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총리가 된 요셉

본문 : 창세기 41장

설교자 : 이병권

 

요셉은 열일곱 살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 노예가 되었고, 아무런 잘못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애굽에 온지 십삼 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수였던 요셉이 총리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그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된지 이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요셉의 인생을 또 한 번 완전히 바꾸어놓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일도 역시 꿈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꿉니다.

바로는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꿈, 두 개를 연이어 꾸게 됩니다. 날이 밝은 후에 바로는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서 꿈을 말하지만,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냅니다. 아마 바로의 꿈을 들었을 때 자신의 경험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이 년 동안 잊고 지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신기하다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요셉은 꿈으로 인해 뜻밖의 어려움들을 겪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고 그 밑바닥에서도 꿈을 만납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꿈이 기회가 되어 그의 인생을 역전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꿈은 그 한 사람의 인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드라마가 됩니다.

그 드라마가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바로가 요셉을 필요로 할 때 가장 극적으로 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지혜자들이 해석할 수 없었던 바로의 꿈을 노예로 팔려온 히브리 청년, 그것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가 해석하러 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고 계시는 드라마입니다.

바로의 부름을 받은 요셉은 급히 왕을 만나기 위해 준비합니다. 수염을 깎고 죄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 앞에 있는 요셉에게 묻습니다.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15)

바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죄수가 정말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을까? 애굽의 모든 지혜 있는 자들이 해석하지 못한 꿈을 이 같은 자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왕의 질문에 대해서 요셉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요?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지금 감옥에 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거라며 자신을 변호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적당히 포장하며 꾸며야 하지 않을까요?

‘아! 이거 진짜 어려운 일인데, 제가 특별히 힘 좀 써볼게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 정도 되니까 하는 겁니다. 정말 다행인줄 아세요.’ ‘특별히 왕이니까 제가 해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데는 말하지 마세요.’ 이러면서 자신이 정말 대단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겸손했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대해 요셉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합니다. 꿈을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에 따른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와 대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그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말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하나님께서 꿈의 해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알려주고 요셉은 그 해석을 바로에게 말해줍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면서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합니다. 첫째는 바로가 꾼 두 개의 꿈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하면 앞으로 애굽에 7년 동안의 큰 풍년이 있고, 그 후에는 7년 동안의 극심한 흉년이 있다는 것입니다. 풍년 뒤에 있는 흉년이 얼마나 심한지, 흉년은 7년 동안의 풍년을 모두 잊을 만큼 엄청난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은 순식간에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이 7년의 흉년으로 애굽은 망하게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으로 바로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애굽은 나일 강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나라에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굽이 앞으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기근을 맞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기근을 대비하는 것은 애굽의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로에게 흉년을 위한 대책을 제안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제안한 대책은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비축해두었다가 7년의 흉년 동안 비축해둔 곡식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데, 요셉이 말한 대책을 따져보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지휘할 수 있는 지혜로운 책임자를 택하고 그 책임자의 명령에 따라 일을 수행할 감독관들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둘째, 7년의 풍년 동안 생산되는 곡식의 1/5을 거두어두라는 것입니다. 셋째, 저장한 곡식은 한 곳이 아니라 각 성읍에 저장해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흉년이 되었을 때 애굽의 백성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곡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보급망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바로에게 좋은 제안을 하고 있지만, 사실 왕에게 이러한 조언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조언을 했다가 왕이 나쁘게 생각하면 조언한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두려움 없이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그 즉시 이러한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온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지내온 과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동안 요셉이 보낸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에서 가정 총무의 일을 하면서, 그리고 감옥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맡아하면서 요셉은 많은 것들을 실제로 배웠을 것이고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요셉에게는 성장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특별 과외를 받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요셉은 총리가 되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에도 이런 배움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우리는 그런 훈련의 과정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때로는 직장에서, 때로는 교회에서, 학교에서 인생을 배우고 환경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훈련을 받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직장 사람들로부터, 나의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과외 선생님이 되어주는 나의 남편, 아내, 자녀들, 나의 영적인 성숙과 훈련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나의 인격을 훈련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즐겁지 않지만, 또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것을 그 뜻에 따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 요셉을 훈련시키셨고, 때가 되었을 때 요셉은 지혜롭게 바로에게 제안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제안을 들은 바로와 모든 신하들은 이 제안을 좋게 생각합니다. 요셉이 꿈을 제대로 해석했다는 것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제안한 대책도 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이런 요셉의 모습을 보고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38)이라고 평가합니다. 바로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삼아 나라의 모든 살림을 맡도록 합니다. 자신이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줍니다. 인장 반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칙령이나 문서를 왕의 이름으로 만들어 보낼 때 필요한 것입니다. 세마포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입을 수 있는 고급 옷감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총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바로는 자신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에 요셉을 태우고 사람들 앞에서 요셉을 높여줍니다. 사람들에게 요셉을 대할 때 바로를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종들은 병거를 앞서 가면서 ‘엎드려라’하고 외칩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높은 사람이 길을 갈 때 앞에서 ‘물렀거라’하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의 이름을 지어 주고,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하게 합니다. 아마도 요셉이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왕족 중에 하나와 결혼하는 것은 어려웠고, 그 다음이 되는 유능한 제사장 집안의 여인과 결혼시킨 것 같습니다. 요셉에게 애굽의 이름과 애굽의 아내가 주어졌다는 것은 바로에 의해 요셉이 애굽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다음이 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침에 감옥에서 죄수로 깨어났다가 애굽의 총리로 하루를 마칩니다. 애굽에서 가장 낮은 자에서 애굽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무엇을 먼저 하고 싶었을까요? 나를 억울하게 감옥에 가둔 보디발과 그의 아내, 불러서 혼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술 맡은 관원장, 꿈을 해석해주면서 내가 그렇게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좀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요셉은 총리라는 권력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합니다. 총리에 오르기 전에 어려운 환경에서 단련된 자로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며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입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중에는 계산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기 전에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에는 요셉의 간증, 요셉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51)라고 하며 이름을 ‘므낫세’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라고 하며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합니다.

