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결코 쇠하지 않는 나라
본문: 누가복음 13장 18~21절
설교자: 최종혁

오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어서 바로잡아 주기 위함입니다.

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A. 우리의 오해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 천국(낙원)’은 정말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이나 정말 재밌고 즐거운 곳, 행복한 곳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장소에 가거나 어떤 좋은 일을 만날 때 ‘천국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기독교가 말하는 ‘저승’, ‘내세’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간단히 말하면 죽고 나서 가는 좋은 곳입니다. 실제로 구원 받은 사람들도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괴롭고 힘든 이 세상이지만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아주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또한 천국이 실제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개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만 봐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교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가서 살게 되는 그런 개념에서의 하나님 나라라면 이해할 수 없는 비교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것이 너희가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그런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니 회개하여 그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우주적 왕국이라고 합니다. 조금 좁은 의미에서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로서, 하나님이 중보자 혹은 중재자를 통해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를 중보적 왕국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이 중보적 왕국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심으로서 이런 중보적 왕국의 개념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입니다. 특히 다윗의 때에 인간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가 절정을 향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을 거치면서 나라는 분열되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계속해서 선포하십니다. 메시아의 왕국은 강력하고 영원한 나라로서 예언됩니다. 구약 성경은 곳곳에서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2:6-9)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사 9:6-7)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래서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런 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잘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B. 유대인들의 오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나라보다 강력하고 거대한, 그리고 영원한 그런 나라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를 깨뜨려 부수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자신들은 그 나라의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했던 이들에게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능력들을 보면 예수님은 충분히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추구하는 바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을 때도 그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신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9:20~22).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칼과 창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계속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세력을 모아서 로마에 대항해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그들을 무릎 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뭔가 좀 이상한 것입니다. 이제 시작되는 것인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나? 아마 지난주에 배운 누가복음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앞서 누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지금 그 상황이 딱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권위를 보이시고 능력을 나타내셨을 때,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기뻐했습니다. 이 상황을 본 12제자를 비롯해서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따르던 자들의 마음에도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뻐하고 환영하니, 곧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구나.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을까? 시작된다 해도 정말 구약에 약속된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일까?’ 이런 오해와 혼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Ⅱ. 예수님께서 오해를 바로 잡으심

“그러므로”(18절)

오늘의 비유는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어지는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앞의 사건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서 펴지 못하던 여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회당장을 비롯한 일부는 분노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안식일이라도 사람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지를 말씀하시자,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고 통쾌한 말씀이지만, 복음서를 읽다 보면 늘 접하게 되는 비슷한 사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뭐, 예수님께서 또 한 사람 고치시고, 종교 지도자 혼내셨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상황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고 영향력이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A. 겨자씨 비유 –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할 것이다(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예수님은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며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치셨는데, 특별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셔서 듣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감추시고 믿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비유는 무언가를 ‘옆에 던져 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옆에 던져 놓아서 듣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과의 비교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 전화를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둘기 같은 것으로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의 공통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사용하신 비유는 좀 더 스토리가 있고 긴 경우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런 비유와 유사합니다. 대개 하나의 핵심 유사점이 있고, 그것이 비유를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의할 것은 비유에 나오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19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더해서, 이 겨자씨는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심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뒤에 가서 반전이 있는데, 이 말씀은 처음부터 듣는 사람들에게 의아한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천국이 겨자씨 한 알과 같다니… 겨자씨는 당시에 매우 작은 것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눈꼽”, “도토리”와 같은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것, 큰 것이 아닌가요?

‘겨자’는 주로 자기 채소밭에 심지 않습니다. 작은 씨이지만 급성장해서 큰 나무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종류에 따라서 어떤 겨자는 1-3미터, 큰 것은 5미터 이상까지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채소밭에 심을 경우 다른 식물이 자라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재배하지는 않기를 권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렇게 비유하셨을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작다는 말일까? 천국이 그렇게 다른 것들을 파괴한다는 말일까?

