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께 바라는 한가지

본문 :  여러 본문

설교자 : 조정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만일 하나님께서 꿈에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처럼 당신에게 물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는가?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고 있어서다. 하지만 대부분 바로 요청할 제목이 있다: 자녀가 잘 먹고 잘 크는 것, 가정이 화목한 것, 재정적 압박, 빚에서 벗어나는 것, 내 집을 마련하는 것, 더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갖는 것, 학교 성적이 갑자기 오르는 것, 빨리 짝을 만나 결혼하는 것, 아기를 갖는 것, 아픈 가족이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 오랜 질병에서 치유되는 것,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원하는 직장을 얻는 것 등.

그런데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라고 말하면서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라고 고백했다(시 27:4).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 하나님이 주시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했다.

참 신앙을 가진 신자는 대부분 다윗의 요청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문제없는 삶을 살 땐 우리도 가끔 이런 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나를 압도할 때, 상실감이나 결핍감을 뼈에 사무치게 느낄 때, 오랜 기대와 바람이 연거푸 실망과 좌절로 돌아올 때, 다윗이 요청한 ‘하나님만 바라는 것’은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현재 나의 상황에 실제로 유익을 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신다’는 이론이 실제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머리로 아는 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한 가지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때 진정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반드시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기 원한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실 무언가를 더 간절히 바랄 때, ‘주님이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 되지 못할 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이 내가 바라는 한 가지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길을 찾길 원한다.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오직 하나님일 때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가장 큰 유익과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보다 원하는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하나님이 아닐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보다 원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죄의 뿌리는 원함과 관계있다. 하나님보다 더 원하는 무언가에 대한 욕구를 탐심이라 하는데, 탐심은 우상 숭배다(골 3:5).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은 선악과 외에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셨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한 가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도록 유혹했다. 하나님보다 과실을,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보다 과실이 주는 만족을 원하게 한 것이다(탐심). 과실이 우상이 됐다(창 3장; 고후 11:3). 아담은 명백히 첫째 계명을 어겼다(출 20:3).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 허락하지 않으신 무언가를 원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원하는 것, 탐심이다. 내가 우상숭배 중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두 가지 증상이 있다. 

먼저, 하나님을 불신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 봐 하나님이 일부러 막으신 것이란 사탄의 거짓에 속아 하나님을 불신했다(창 3:5-6).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동기를 의심한 것이다. ‘정말 나를 사랑하나?’ ‘뜻이 있다고?’

다음으로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는다. 라헬은 자식을 간절히 원하여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라고 불평했다(창 30:1). 원함이 너무 커져서 요구가 되고 그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려는 것이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조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욥 2:9).

사탄은 하나님이 현재 허락하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와 축복을 하나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현재 갖지 못한 한 가지만 계속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우상이 될 때까지, 그래서 그것을 지금 당장 주지 않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어떤 식으로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때까지 당신을 쥐고 흔들고 넘어뜨린다. 그렇게 당신은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놓고 욕하거나 불만을 쏟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차갑게 식는다. 

그때 당신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하나님보다 원하는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하나님이 아닐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현재 바라는 그것으로 우리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주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현재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으면 더는 바라는 게 없을까? 그렇지 않다. 인생은 원하는 것투성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바라는 게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또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구약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우상 숭배).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끝이 아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고 학업에도 소질이 있으면 좋겠다. 빚을 청산하면 끝이 아니다.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결혼하면 끝인가? 아기를 잘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면 끝인가? 일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원함은 끝이 없고, 좀처럼 만족할 수가 없다. 

사람이 바라는 거의 대부분을 가진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당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참된 만족을 얻기 위해 쉼 없이 갈구하는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을 모릅니다”(참회록, 16p).

또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근본적 문제가 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다. 우리가 바라는 건강, 재물, 성공, 명예, 인기, 친밀한 관계, 결혼, 생명 등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다(약 1:17; 전 5:19). 그런데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서 그분이 주시는 것만 구하는 게 합당한가?

바로 그것을 사탄이 요구한다.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면서까지 우리가 원하는 걸 갈망하게 만든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라고 속였다(눅 4:7).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요구하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라고 장담한다(눅 4:6). 거짓말이다. 하나님 허락 없이 사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고 속이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 터진 웅덩이를 파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당신이 바라는 선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께 구하라.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물을 분리하지 마라. 선물이 생수의 근원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 생수의 근원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을 구하라. 

J. D. 그리어는 <기도 먼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을 보여 주는 유형의 것들을 우리의 삶 속에 가득 채워 주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찾기를 원하신다”(63-4pp).

3.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 안에 우리가 찾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찾는 걸 안 주셔서 문제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하나님이 아닐 때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사실, 믿음으로 든든히 붙잡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증거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이 지금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구하는 그것 주기를 아까워하셔서가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시지 않았는가? 가장 귀한 것을 주신 분께서 그보다 못한 것 주기를 주저하시겠는가?

둘째,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영원한 복을 주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것에 목을 매지만, 하나님은 이 땅을 넘어 영원히 누리를 수 있는 복을 아들을 통해 주신다. 사마리아 여인은 계속 마실 수 있는 물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 영생을 주셨다(요 4장). 한 중풍 병자는 병 고침을 받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의 영원한 질병, 죄를 사하셨다(눅 5장). 하나님은 항상 아들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셨다(눅 11:11-13, “좋은 것으로”, 마 7:11).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우리가 받은 가장 좋은 선물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의, 기업)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한다(양자의 영, 롬 8:15). 현재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만 보지 말라. 성령을 통해 주고 계신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주목하라.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가장 좋은 걸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먼저, 하나님을 신뢰한다. 구한 것을 지금 당장 주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빌 4:7).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당하셨을 때, 그분은 육신의 정욕(떡), 안목의 정욕(천지 만물), 이생의 자랑(명예)에 관한 강력한 유혹을 모두 하나님 약속을 신뢰함으로 이겨내셨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하다’,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씀하셨다(마 4:1-11). 

상황과 사탄이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당신 영혼에게 들려주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다음으론 기쁨과 찬양이 뒤따른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제발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했다(고후 12:7-8). 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그는 크게 기뻐했고, 자기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했다. 왜? 그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고후 12:9-10).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길 바랐다(빌 1:20). 그것이 바울이 원하는 가장 큰 유익이며 행복이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더 좋은 것을 기대하고 바라라.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때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랄 수 있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 그 약함이 오히려 나에게 복이라는 것, 이를 통해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서 가장 존귀한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내가 원하는 걸 내놓으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성숙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내 삶에서 이루시는 가장 좋은 일이다.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 예수님은 가장 연약하고 부끄러운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신뢰하고, 앞에 있는 기쁨, 아버지가 약속하신 더 좋은 것을 위하여 슬픔을 참으셨다(히 12:2).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가 하나님이 아닐 때, 다시금 하나님이 그 자리에 오실 수 있도록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께서 자기의 본을 따를 수 있도록, 예수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