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를 위해 환난 겪는 일꾼

본문 :  사도행전 14장

설교자 : 조정의

“환난.”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삶이 편할 거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사도행전의 핵심 인물인 베드로와 바울 역시 주님 말씀을 증명한다. 그들이 고난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베드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2-13). 

바울: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행 14:22).

박해를 받는 이유는 우리의 인품이나 악행 때문이 아니다(벧전 3:13).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과 삶 때문에 받는 것이다. 박해를 받을 때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왜? 박해 자체가 즐거워서가 아니다(사디스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보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4:13-14; 마 5:10-12). 본문에서 주의 일을 위해 세운 일꾼이 주를 위해 환난 받는 장면을 살펴보자. 그래서 환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지 배우기 원한다.

1. 이고니온: 예수님은 사람을 나누신다(1-7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그들이 선동한 유력한 이방인들에 의해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약 144km 떨어진 도시 이고니온으로 이동했다(1절). 이고니온은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선교 전략에 따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고, 그 결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1절).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절).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분, 그 일로 은혜의 말씀을 담대하게 능력있게 전하게 하신 분, 모두 주님이시다. 주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행 18:10). 주께 속한 자는 믿음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2절), 예수 믿기를 거절하는 이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 무리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2절). 비방, 모욕, 위협, 협박 등을 일으켰다. 두 사도는 거기 오래 있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는데, 더욱 극명해진 결과는 청중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4절).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이 하는 일이다.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배척하는 자는 예수를 시기하고 핍박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믿고 전하는 예수님은 사람을 둘로 나누신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고 예언한 것처럼 그분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신다(눅 2:34). 어둠에 속하여 빛을 미워하거나, 빛에 속하여 빛을 즐거워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종교를 택할 수 있고, 기독교도 수많은 종교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는 배타적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영원한 심판을 말하고(요 3:18),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멸망을 약속한다(계 19-20장).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들에게 이는 불편하고 무례하고 화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를 전하면 환난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가 주를 위해 환난을 아주 드물게 겪는 이유는,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파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말로 전하여 보라. 두 가지 극명하게 나뉘는 반응을 겪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당신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그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박해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맡은 자로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도에 대한 환난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오히려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3절). 환난이 점점 커져서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을 때(5절, 신성모독), 사도들은 미리 그 계획을 간파하고 루스드라와 더베 근방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7절). 환난은 복음 전파를 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환난을 겪더라도 복음 전파는 계속되어야 한다.

2. 루스드라: 예수님은 환난을 가져온다(8-19절)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29km 떨어진 외지이다.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하다(행 16:2).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해 이 시골에 이고니온에서처럼 놀라운 기적과 말씀을 주셨다.

마치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다 앉은뱅이를 예수님 이름으로 일으킨 것처럼(행 3장), 이번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를(9절) 일으켰다. 그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9절). 예수님은 그에게 참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쳤을 때, 자기 발로 일어선 적이 없던 이가 일어나 걸었다(10절, 뛰어오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말씀에 수혜자가 된다. 은혜를 입는다.

반면, 믿음 없는 자는 엉뚱하게 반응했다(11-13절).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 인간의 몸으로 우리를 방문한 것이라고 여기고 그들에게 경배를 드리려고 한 것이다. 당시 그리스 신화 중에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땅에 왔는데 노부부 외에 아무도 그들을 반기지 않아, 결국 노부부를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심판받은 지역이 루스드라 근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우스(위엄, 권위)와 헤르메스(신의 대변인)라고 생각하고, 신에 합당한 예물을 바치고 경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황소를 끌고 오고 두 사람에게 씌울 화환을 가져오고 성문에서 신전까지 퍼레이드를 벌이려고 했다.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를 알았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엉뚱하고 잘못된 반응에 너무 기가 차고 불경한 마음이 들어 두 사람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 크게 소리쳤다(14절).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엉뚱한 반응을 보인 이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방금 일어난 일의 올바른 해석, 곧 기적을 일으키시고 표적이 가리키는 분인 예수님을 전했다(15-17절). 1) 자신들이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다(15절,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2) 세상의 유일하고 참된 신은 하나님이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에게 전한 내용과 사뭇 다르다. 이번엔 구약성경과 신약 역사가 확증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 전에 먼저 다신론자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복음의 내용: 그들이 믿는 신들은 가짜 신, 헛된 우상이었다. 참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뿐이다. 그분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고(16절), 그분이 바로 그동안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베푸신 분이시다(17절). 그들이 몰랐을 때는 하나님께서 방임하시고 오래 참으셨지만, 이제 복음을 들었으니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15절). *기독교 변증이 필요한 영역이다. 성경에 관심이 없고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먼저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

