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의로운 자의 기도

본문 : 시편 17편 8-15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7:8-15 [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3]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들어주소서”(1-5), “응답하소서”(6-7), “지켜주소서”(8-12), 그리고 “구원하소서”(13-16)라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조건’, 또는 ‘기도 드리는 자의 자격’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께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필요를 구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는 이런 어려움을 당할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6-7절은 응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구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에 있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7).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지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주의 기이한 사랑”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바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은 모세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사용한 표현들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사랑, 인자하심,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능력을 행하시는 것,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것 등이 동일합니다. 다윗은 지금 그 동일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능력을 다시 보여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제가 주께 피하고 제가 주님의 백성이오니 제 기도에 응답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8-12절에서는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 어려움이 있고 그로부터 구원해달라는 기도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이제 다윗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8-9). 다윗은 두 개의 비유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이고, 또 하나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입니다.

“눈동자 같이 지킨다”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은 크기가 대부분 일정한데 누가 눈이 크냐 작냐 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것 뿐입니다. 눈은 무언가를 봐야 하기에 외부로 노출되지만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이기에 일부만 노출됩니다. 눈동자는 눈꺼풀이라는 것이 보호합니다. 눈동자가 건조해지지 않도록 지키고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콘택트렌즈를 사용하는 분들은 대부분 손가락으로 눈을 벌려서 렌즈를 삽입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민감한 곳에 무언가를 넣으려고 하니 몸이 방어하려는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눈을 자연스럽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가장 최우선에 놓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눈동자를 지키는 것 같이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우리말 성경에 “눈동자”로 번역된 표현을 히브리어 그대로 번역하면 ‘눈에 가운데 있는 작은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눈을 자세히 보거나 거울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보면 그 눈동자에 내가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그것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완벽한 그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에 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눈동자를 보호하시는 것이 나를 보호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니 하나님에게 날개가 있느냐 하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 어미새가 새끼새를 그 날개 아래 두고 보호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 말씀에도 이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룻기 2:12에서 보아스가 룻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룻이 자신의 신과 민족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러 이스라엘 땅으로 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룻기 3:9에서는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따라서 보아스의 발 밑에 눕는 장면입니다. 보아스가 놀라 묻자 룻은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옷자락”이 바로 “날개”와 같은 단어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날개를 펴서 보호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이러한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예수님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고 말씀하십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갓 태어난 아기새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아기새는 어미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미가 없는 사이에 적이 공격하면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기새입니다. 스스로 보호할 수 없고 자랄 수 없습니다. 어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호하심을 구하는 이유는 공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9).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압제하고 공격하고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10-12절을 보면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10-12).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라는 표현에서, “기름”은 부자들에 대해 말할 때 사치, 탐욕 등을 의미합니다. 또한 “잠겼다”는 것은 ‘닫혔다’, ‘막았다’는 의미로, 즉 기름진 마음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70)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둔하다는 것,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교만한 말”은 시편에서 악한 삶들의 특징입니다. 시편 1편에 등장했던 “오만한 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시편 10편을 보면 악한 자들의 교만에 대해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등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들, 바로 교만한 자들이 악인입니다.

또한 그들의 행실을 보면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을 보면 소극적인 악인들이 아닙니다. 마음의 죄악을 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겉으로 다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계획적으로 의인을 넘어트리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습을 사자에 비유합니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다윗이 자신을 아기새에 비유했다면 이제 악인들은 강하고 힘이 있고 그 강함과 힘을 죄악된 것에 사용하는 사자에 비유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한 이유가 그들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이러한 대적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제자들)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할 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나 어떤 상황에 대해 불만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전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 상황에 불만을 표현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3-15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3). 그는 이제 하나님께 움직여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악인에게는 심판이고 의인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아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의로우심을 보여주는 것은 악인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 찬양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14-15절에서는 악인과 의인을 확실히 구분합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14). 여기서 악인들을 가리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죽음”입니다. 인간이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악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며, 그들의 남은 산업을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남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까요? 그들의 산업은 세상에서 끝이 나지만 자녀는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닮은 자녀에게 만족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유한한 사람의 특징, 죽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어떨까요?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자신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모습입니다. 의로운 중에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그의 소망의 표현입니다. ‘잠에서 깨는 것’은 성경에서 부활에 대한 비유로 종종 사용됩니다(사 26:19; 단 12:2). 앞에서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 그 정반대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때 부활의 삶을 말합니다. 의롭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형상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삶을 기다리며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의인들입니다.

그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그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우리가 살아도 기쁘지만 죽어서 더 좋은 것은 주님을 죄악된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모습으로 만난다는 것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이것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주님을 뵙게 될 그 때에 주님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그 소망은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볼 것이고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게 합니다. 13-14절을 정리하면, 다윗은 ‘주님, 악한 자들은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저는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를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주의 구원하심을 나타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문제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해서 그 하나님께 응답해달라고 구합니다. 환경에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내려놓고 구원해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발견하게 됩니다. 눈, 입술, 눈동자, 걸음, 배 등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표현한 것들도 있지만 하나님을 표현한 것들이 많습니다.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하고(1), 눈으로 살펴달라고 말하며(2), 입술의 말씀(4), 귀를 기울여(6), 오른손으로(7), 나를 눈동자 같이(8), 주의 손으로(13),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15)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거짓된 신은 눈과 입과 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귀로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눈, 입, 귀를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시고 전능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8). 그러나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고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우심을 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 115:9),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17,18). 우리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가서, 소망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며 하나님께 구하고 의지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