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에 이르는 지식 PART I

본문 : 베드로전서 1:18-21
설교자 : 조정의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동안 베드로전서 1장 1-17절의 말씀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제 18-21절에서는 믿는 자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너희가 알거니와”) 그 앎의 내용,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말씀과 연결되어서, 구원(성화)을 이루는데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룩함에 이르는 지식입니다.

최근 교회에서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마음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믿음의 삶’이 어떠한지를 배우고 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실망스러운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의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이던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뚜렷한 두 가지 구원론이 있었는데,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입니다. 당시 구원받은 유대인들 중에 여전히 율법주의가 묻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이뤄가는 중에 율법에 매여 하나님의 은혜를 뒤로 하고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복음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있으면 내 삶이 엉망이어도(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천주교입니다. 또한 영지주의의 오늘날의 모습은 뉴에이지나 몰몬교 등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있으십니까? 거룩함을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까? 또는 구원을 받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본문 18-19절에서는 ‘대속의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고 20-21절에서는 ‘대속의 주체’를, 21절 후반부에서는 ‘대속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화에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성화를 이루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속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화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절). 먼저 “대속”이란 무엇일까요? ‘대신 속죄하다’, ‘몸값을 받고 풀어주다’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언가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는데 그러기 위해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빚진 것이나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돈, 물품, 노력 따위로 대신 갚음’이라는 뜻입니다. 전에 빚지거나 잘못을 해서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상태였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실 때 ‘속량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고(신 7:8; 9:26; 15:15; 24:18),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셨다’, ‘대속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사 41:14; 43:1, 14; 44:22-24; 51:11; 52:3; 62:12; 63:9).

본문 18절에서도 ‘대속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에 속박된 상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더 분명하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18절).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입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의 조상은 특정 인물들이 아닙니다. 인류 보편적으로 앞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헛된 행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인류는 죄의 속박을 받고 있습니다. 인류는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노예 상태, 죄의 속박 아래 있던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인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 편지가 이방인들에게 쓰인 편지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 역시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행 7:51).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9-18).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류는 죄의 속박 아래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는 죄의 노예라는 신분과 사망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롬 5:12, 고전 15:21).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고백은 모든 인류의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노예이고 평생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행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은 어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산다해도 헛된 삶입니다. ‘헛되다’는 것은 ‘아무런 쓸데 없는, 공허한, 텅 빈, 거짓된’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존경받고 근사한 삶을 살아도 영원의 시각으로 볼 때 인생은 공허하고 텅 비었으며 쓸데없고 헛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매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7-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우리가 이러한 노예 상태에서 대속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18절). 당시 그리스 로마에서는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 금액을 신전에 바쳤습니다. 그러면 신전에서는 그 돈을 노예의 주인에게 주고 노예는 자유를 얻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이제는 인간 주인의 노예는 아니지만 신의 노예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아무튼 노예가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금과 은 같은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도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 염소 등의 짐승들과 금, 은 등이 속전물로 사용되었습니다(출 30:11-16). 그러나 이러한 대속물은 온전한 대속물이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죄를 지면 다시 제물을 바쳐야 하는 체계였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쳤던 것들은 진짜 대속물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인간의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참 대속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금, 은, 양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죄가 온전히 대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여기에 율법주의자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대속이 그런 것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행, 공로, 노력, 헌금, 공헌으로 대속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제한적인 것으로 죄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불가능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행위로 선해지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곧 낙심하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의심만 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속받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19절). 율법과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1,2). 이것이 하나님이 선택한 대속의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값이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선행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바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속물은 흠 없고 점 없는 양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대속자는 죄가 없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대속물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 정도의 거룩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가능했습니다. 바로 예수님만이 대속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지도 않으시고 거짓도 없다고 했습니다(벧전 2:22).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이 거룩한 대속물이 되신 이유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거룩함(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은 것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때문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영지주의자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너무나 귀한 대속물이 희생되셨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대속을 받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습니다. 금과 은, 양,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대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합당한 삶은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기억하고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아 순종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는 자들이었지만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보배로운 피가 이런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율법적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넘어질 때도 순종치 못할 때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통해 성화의 삶이 버거운 것이 아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