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본문 :  로마서 9장 30절 ~ 10장 13절

설교자 : 이병권

과학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빛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은 과학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빛의 본질에 대해서 논쟁해왔습니다. 빛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두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빛이 입자라는 것입니다. 빛은 그 근원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작은 입자들의 흐름이라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이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소리와 같이 공간을 진동하며 이동하는 파동이라는 견해입니다. 뛰어난 과학자들이 입자냐 파동이냐를 두고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이론을 세우고 논문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논쟁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1905년 독일의 대표적인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논문을 발표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장이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빛의 이중성이라고 하는데 이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았고 과학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우리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고 이해도 잘되지 않는 이론입니다. 이중성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는 모순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에 대해 연구한 하나의 이론이 이러합니다. 그러면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진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미스터리와 같습니다. 모순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시면서 셋이고 그러면서도 한 분일 수 있을까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하나님의 택하심도 그러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셨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설명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진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모순처럼 생각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진리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비롯된 택하심을 통해서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 때문이다. 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이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패도 아니고 불의도 아닙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각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자랑이 아닙니다. 반면에 누군가가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누군가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합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서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 두 가지 진리를 함께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의 진리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병을 치료하는 것에 빗대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을 치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사이고 믿지 않는 유대인은 환자입니다. 그럼 바울이 어떻게 치료하는지 네 가지 과정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복음으로 의사가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치료하는 과정에 동참해보시기 바랍니다.

의사로서 환자에 대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진찰합니다.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금 이스라엘을 진찰한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고 율법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한 의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에 이른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동안에 개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만 부르고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원래 이야기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겨울이 되었을 때 개미는 풍족한 양식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베짱이는 양식이 없어서 힘들게 겨울을 보내며 후회해야 합니다.

의의 법을 따랐던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러야 하고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은 의를 얻지만 의를 따랐던 유대인은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열심히 일을 했던 개미는 너무 일만해서 병으로 고생하고 반대로 베짱이는 갈고닦은 노래 실력으로 가수로 데뷔해서 스타가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뒤바뀐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불의하게 살아온 이방인은 믿음에서 난 의, 복음에 대해서 더욱 마음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서 의로워지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진찰한 결과, 문제가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 가장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되기를 가장 원했던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못했고 의롭게 되기를 가장 덜 원했던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종교적이고 더 도덕적인 사람이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종교적인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니까 괜찮은 사람이라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로 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나는 구원받을 수 있지만 저 나쁜 이방인은 안 된다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예수님이라는 반석은 이스라엘에게 부딪치는 돌이 되었고 걸림돌이 되었고 거치는 바위가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병을 진찰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두신 견고한 반석,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선택은 두 가지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신뢰하여 삶의 기초로 삼고 그 위에서 건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반석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행하다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과는 다르게 율법을 따랐고 의에 이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않고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진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진찰한 결과를 가지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진단을 내려야 합니다. 진찰한 결과를 가지고 병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단합니다.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진단에 앞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위한 그의 소원과 간구는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소원과 간구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스라엘이 가진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 열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열심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열심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 문제가 되고 더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울을 가야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부산으로 가고 있다면 어떨까요?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를 내면 낼수록 서울에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열심은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열심을 가졌던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정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열심으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갈1:14). 이처럼 지식 없는 열정은 무서운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 없는 열정은 광신입니다. 광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을 모르고 율법의 행함에 의지하여 힘을 다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 단락에서도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선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선택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선택함으로 방향을 잘못 잡았고 그래서 자기 의에 대한 열심은 목적지에서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병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고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되는 길을 분명히 계시하셨고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 그 의로움을 모든 믿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절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회복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도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믿는 자에게 유익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는 율법이 약속한 분이시고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지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스라엘이 올바른 지식이 없음을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은 처방입니다.

셋째로, 처방합니다.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바울은 이 단락에서 또다시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대조합니다. 의를 얻는 두 가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으로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율법은 온전히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을 줍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거절합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율법의 목적은 온전히 순종함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해도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그 행위자가 각 사람이기에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그 행위자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 각 사람이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얻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듯이 의를 얻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람이 되셔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를 얻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시 정리하면,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올바른 지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지식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시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울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처방을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방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처방은 분명합니다. 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처방에 따른 적용입니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9절과 10절은 서로 교차되어서 연결되는 이중적인 적용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둘은 서로 같은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곧 마음으로 믿는 것이고 그 결과, 의에 이르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이중적인 적용은 각 사람에 대한 적용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믿음, 복음에 대한 응답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믿음으로 시인할 때 구원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각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치료의 결과입니다.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모든 믿는 사람은 부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한없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차별 없이 받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기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유대인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도 되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누구든지”라고 말씀하는 대상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증거 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다 이해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기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절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계시는 크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