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말씀을 듣는 방법
본문: 야고보서 1장 19절-21절
설교: 조 정 의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에 대해 들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듣는 것,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말씀을 듣는데서 더 나아가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2절에 분명한 명령이 나오는데 바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순종하는 사람,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들었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당연히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것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순종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1:2).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주인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피조물로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지체를 드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세이고, 믿는 자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힘입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2절에서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주의 깊게 듣지 않은 것일까요?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매우 경청하여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 듣는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용납하라”는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한 잘못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0:25에서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잘 알고 지키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몸이 피곤하고 지칠 때는 교회에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 아이처럼 사모하라”는 말씀도 실제 삶에서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다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 필요는 없다고, 그저 실천만 더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23-25절에서는 두 사람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둘은 모두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당시 거울은 오늘날과 달라서 열심히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재질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게 살펴봐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아가서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자신을 잘 살펴보았지만 그리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그는 가고 나서 오랫동안 떠나있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에게 어떤 부분이 필요했고 어떤 점을 노력해야 하는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볍게 들었기 때문에, 때로는 듣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기쁨으로 듣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염려나 근심이 생길 때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속에 세속적인 것들이 차 있다면 말씀이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강조하신 것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와 민수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늘 기억하라고 말씀하셨고 자녀를 키울 때도 그것을 잊지 않도록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와 달리,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는 자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거울을 보고 그 앞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도록 들여다봄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볼 수 있었고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떠나 오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말씀을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력과 싸우는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는 것이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싸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합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세상의 많은 가치관과 가르침은 불합리함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만이 우리를 훈련할 수 있는 온전한 도구인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힘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이 시련을 이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율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주신 법입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문화, 풍습, 절기 등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서 그의 백성들이 온전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우리로 마음대로 살게 두지 않으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다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떠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25절에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을 받으리라”는 사업이 잘 되고 건강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더해지는 거룩함, 환경과 상관없는 온전한 믿음, 온전한 은사와 선물을 누리는 것, 그리고 마지막 날에 받게 될 생명의 면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유대인들은 여러 의식과 절기를 지키면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의 경건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은 마음에 악함이 없고 외부적으로 더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법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 즉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주요 율법을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짜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뛸 듯 기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삶인가 의문을 갖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정도의 기쁨일까요?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기쁨에 차지 않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떡을 떼고 기도하며 말씀을 대했습니다. 그들은 사자밥이 되고 화형을 당해도 주님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계속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바쁘고 여유가 없어도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할 것인가, 그리하여 믿는 자의 특권과 기쁨을 누릴 것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것인가. 그렇지 않고 다 안다고 자신을 속이면서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사이의 선택이고 싸움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