력의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 : 시편 29편
설교자 : 최종혁
시는 화자가 처한 상황을 알고 그 상황 속에서 시를 읽을 때 이해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시편 23편을 대관령 목장에 가서 양떼를 바라보면서 읽는다면, 목자가 되어서 양들을 돌보면서 묵상한다면 더욱 와 닿을 것입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 3편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다면 도망가면서, 또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읽으면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다윗의 마음을 훨씬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의 고백이 참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엄한 해돋이를 보면서 시편 19편을 묵상하면 좋을 것이고, 밤하늘에 별들이 많이 보일 때는 시편 8편을 묵상하기 좋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시편 29편도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읽으면 더욱 묵상하기 좋은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일까요?
저는 이 시편을 준비하면서 태풍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편이 태풍이 올 때,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올 때 기록된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는 시적인 요소가 잘 드러나 있어서 가장 시 다운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고 평행 기법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반복인데, ‘여호와’라는 말이 11절로 구성된 이 시에서 총 18번이 나옵니다. 시의 주제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마땅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에 대해 1~2절에서 말하고, 3~9절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유는 길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10~11절은 그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시로서 기록하게 된 동기가 바로 다윗이 경험한 폭풍우입니다.
1. 여호와께 합당한 예배(1~2절)
1~2절 말씀은 시편 96:7~8, 역대상 16:28~29의 말씀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 말씀 모두 공통적으로 “영광과 권능(능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린다”는 말이 3번 반복되는데, 본래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대상일 때는 그 사람에게 없는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가 되지만, 하나님이 대상일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분에게 돌려드린다, 혹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2절의 끝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결국 1~2절에서 다윗은 4번을 반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돌릴지어다”는 표현은 예배가 하나님께 마땅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1).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명령은 “권능 있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권능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데,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시 89:6~7; 욥 38:7).
그런데 천사들은 이미 하나님을 잘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천사들(사탄)은 인간이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왜 굳이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할까요?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생각하기에, 가장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 그들조차도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비슷한 말씀인 시편 96:7~8에서는 “만국의 족속들”이 언급되었고, 역대상 16:28~29는 “여러 나라의 종족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느 민족이든 나라든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만약 이 시편을 다윗 시대의 이방인들이 읽었다면 조금 다른 의미로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권능 있는 자” 즉 “신의 아들들”은 곧 그들이 섬기는 여러 신들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읽었다면 그들에게는 ‘너희가 섬기는 신들조차도 여호와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존재든지 영광스러운 존재든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하나님께 돌릴 영광에 대해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영광’과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피조세계 가운데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영광은 실제로 그것들을 만드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행하시는 그 놀라운 능력의 일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곧 죄의 본질입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0-23). 사람은 뭐든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을 예배합니다. 창조주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을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예배하는 것이 합당할까요? 당연히 창조주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끝으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를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니 마땅히 그에 따르는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구별된, 즉 거룩한 옷을 입고 그들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옷 자체에 무슨 특별한 기능이 있거나 해서 그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천사들도 특별한 옷, 특히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천사들이 우리처럼 이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존재로서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환상에서 천사들은 3쌍의 날개 중 한 쌍으로는 얼굴을 한 쌍으로는 발을 가리고 한 쌍으로 날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예를 갖추는 모습입니다.
1~2절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합당한 방법으로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모든 피조물,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당연히 해야 할, 마땅한 책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일의 말씀들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예배해야 할 대상 하나님이시고, 그분께 합당한 방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특별히 이 시편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강력한 동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혹은 두려운 능력 때문입니다.
