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율법이여, 잘 있거라

본문 : 로마서 7장 1~6절

설교자 : 이병권

남편은 아내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는 삶을 함께하며 누구보다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사이입니다. 그만큼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자 입장에서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활동이나 여러 가지로 자유로운 지금도 그러한데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에는 얼마나 더 그러했겠습니까? 여자의 인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면 행복한 삶이 되겠지만 나쁜 남편을 만나면 불행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결혼 관계를 통해 율법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나쁜 남편에게서 벗어나 좋은 남편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비유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거부감 없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 로마서를 읽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시편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시편의 서론과도 같은 1편을 보면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9편에는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을 노래합니다.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가장 길고 특별한 시편, 119편은 율법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이런 시편에서 알 수 있듯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해답이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행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어떠했습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심지어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인 언급은 그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기에 율법에 대한 이유 없는 비방으로 들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은 그 율법을 소유한 자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고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멸시했지만 그들의 삶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질책입니다.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유대인들은 율법의 특권을 가졌지만 그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율법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되는 자로 드러납니다. 분명 말씀대로 율법의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의 의를 행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요? 물 위를 걷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 위에 발을 디뎠을 때, 빠지기 전에 재빠르게 발을 바꾸면 됩니다. 계속해서 물에 빠지기 전에 빨리 발을 바꾸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는 것도 그러합니다. 율법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 질문이 로마서 7장의 전제가 됩니다. 7장에서 우리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짧게 언급되었던 율법을 좀 더 깊이 자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7장을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단락마다 율법을 다르게 보고 있는 세 대상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가 있고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율법 폐기론자가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와 율법 폐기론자가 양 극단에 있다면 그 사이에 균형 잡힌 율법 성취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바울이 실제로 이러한 대상을 위해 7장을 기록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락마다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7장 말씀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율법주의자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리’와 ‘예시’, 그리고 ‘적용’입니다. 

1. 원리(1절)

먼저 율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 원리가 1절에 나옵니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원리가 무엇입니까? 법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를 주관합니다. 법이 구속력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 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법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법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의 원리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줄여서 ‘살사’입니다. 당시 랍비들의 금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토라와 계명의 이행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다시 생각하게 되는 말입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2. 예시(2~3절)

다음으로 율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예시가 2절과 3절에 나옵니다.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사람과 율법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비유합니다. 비유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결혼한 여인은 남편에게 매이게 됩니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결혼한 여인이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그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 됩니다. 남편에게 속해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법의 원리를 생각해봅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아내는 남편에게 매인 것에서 벗어납니다. 아내로서 가지는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간음이 되지 않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아내에게 있던 법의 구속력과 권한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죽고 아내가 새 남편에게 간다고 하니까 좀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한 여자 아이가 전쟁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습니다. 나이 많은 부자가 이 어린 아이를 사서 자기 아내로 삼았는데 이미 열 명이 넘는 아내가 있었고 또 한 명의 아내가 추가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신분은 아내였지만 사실 아내라기보다는 종이었습니다. 온갖 굳은 일을 다 해야 했고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대를 당합니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정말 나쁜 남편을 만나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남편이 죽었고 갑자기 아이에게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그동안 자신을 속박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이 자유를 준 것입니다. 율법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적용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두 가지 적용을 살펴볼 텐데 원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첫 번째 적용을 4절에서 보겠습니다.

3. 적용(4~6절)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남편의 죽음으로 자유를 얻은 아내처럼 우리도 죽음으로써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울이 말한 예시와 적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시에서는 아내가 자유롭기 위해 남편이 죽었습니다. 적용에서는 아내가 자유롭기 위해 아내가 죽었습니다. 남편인 율법이 죽는 것은 아니라 아내인 우리가 죽임을 당합니다. 속 썩이고 아내를 힘들게 하는 남편일수록 수명이 길다는 푸념이 있습니다. 자유를 바라면서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데 남편이 죽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아내 쪽에서 죽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그와 연합해서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율법은 죽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변할 수 없고 폐기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죽습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그 관계가 끝났고 모든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배우자의 죽음으로 결혼의 법이 무효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음으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하게 된 우리에게는 정말 멋진 새로운 남편이 생겼습니다. 새 남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죽은 우리가 자유를 얻고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남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죄의 형벌로 죽임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분은 우리의 남편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죽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첫 번째 적용입니다. ‘죽었음을 알라’ 

적용① 죽었음을 알라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조금 더 나를 좋게 봐주시고 용납해주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조금 더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이정도로 헌신하면 될까? 이정도면 충분할까? 답이 없는 질문을 가지고 율법의 요구 앞에서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어떻게든 수고를 짜내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올라가야 하는 계단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계단을 올라가야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나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되어졌습니다. 나의 어떠함으로 인해 변화된 나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때로 율법 아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나의 자랑이 되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두 가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정죄이고 또 하나는 외식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만큼 행하지 못하는 현실과 나의 연약함을 만나게 될 때 그것이 자신에 대해서는 정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외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만큼 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 실망하고 나를 정죄하게 되고 그만큼 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서 외식하는 겁니다.

그러다 반대로 내가 좀 잘했다고 느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정죄와 외식이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나를 정죄했던 것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안하고 저렇게 사는 거지!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타났던 외식은 내가 잘 했을 때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보다 나를 더 좋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겁니다.

정죄와 외식, 판단과 교만이 율법 아래에 있을 때 얻게 되는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만큼,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웠고 그 결과 외식하는 삶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쉽게 율법 아래에 있는 삶,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죽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이여 잘 있거라, 나는 죽었노라.

우리가 전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4절 표현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 번째 적용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적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우리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어떠한지를 말합니다. 전에 우리는 죄의 정욕을 따라 사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죽었기에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삶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섬기는 것을 잠깐 언급하고 더 이상 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8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7장에서는 율법에 집중해서 율법에 대한 처절한 인식과 한계를 느낀 후에 8장에서 성령의 법을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느끼는 감격은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갑니다. 생명을 가진 자의 특징은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전에 우리가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열매를 맺었다면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 있어서 그 힘의 근원이 성령님입니다. 율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성령님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적용② 죽었음을 알라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두 번째 적용입니다. ‘영으로 섬기라’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여 잘 있거라, 나는 영으로 섬기노라.

우리가 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율법의 저주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남편 되시기에 그분이 기뻐하는 것을 내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삶의 모든 부분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 결혼을 했는데, 내 생활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 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예수님이 나의 남편이 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삶의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영역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싫지 않습니다.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의 남편 되시는 예수님께 매이게 되는 삶이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졌고 예수님은 나에게 너무 멋지고 좋은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혼을 하면 혼자일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결혼 관계에서 따라오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친밀감, 하나 됨과 안정감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 남편을 섬기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길 때,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살 때 그것이 나의 진짜 행복이 되고 나의 진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에 대해 죽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여 잘 있거라, 나는 주님과 함께 율법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 죽었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