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님 안에 충만한 기쁨

본문 : 시편 16편

설교자 : 최종혁

[다윗의 믹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빌립보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무엇이 기쁨의 삶인지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성도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9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절)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어떻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지 나누길 원합니다.

다윗의 상황과 간구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다윗이 처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4)라는 표현으로 보아 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도 있고, 9-10절에서 육체적인 안전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육체적으로 병이 들거나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매우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과 안전 속에서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3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는데, ‘하나님’과 ‘여호와’, 그리고 ‘나의 주님’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표현인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의 이름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그러한 민족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생각하면 뭔가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듭니다. 주인이 일을 시키고 종은 원치 않아도 그것을 해야 하는 관계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할 것은, 종은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주인에 따라 종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부하면 종도 부하고, 주인이 망하면 종도 망하며, 주인이 괴팍하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주인이 은혜롭다면 종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이 복을 주면 복을 받고, 주인이 해를 주면 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한 관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과 복

이제 다윗은 자신이 받았던 복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는 성도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절).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한 복이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도들에 대해 표현할 때 사용한 “성도들”(거룩한 자들)은, 단수일 때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고, 복수일 때는 천사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즉 인간들을 말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언약의 자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시 8:1).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위엄, 영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지금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자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그들 안에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의 기쁨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그들과 전혀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4). 다윗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한 두 번째 복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5-6절). 여기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산업’, ‘소득’, ‘분깃’, ‘기업’ 등의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여호수아 15-19장에서 땅을 분배할 때 사용한 단어들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줄로 재워 준 구역”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시 78:55).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그들의 경계를 정하시고 그들이 누릴 유업을 필요에 따라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나의 기업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즐거움”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즐거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무나 산이 아름답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원래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모습, 무언가의 최고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업이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이 완벽해서 더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두 번째 복입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계하시고 권고하십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시 119:105). 구약에서 ‘밤’이라는 시간은 뭔가 생각하고 묵상하며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그는 밤마다 “양심이 나를 교훈”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율법이자 안전장치, 경고등과 같은 것입니다(롬 2:14-15). 하나님은 말씀과 양심을 통해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절). 다윗은 그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또 그분이 나의 오른쪽에 있다고 말합니다. ‘앞에 계신 것’은 다윗을 인도하시는 것이고 ‘오른쪽에 계신 것’은 그의 힘과 능력, 보호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복에 대해 말합니다. 성도들과 하나님의 공급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정말 주목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존귀한 성도들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농사를 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비, 바람, 해를 주관하는 신들을 섬겼습니다. 한 하나님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얻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다윗 이전에도 이후에도 역사가 이것을 증명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하나님을 떠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으며 그들이 돌이켰을때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 이후에 솔로몬과 분열왕국의 수많은 왕들이 통치하던 때에도, 포로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는 역사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결국에는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한 귀하고 거룩한 자,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거룩한 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5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이 기업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산업이고 소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지 않으시고 ‘내가(하나님이) 너희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레위인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기업이 하나님이었습니다(‘야곱의 분깃’).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기업과 땅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나의 “잔”이라고 말합니다. 잔은 사람의 운명을 말할 때 사용하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예수님,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 운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삶의 풍성함을 채우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을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의 제비를 지키신다는 표현입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앞일을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 것은 기업과 재물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항상 자신의 앞에 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 내 앞에 있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 다윗은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배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8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2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사실 이것이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또한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전했던 긴 설교의 핵심도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복이 있고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잇습니다. 다윗의 상황과 다윗의 고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나의 복이라고 하고 그 복을 세며 그 복을 주신 하나님께 생각을 모읍니다. 그 결과는 9절입니다.

다윗의 기쁨과 확신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9절).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기쁨과 복은 모두 이 땅에서 누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성도들과 이 땅의 기업, 모두 이 땅에서 누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는 어떨까요?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10절).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둬서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 속에 들어간 모든 사람이 썩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시 49:7-9, 시 89:48). 그런데 왜 다윗은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 답은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편에 대해 언급하면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29-32)고 말합니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 13:35-37). 그렇습니다. 다윗이 궁극적으로 바라본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해주신 그 메시아, 다윗의 자손으로 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루실 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고 육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 15:20-2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한 소망과 확신 가운데 말한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절). 이것이 다윗이 삶에 대해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에 충만한 기쁨, 완전한 만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그는 살고 죽는 것에 관계없이 주와 함께 할 때 자신이 복 받은 자임을 알았습니다(2절).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유익한 것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있었기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 기쁨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기쁨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이 땅에서 꾹 참고 사는 것일까요? 기쁨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주는 결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삶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이라고 하면서 그 안에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십니까? 그분은 선한 분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로 피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기쁨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고 언제나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시 118:1-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