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형들을 만난 요셉

본문 : 창세기 42장

설교자 : 이병권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날들,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하루가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때때로 이전과 다른 특별한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좋은 일이면 상관이 없는데, 좋지 않은 일일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안 좋은 일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냥 묵묵히 견딜 수도 있고, 그 일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법을 찾아 고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정말 방법이 없어 보이는 답답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의 형들이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싶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 했는지, 왜 이런 일이 그들에게 벌어졌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과 애굽에서 벌어지는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처음과 마지막이 가나안에서의 이야기이고, 그 가운데 애굽에서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건은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시작된 흉년이 원인인데, 그동안의 모든 풍년을 잊어버릴 만큼의 극심한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흉년은 단순히 애굽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냥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던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1-2)

그래서 야곱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현재 야곱에게 몇 명의 아들이 있습니까? 열 한명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열 명의 아들만 보냅니다. 막내아들,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은 보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베냐민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큰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먼저 떠나보낸 것입니다. 요셉을 잃은 후 요셉에 대한 사랑은 베냐민에게로 이어졌는데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자녀 사랑이지만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편애입니다.

야곱의 편애 때문에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자녀들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서 요셉과 형들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 요셉과 요셉의 형들은 얼마 만에 다시 만나는 걸까요? 야곱은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갔고 서른 살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의 풍년이 있었고, 흉년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45장에 보면 요셉이 지금 2년째 흉년이 지났고 앞으로 5년의 흉년이 더 남았다는 언급을 합니다. 조금 차이가 날 수 있지만, 대략 계산하면 요셉은 22년 만에 형들을 만난 것입니다. 22년 만의 이루어진 첫 만남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6)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팔고 있는 요셉에게 와서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자신 앞에 엎드려 있는 형들을 보는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매정하게 노예로 팔아버렸던 형들, 그동안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제로서 느끼는 긍휼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참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의 요셉과는 달리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요셉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 요셉은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머리 모양, 그들의 복장, 그들의 말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형들에게 요셉은 모른척하고 거칠고 엄하게 쏘아붙이는데, 애굽을 엿보려고 온 정탐꾼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곡식을 구하러 왔다가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난 형들은 당황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정탐꾼이라고 말하는데 어찌합니까? 요셉은 지금 애굽에서 바로, 다음으로 높은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에 그들 모두를 처형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요셉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불리한 입장에 놓인 형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11)

여기 ‘확실한 자’라는 말은 정직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형들은 지금 요셉 앞에서 자신을 거짓말 하지 않는 자로 소개합니다.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형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요셉 앞에서 자신을 정직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형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관계없이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엎드려서 아니라고 하고, 설득해도 먹히지 않습니다.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요셉은 형들에게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딱 하나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15)

그들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하는 방법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은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합니다. 애굽에서 바로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신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런 요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야 한다니! 좀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한 번 떠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우기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다른 나라를 정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낸 일과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낸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극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위해 애굽을 오고 갔던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이방인 무리를 정탐꾼으로 의심하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의 말대로 정말 그들이 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집에 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곳에 오지 않은 동생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면, 정탐꾼이 아니라는 말도 사실이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형들을 삼일 동안 감옥에 가둡니다. 삼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생각도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요셉을 노예로 판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우리가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살펴봤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죄에 대한 결과로 지금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행한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애굽 말이 아니니까 요셉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다 토해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셉은 지난날의 서러움이 복받쳐옵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떠나 형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웁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형들에게 돌아온 요셉은 시므온을 끌어내어 결박합니다.

이렇게 열 명 중에서 시므온은 애굽에 남겨지고 아홉 명이 각자 곡식이 담긴 자루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대략 칠일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가는 중에 여관에 들렀는데 보니 그 자루에 곡식을 사면서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돈을 내지도 않고 그냥 곡식을 가져온 꼴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듭니다. 일이 또 잘못 꼬이면 정탐꾼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곡식을 훔쳤다는 죄목까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8)

요셉의 형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자를 돌아보며 양심의 일깨움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동생에게 저지른 죄, 해결하지 않은 그 죄에 대한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들은 ‘다음에 애굽으로 갈 때 베냐민을 데리고 갈 것인가?’ 라는 주제를 두고 아버지와 설전을 벌이게 되는데, 르우벤은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 베냐민을 데려가야 함을 말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야곱이 탄식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 야곱은 이미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는 베냐민까지 빼앗아가려는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대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르우벤이 야곱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한 말이지만, 그만큼 가족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아들을 편애하고, 다른 아들들은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자기 자녀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습니다. 이 가정에 죄가 들어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렸고, 죄로 인해 망가진 가정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시작되었고,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이 죽고, 베냐민만 남았는데 또 다시 베냐민을 잃는 것은 야곱에게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야곱의 반대에 부딪힌 형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애굽에 가려면 베냐민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애굽에 가지 않으면 시므온을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문제입니다. 야곱이 지금은 반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흉년은 앞으로 5년 동안 더 지속될 것이고 곡식은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떠나는 두 번째 여행,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들과 요셉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괴로움을 당했던 자가 괴로움을 주는 자가 되었고, 감옥에 갇혔던 자가 감옥에 가두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형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이렇게 대해도 괜찮은 걸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렇더라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닐까요?

그럼 좀 더 분명하게 생각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복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을 통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16)

요셉은 형들이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면서 ‘시험하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요셉은 형들은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시험을 했고, 형들이 다시 애굽을 방문했을 때 더 본질적인 두 번째 시험을 합니다.

요셉이 한 일은 형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결과, 형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다루고 계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이렇게 하지 않고, 시험하는 과정 없이 형들을 보자마자 바로 용서하고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들 입장에서 요셉이 정말 자신을 용서했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할까? 불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도 형들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정말 뉘우치고 있는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이들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거나 더 발전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는 그냥 회복되고, 그냥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고,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있을 때 그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모든 대가를 치르셨고, 우리가 회개함으로 돌이킬 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의 형들처럼 그것을 죄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심을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가운데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할 수 있고 그분의 선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내가 당한 어려운 일이 항상 나의 죄에 대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하신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를 행하시고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는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허락하심을 알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할 부분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며 필요한 일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면 그런 과정은 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며,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자기점검은 항상 나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잘못을 하며 실수하기도 하고 죄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잘못을 반성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저주받은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그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작은 인도하심에서도 하나님의 세밀한 역사하심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벌어지는 작은 일들, 반복 되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민감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점검하고,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