예수님은 비유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십니다.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비유의 핵심은 그 작은 것이 ‘자라 나무가 된다’는데 있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새는 때로 이방인들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단 4:12, 21; 겔 17:23; 31:6).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따라 이방인들이 많은 유익을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부분을 강조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 나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나무는 새들이 둥지를 틀 정도로 크고 무성하고 단단한 나무로 성장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마치 겨자 씨 한 알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결국은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B. 누룩 비유 – 하나님의 나라는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20~21절)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20절)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지금 하시는 말씀이 비유임을 강조하십니다. 비유는 비유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1절) 19절에서는 ‘사람’ 혹은 ‘남자’가 등장한 비유를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짝을 지어서 언급하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이라니! 이번에도 처음부터 충격적 입니다. 누룩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좋은 의미로는 잘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12장의 시작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누룩을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누룩과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천국은 누룩과 같을까요?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누룩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은 서 말의 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입니다. 서 말은 지금으로 말하면 20kg정도 됩니다. 이것으로 빵을 만들면 1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많은 양입니다. 아마 어떤 가정주부도 한 번에 이 정도의 밀가루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은 그만큼 가루의 양이 많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누룩은 어떨까요? 누룩도 20kg이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룩은 훨씬 적은 양을 넣습니다. 훨씬 적은 양을 넣지만 20kg의 밀가루를 전부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것이 누룩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겨자씨는 겨자씨 자체가 크게 성장했고, 누룩은 그 자체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으로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크게 부풀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에 큰 영향력일 끼쳤다는 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이 작은 것이 큰 것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와 같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으로 나무가 성장한 것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전부”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 영향력이 지대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이 누룩을 말할 때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입니다. 적은 양으로 큰 변화를 만드는,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누룩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누룩처럼 적은 수로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입니다. 나쁜 의미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의미로 그런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칠 것입니다.

C. 의미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 시점에서 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1. 먼저 그들이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잘못되었음을 그들은 알아야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지금 당장에 크고 영광스럽게 시작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원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로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메시아는 고난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거절을 경험하고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중에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나라의 왕을 받아들인 자들을 통해서 작게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그들 눈에 하찮고 약해 보이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던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정말 작고 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신 것이 확실했지만, 이 땅을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분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인재들이 모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겨우 갈릴리 어부들이 핵심 인물들입니다. 누구 하나 눈에 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모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계속해서 부딪치기만 합니다. 뭔가 잘못 된 것이 아닐까요? 작게 시작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왠지 작게 그냥 끝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성장할거고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할 힘이 있고,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이루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면 됐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계속해서 성장했는지는 사도행전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되는 방해와 핍박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중간에 다투고 따로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의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위기를 맞았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멀리 퍼져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는 결코 작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장했고 세상을 바꿨습니다. 지금도 성장하고 있고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Ⅲ.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럼, 주님께서 하신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지 모든 개 교회나 개인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이 모든 교회가 그렇게 부흥하고 모든 사역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역사를 봐도 문을 닫은 교회도 많고 신실하게 일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선교사들도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너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1. 소망을 가지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의 일에 열매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충성스럽게 그리고 정직하게 일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결과를 보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결과를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를 보면서 굳이 힘을 얻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않는 결과를 보더라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나라는 결코 쇠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결코 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2. 감사하라.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서 중대한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더 없이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 이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만 보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말처럼 그렇게 성장할 힘이 있고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셨을 때 그들은 정말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한 중에 부르셔서 이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자랑하는 대신에 감사하십시오.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3. 영접하라.

예수님은 거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결코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종, 성별, 나이, 국가 등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있는 것은 내가 겸손히 그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영접하느냐 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이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한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면, 그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편에 서야 한다면, 그 나라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한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면, 그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쇠하고, 오직 그 나라만이 영원히 설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도전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죽음으로 예수님의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광 중에 들어가시고 후에 영광의 왕으로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결코 쇠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온전히 완성될 그 나라입니다.

당신은 그 나라의 백성이십니까? 당신은 소망 중에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감사하며 충성하는 가운데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