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본문: 누가복음 13장 22~30절
설교자: 조정의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여객선이 한 척이 침몰했습니다. 길이 145미터, 폭 22미터의 거대한 배로 정원 921명에 차량 220대를 실을 수 있고 3,794톤을 적재할 수 있는 거대한 배였기 때문에 이 배가 침몰한다는 소식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그 배에 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한 476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 배의 이름은 세상을 초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세월호입니다.

처음 이 사고 소식을 들었던 건 병권 형제의 집을 짓고 있었을 때입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소식과 동시에 전원 구조되었다는 이야기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배가 여전히 침몰하고 있으며 배 안에 아직도 300명이 넘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는 두 가지 질문이 생겼는데, 하나는 ‘과연 몇 명이나 구조가 된 것일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침몰하는 그 시간 동안(골든타임) 얼마나 구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저와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주여, 구원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각 성 각 마을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는데(22) 만일 그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면 “구원받는 자가 적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아주 분명하게 심판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침몰하는 배처럼 이 세상이 곧 멸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날에 왕을 거절한 이 세상은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돔이 당한 심판보다 더 극심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13-16). 주인을 거절한 종처럼 엄히 때리고 벌에 처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12:46). 하나님의 재판을 받고 옥에 넘겨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58-59).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라 하셨습니다(13:5).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13:7).

예수님은 이런 심판의 메시지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심판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에 겸손히 반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는 곳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분쟁이 있었습니다(12:49-53). 모두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분을 거절하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질문한 이 사람은 과연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멤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가 유대인이었다면 보통 유대인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몇몇 이단이나 범죄자들 외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 포함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으로서 기본적인 자격이 주어진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은 지옥을 태우는 장작들이지만 유대인은 혈통과 전통이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그는 “구원받는 수가 적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사람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무리가 다 듣도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갑자기 비유를 들어 대답을 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수가 적냐는 질문에 그렇다/아니다로 답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수가 적은지 많은지 궁금해 하지 말고 구원받기 위해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 안에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힌트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 중에 갈릴리 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예수님은 구원받는 사람이 몇 명이든지 간에 너는 네가 그 구원받는 무리 안에 들어와 있는지 확실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침몰하고 있는 세상 속에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셨는데 구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얼마나 구조하실 건가요?”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는데 ‘힘쓰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영어의 애거니(agony-극도의 고통)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의 애거니’라고 합니다. 당시 헬라의 작가들은 이 단어를 운동선수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이기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는 전사의 모습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했습니다(스윈돌, 446). 좁은 문에 들어가려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한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고 24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원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좁고 어려운 길입니다.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25-27절까지 우리는 이 좁은 문이 달려 있는 집의 주인을 만납니다. 집주인이 허락해야만 이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5-27절까지 집 주인은 사람들을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 27). “너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주인이 나를 모른다면 말입니다.

둘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든 이유는 문이 열려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면 주인이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밖에서 두드려도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문 밖에서 두드리는 사람은 애가 탑니다. “주여 열어주소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합니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계속 자신을 알립니다. “주여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주여 길에서 우리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닫힌 문 안쪽에서 주인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문 밖에 있는 자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렵습니다. 오직 주인이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들었던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네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길에 대해서 매우 분명한 기준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주인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서로 잘 아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네가 하나님을 아느냐?”였습니다. 혈통이 그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가 구원을 보장합니다. 질문한 유대인은 내가 주님과 함께 따라다니며 먹고 마시고 길에서 가르치는 것을 다 들었으니 이정도면 친분이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친분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 그가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외적으로 얼마나 예수님 주변에서 얼쩡거렸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그는 “행악하는 자”로 주인은 그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쫓아냅니다.

율법의 전통과 유전을 얼마나 지켰는가가 그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겸손한 태도와 순종의 자세가 구원을 보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관련된’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구원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구원의 길은 매우 좁고 어려운 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주일을 열심히 지키는지, 찬송을 열정적으로 부르는지와 관계없습니다. 교회 행사와 봉사에 참여하는 것과도 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종교가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으로 침몰하고 있는 이 세상에 속하여 멸망을 향해 빠져 들어가는 나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건지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지금 향하고 계신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침몰하는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침몰하는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유일하고도 좁은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아는 자, 그분이 아는 자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예수를 아십니까? 이 예수도 당신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계속해서 문을 통과한 사람과 문 밖에 있는 사람이 당할 결과를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유대인 청중이 듣기에는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주인의 집 안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주인의 집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인데(28절) 거기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또 모든 선지자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조상과 선지자가 있는 곳이면 자신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를 모르는 그들은 밖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갑니다. 슬프고 좌절하여 눈물을 흘리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워 이를 갑니다. “왜 미처 몰랐을까? 왜 예수를 거절했을까? 왜 건성으로 들었을까?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니…” 후회와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들이 처지가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화가 나면 이를 갈겠습니까?

반면 유대인들이 지옥을 활활 태울 장작처럼 여겼던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동서남북에서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29). 오랜 세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모세, 모든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든 축복과 특권을 누렸던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먼저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 비하면 뒤쳐진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들도 만일 그들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켜 주를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단단히 잘못 알고 있던 오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마디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0).

구원을 받는 것은 혈통과 관계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라고, 친척이 장로라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활동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찬양대원이든 부서회원이든 상관없습니다. 구원은 그 어떤 노력을 힘써 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오직 주인을 알고 주인이 아는 사람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9)고 하셨습니다. 또 그분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15).

여러분 스스로를 돌이켜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도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라고 말만 해줬어도 대부분 살아있을 것이라 말하면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흘러나온 것이 우리를 더 화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히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지금 그대로 살다가는 영원히 슬퍼하며 이를 가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돌이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일마다 교회 참석하고 있으니까, 교회 사람들과 화목하게 잘 어울리고 있으니까, 주일 설교시간 빠짐없이 듣고 있으니까…’라고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돌이켜 예수님을 따라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려는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침몰하는 세상과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골든타임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여러분이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한 번 구원의 문이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J. C. 라일은 ‘지옥은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곳 외에 아무 곳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일은 늦습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구원을 받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걷고 계신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는 침몰하는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을 우리를 통해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세상 끝까지 가서 제자를 삼고 침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혼을 건지는 구조대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골든타임을 허투로 보낸 이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그 시간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며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맡은 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원한 파멸로 침몰 중인 세상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조대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루 종일 전도지만 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일은 하지 말고 전도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좁은 문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사랑하는 가족, 자녀, 친척, 동료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물질, 노력을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은 골든타임을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게 품고 있는 애타는 마음을 나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