7년의 풍년이 끝나고 요셉이 꿈을 해석한대로 7년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때를 준비한 요셉은 백성들에게 양식을 팔기 시작했고, 인접한 다른 나라에서도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 옵니다. 주변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왔다는 것은 다음 장에서 요셉의 형들이 애굽을 찾게 되는 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면서 그가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성취된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여전히 성취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성취되려면 아직 남았습니다. 요셉이 감당해야 했던 여러 가지 어려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마무리되었지만, 형들과의 관계가 남아있습니다. 아직 형들과의 관계에서 남아있는 갈등이 있기에 우리는 요셉의 다음 이야기를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은 물론 나라와 그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기근으로부터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시고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셨고, 이를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를 총리 자리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되어 줍니다. 요셉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위치에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25)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28)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요셉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했던 고백에도 나타납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51)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52)

요셉의 입에서 무엇이 먼저 언급이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16) 요셉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이런 요셉을 바로는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행정적인 계획과 일처리가 탁월한 사람? 어떤 일을 대비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바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요셉을 통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39). 그래서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사실 요셉에 대한 이런 평가는 바로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도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애굽의 왕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능력이 뛰어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어떠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고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대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정말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가지는 특별함, 그 사람의 뛰어남, 능력과 재능,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바라는 참된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움직이는 삶, 그래서 내 삶을 통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내가 아니라 나의 주님우리는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원합니다.

왜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런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나의 마음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나의 욕심이, 나를 높이려는 마음이, 나의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보다 나를 앞에 두려고 하고, 하나님보다 내가 높아지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내리고,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다시금 그리스도만이 내 삶에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요셉처럼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큰일을 행하셨는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내 삶의 초점과 방향을 나에서부터 하나님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 안에서, 나의 분량대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는 삶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앞세우면 언제나 작아질 뿐입니다. 한 없이 약해질 뿐입니다. 나를 드러내려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에게 마음을 쏟을수록, 삶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만족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앞세우고 그 크신 하나님 뒤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없이 강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자랑할 때, 나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