2.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3~9절)
3~9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의 소리”라는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총 7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무엇일까요? 3절은 분명한 병행 구조로서 여호와의 소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바로 우렛소리, 즉 천둥소리입니다. 3절에서 다윗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비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천둥은 구름 위에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분께서 하신 일은 ‘말씀하시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분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하고 움직였습니다. 다윗은 위엄찬 천둥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소리로서 이 모든 일을 명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소리는 그저 ‘천둥소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실제로 천둥소리가 백향목을 꺾고 화염을 가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윗은 천둥소리가 연상시키는 하나님 자체, 혹은 그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마치 이 천둥이 폭풍우의 지휘자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마치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장군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는 장군들의 모습처럼, 그 소리에 힘이 있고 위엄이 있습니다(4절). 얼마나 힘이 있고 위엄이 있을까요? 그 소리에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이고 부서질 정도입니다(5절). 매우 파괴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만큼 힘 있고 능력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5). 구약에는 백향목이 70번 정도 언급되는데, 매우 귀하고 특별한 나무입니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레바논의 백향목이 사용되었습니다. 백향목은 약 40미터까지 곧게 자라는 침엽수에 향이 좋고 병충해도 없고 잘 썩지 않아 내구력도 좋아 건축 자제로서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향목의 레바논의 상징과도 같은 나무였고, 위엄과 힘, 영광, 영원함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다윗도 그런 백향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상징성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나무도 하나님의 힘 앞에서 부서집니다. 그 나무 뿐 아니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까지도 진동합니다(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6) 시룐은 헤르몬 산의 시돈식 이름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스라엘의 북쪽을 의미합니다. 그 땅이 진동하기를, 마치 송아지가 놀라 두려워서 펄쩍 뛰는 것처럼 진동합니다. 그리고 그 진동은 남쪽 끝인 가데스 광야로까지 지어집니다(8). 하나님께서 보내신 폭풍우(뇌우)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이 진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 장소를 피하면 되는데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이 진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아마 땅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서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본능적인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번개가 동반되면 그런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7). 이런 상황에서 암사슴이 낙태, 혹은 조산하고 삼림이 민낯을 드러냅니다(9). 하나님께서 보내신 폭풍우의 힘입니다. 그 힘은 산이든 광야든 모든 땅을 뒤흔듭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두려워하고 놀라게 합니다.
기후 조건이 좀 다르긴 하지만, 우리로 치면 다윗은 거대한 태풍을 경험하며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 앞에 자신이 그동안 튼튼하다,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이 의지하던 것들이 하나님의 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그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 때로 우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놀라워서, 너무 감격해서, 혹은 너무 맛있어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고 오히려 표현하는 것이 그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보며 ‘영광’이라는 말 밖에서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이 놀라운 일을 보며 ‘영광’이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영광’은 ‘무겁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볍지 않고 따라서 그분이 하시는 일들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효력 없이 나가는 말이 없고,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에 무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무게감에 압도되었고, 그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모든 힘의 근원이며 모든 영광의 시작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1~2절에서 어떤 존재든지 천사들까지도 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고 올바른 반응입니다.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를 바라보고 피조물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영광이, 능력이, 아름다움이 그분에게 속해 있고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의 주권적 은혜(10~11절)
9절에서 끝날 수도 있었던 시편이지만 다윗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폭풍우를 생각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10). 바로 노아 시대에 있었던 대홍수입니다. 8명의 사람을 제하고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엄청난 비도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시고 행하신 것입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의 왕이시고 앞으로도 왕이십니다.
누군가가 이런 절대적인 힘을 가졌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은혜 안에서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대홍수에 방주 밖이 아닌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의 가족과 같은 평안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크고 장대한 가나안 거민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거인 골리앗을 향해 물매를 들고 전진하던 다윗과 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풀무 불 가운데 던져지고, 사자굴에 집어 넣을 것이라고 위협해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이런 복을 주십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이 시를 쓰고 있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에 두고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 말해서 단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그 안에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처럼 지위가 높은 자도 아닙니다.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사람도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참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이 시의 결론입니다. 이 시의 결론은 이 시의 시작에 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태풍이 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시설물 관리, 창문에 신문지 붙이기, 밖에 나갈 일 만들지 않기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런 일도 하면서 시편 29편의 말씀을 한번쯤 묵상해 봅시다.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그 바람의 힘을 느껴보고 우렁찬 천둥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뒤에 계신 그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먼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심판하기도 하시고 복을 주기도 하시는 주권자이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영원한 왕임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마땅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영원하신 영광의 왕께서 그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심을 기억하고 그분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참된 삶이 시작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2편에서 말한 것처럼 그분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모순적인 듯 보이는 이 말은 능력의 주이시자 선한 왕이신 하나님께 너무나 합당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면서 그분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알면서 그분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의 시작에 계시고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다윗은 두려운 폭풍우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또한 그 능력으로 자신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고 작은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실제 폭풍우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에서 인생의 폭풍우 속에 있다면, 현재 고난 중에 있다면, 그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권자로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왕으로 좌정하고 계십니다. 욥은 고난 중에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는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 정말 그렇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시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편에 계시다면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폭풍우 중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폭풍우 중에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즐거운 날에도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