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

본문 : 누가복음 6장 12~19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열 두 사도)를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동안 누가가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갈릴리 회당을 다니면서 설교하실때는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4:15). 그분이 가르치실때마다 그 권위에 무리는 놀랐습니다(4:32). 그분이 병을 고치실 때 그 권세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4:37).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지르며 쫓겨났습니다(4:41). 주께서 죄 사함의 권세 있음을 중풍병을 고치심으로 입증하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고 놀랐습니다(5:26). 그들은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예수님의 놀라움을 경험하기 원했습니다.
항상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권세가 선포될때마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였”습니다(5:15). 찰스 스윈돌은 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수천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아주 간단하게 “많은 무리”와 “많은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눅 6:17). 한 마디로 “거대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 두명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부르셨을까요?(HOW)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셨을까요?(WHO)
예수님은 왜 그들을 부르셨을까요?(WHY)
오늘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뜻을 함께 재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부르셨나?(HOW)
정확하게 언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이때에”라고 말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하시던 중 어느 시점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언제인지 보다는 어떻게 부르셨는지가 누가의 관심사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수천명의 제자들 가운데 어떻게 몇 명을 불러내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명단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프로필을 조사할 것입니다. 학력은 어떻게 되는지, 가정 환경은 어떤지, 재정적인 배경은 어떠한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가문, 지파에 대한 조사를 할 것입니다.
인터뷰에 필요한 질문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나를 따를 수 있나요?” “당신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나요?” 이러한 질문들로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지 그 열정과 충성도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블랙리스트 같은 것을 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 만큼은 제자로 부르지 말자’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들의 목록같은 것을 말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 항상 부정적인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는 사람, 혹은 아무리 가르쳐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열을 가르쳐줘도 하나를 모르는 사람), 테러리스트, 매국노, 돈을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 돈때문에 나를 팔아 넘길 것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은 뽑지 않는게 좋습니다. 정말 생각해야 할 것이 수만가지 입니다. 수천명 중에 누구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부르셨을까요?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산으로 가셨는가? 먼저는 그 수많은 무리들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장소가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한적한 곳에서 종종 기도하셨습니다(5:16).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일대일로 교제하기 원하셨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기 원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간절히 구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서 아버지의 뜻을 간절히 구하셨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최초에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이 여호와의 산 호렙이었다는 점입니다(출 3),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백성 열두지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주신 곳도 시내산 이었습니다(출 19).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새로운 백성에게 새로운 계명을 내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땀방울을 핏방울처럼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앞서 예수님은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12절). 하루 밤을 완전히 새도록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오해합니다. 예수님에겐 모든 것이 쉬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큰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아주 쉽게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시는 말씀도 하시는 사역도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다고 말합니다(요 5:19-“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8:28-“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38).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의뢰하셨습니다. 의지하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무리 바쁜 사역 중에도 산에 가셔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한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를 앞에 두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기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시편 139편을 지은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우리는 이 중대한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지요. 예수님은 이 중대한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앞서 밤이 새도록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누구를 부르셨나?(WHO)
밤새 아버지의 뜻을 구하신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선출한 열 두 사람들의 이름이 14절부터 언급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산에 올라온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명씩 간단하게 소개해드리기 앞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공관복음의 다른 복음서들 즉 마태복음(10:1-4)과 마가복음(3:13-19)에서 우리는 똑같은 열 두 제자의 목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 원합니다. 순서의 차이가 조금 있지만 똑같은 열 두 명의 이름이 세 복음서에 적혀있고 사도행전 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누구를 부르셨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처음 만나셨을 때, “장차 게바라 할 것이라” 하셨고 그 이름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였습니다(요 1:42).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참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그는 예수님과 대화 중에 항상 먼저 대답하기로 작정한 듯 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복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가, 바로 금방 주님의 죽으심을 극구 반대하여 “사탄아”라는 책망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A+를 받았다가 잠시 후에 F를 받은 셈입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다가 의심해서 빠져들어가기도 했고,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떠나도 나는 절대 아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가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던 베드로의 형제(“동생”이라고 나옵니다) 안드레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도 베드로처럼 어부였습니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안드레는 예수님께 질문을 하나 하는데,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랑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 역시 형제입니다. 바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베대의 아들들로 베드로의 동업자였습니다(눅 5:10). 어부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한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눅 5:11). 이중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후에 핵심적인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변화산 사건과 몇 가지 기적은 특별히 이들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8:51; 9:28-29).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막 3:17). 성격이 불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반기지 않은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려 태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눅 9:52-56). 후에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 나라에서 특별한 자리를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막 10:35-37).

빌립과 바돌로매는 형제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메시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라고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에 따라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이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은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바로 이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입니다.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었습니다(요 1:44). 빌립은 예수님의 권능을 바로 눈 앞에서 계속해서 봤지만 후에 “아버지를 보여달라 그러면 족하겠다”고 요청했었습니다(요 14:8). 예수님은 나와 이렇게 오래있고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 다음은 마태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의 또 다른 이름이 레위이며 사람들의 비난을 받던 매국노에 배신자, 세리였던 그를 주께서 부르셨던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바로 예수님을 따랐고 친구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소개했었습니다(눅 5:27-29).