표적과 기사의 주인공이 누군지 이제 제대로 알았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를 숭배하려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와 숭배하려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180도 변하여 방금전까지 신처럼 모시던 바울을 돌로 쳤다. 죽음 문턱까지 이르도록(19절).

어떻게 이런 반전을 보일 수 있을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호산나” 외치고 찬양했던 이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이끌려 며칠 만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없애버리라고 외쳤는가?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그를 미워한다. 예수님을 헛되게 경배하는 이들 또한 그들의 필요를 예수님이 채워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분을 버린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은 은혜의 복음 수혜자가 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 전하는 이를 박해한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바울이 되었을 때, 바울은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히 여긴 그가(행 8:1) 다른 의미로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 이것이 환난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다. 예수님을 증언하면 우리는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로부터 환난을 겪게 된다. 가까운 가족의 배척이나 비방, 이웃이나 직장 동료의 조롱을 받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오히려 기뻐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 우리가 받는 환난은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이 거듭나는 결실을 얻는다.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얻는다. 환난은 새로운 제자를 낳는 해산의 고통이다(갈 4:19).

3. 더베-안디옥: 예수님은 믿음을 굳히신다(20-28절)

돌에 맞은 바울은 성 밖에 버려졌다. 온몸에 멍이 들고 피를 흘렸을 것이다. 나중에 제자들이 시신을 찾아 둘러섰을 때, 놀랍게도 숨이 붙어있던 바울이 일어났다(20절). 그리고 더욱더 놀랍게도, 다시 루스드라 성에 들어간다(고후 11:25; 갈 6:17).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 남동쪽에 위치한 더베로 95km 길을 돌아 도착했고, 그들은 거기서 복음을 전해 많은 제자를 얻었다(21절). 어느 시점 그들은 다시 시리아 안디옥(파송 교회)에 돌아갈 계획을 세우는데,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통과하는 내륙 통로로 가지 않고,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바닷길로 돌아온다. 이유는 각 성에 세운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해서다.

더베를 시작으로 루스드라(돌 맞은 곳), 이고니온(거의 돌에 맞을 뻔한 곳), 비시디아 안디옥(환난이 시작된 곳)을 들리면서 두 사도는 세 가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일을 했다. 1)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함(22절). 2) 장로들을 택함(23절). 3) 주께 그들을 위탁함(23절). 

두 사도는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굳히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다. 그리고 금식기도를 통해 주님이 세우신 일꾼을 (자신들이 세워진 방식대로) 교회에 세워 그들 믿음을 지키는 일을 하게 했다(위탁). 두 사도는 각 성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말하면서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면했다.

환난은 믿음의 성도를 낳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이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터튤리안, 3세기 교부). 그런데 그 환난 중에도 우리 믿음을 변치 않게 지켜주시고 굳게 하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환난 중에도)을 알았다. 후에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보고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했다(26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셨다.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셨다(결실).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때 많은 대적의 비방을 받게 되었는 때,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

환난은 당연히 주어진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환난 중에도 항상함께 하신다. 침묵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믿음의 문을 여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 사도들은 그들이 주께 받은 위로와 격려를 새로 태어난 교회에도 전달했다. 우리도 그 위로와 격려 그리고 도전을 받기 원한다. 주님이 우리 믿음을 환난 중에도 굳게 하신다. 주님이 우릴 통해 구원하신다.

당신은 무얼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결혼하는가? 무엇을 위해 자식을 낳고 기르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열매 맺는 방식으로 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