그 다음엔 도마(디두모=쌍둥이)입니다. 여러분 아마 도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도마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의심’입니다. 내 손가락을 그의 못자국에 넣어보고 창에 찔린 그곳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치고는 예수님이 잡히시자 도망하였습니다(요 11:16).

그 다음 등장하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 앞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막 15:40).

또 다른 인물은 셀롯이라고 부르는 시몬이었습니다. 셀롯은 ‘열심당’인데 한 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독립운동가 테러리스트였습니다. 마카비안 왕조(하스몬 왕조)가 성취한 것처럼 민족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면 테러도 자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열심(열혈)당원’이었습니다. 셀롯 시몬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과거의 생각을 정리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를 “가나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마지막 두 인물이 남았습니다. 먼저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라고 소개됩니다. 다대오는 우리가 조금 전에 살짝 언급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형제였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인물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누가는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고 소개합니다(16절). 가룟은 유다의 지역이름이며 유다는 바로 가이룟이라 불리는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돈 궤를 맡은 사람으로 일하면서 돈을 사랑하는 탐욕을 여기 저기서 보여줍니다. 결국 예수님을 노예 한 사람의 값인 은 삼십에 팔아 넘기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지금까지 열두 제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뽑힐 만하다고 보십니까. 먼저, 이들 중 아무도 종교지도자들은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대제사장 출신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과 랍비의 전통에 대해 밝히 알았던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부와 세리라고 하여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것만 봐도 우리는 그가 읽고 쓸 줄 알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문화와 학문을 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이 이들을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행 4:13).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열두 명의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어찌하여 알지 못하느냐?” 또한 그들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그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을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막 9:19)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종종 누가 크냐고 싸움을 하였습니다. 누구도 스승의 발을 씻기지 않을 뿐더러 자기들끼리도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서로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날엔 모두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이 열 둘을 부를 수 있습니까? 미련하고 이해가 부족하고 종종 싸우고 부족한 사람들을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수천 명의 제자들 중 이들보다 더 괜찮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더 성격이 온순한 사람, 출신이 더 괜찮은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배운 것이 많고 믿음이 큰 사람은 없었습니까? 믿음이 크다고 칭찬 받았던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재산이 있던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왜 이 열 둘입니까?
한 주석가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게 될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로 선택하셨음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의 유효성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기질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서울 정도로 부패시키는 죄악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들의 무가치성을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그들을 통해 무엇을 하시는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예수님은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열둘 가운데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열한 명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요한서신서와 계시록, 요한복음을 기록한 세베대의 아들 요한만 여러 가지 핍박을 받으면서도 노년까지 주를 위해 헌신하였고, 전승에 따르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10년이 채 되지 않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 12). 빌립은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작은 야고보(알패오의 아들)는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고 톱으로 베임을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유다와 시몬도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죽으면서 “나는 이 행복한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왔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나다니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채찍에 맞아 죽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살갗을 다 뜯겨내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미련하고 믿음이 연약하며 이해가 더딘 자들을 부르셨지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주를 위해 이토록 헌신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은혜로 부르셨고 은혜의 절정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먼저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왜 부르셨는가?(WHY)
마지막으로 왜 부르셨는가입니다. 본문에서 사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열둘을 뭐라고 칭하셨는지 보십시오. 13절에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대리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대리자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실 것이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계획이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일”을 대신 할 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열두 사도를 세우시면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라고 말합니다(막 3:14-15).
17-19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평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유대와 예루살렘(이스라엘 지역), 그리고 두로와 시돈의 해안(이방인 지역)에서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부르심을 받은 열두 명의 사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의 대리자가 될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누가는 그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권능을 열두 사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곧 그들이 이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권능으로 진리를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물론 바로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특별교육이 필요했습니다. 다음시간에 우리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특별 레슨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20절).

오늘 저희는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사도를 택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지극히 평범하고 연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은혜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의 사명을 대신 이루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을 담당시키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동일한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믿음이 적고 이해가 느린 우리, 성격이 불 같고 급하며 부정적이고 의심이 많고, 크고자 하는 마음과 어려울 때 주님을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를 그 풍성한 은혜로 불러주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26).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미련하고 약한 우리를 택하사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우리로 자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약한 우리를 은혜로 택하신 주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동일합니다. 반석이라 불린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너희를 빛으로 인도하신 이의 아름다운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디도서 2장 1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으로 삼기 위해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주의 대리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르심을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이 바로 기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이 부르심은 어떤 명문 축구 구단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 수준이 아닙니다. 전세계에서 아름다운 사람 혹은 영향력 있는 사람의 순위에 들어가는 정도의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에게 특별히 택함을 받는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이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거절하는 인생은 정말 비참합니다. 오늘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을 받은 제자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좋아하며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종교적인 생활로 삶을 윤택하게 유지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도들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부족했지만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놓더라도 사명만은 지켜냈습니다.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기도로 풍성한 은혜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대리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선포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사명에 충성함으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힘차게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