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유혹에 대한 오해, 이해, 지혜
본문: 야고보서 1장 13절~18절
설교: 이 병 권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를 결심을 합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는 출근하면서 도너츠박스를 가지고 오는 겁니다. 직장 동료들이 “아니,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지금 이게 뭐냐고” 그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도너츠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합니다. 차를 타고 도너츠 가게를 지나는데 가게에서 나는 도너츠 냄새가 너무 좋았답니다. 그래도 다이어트를 생각하며 망설이는데 그 순간, 절묘하게 신호가 바뀌더랍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도너츠 가게 주차장으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차장에 자리가 있으면 도너츠를 사고, 자리가 없으면 그냥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는 주차장을 8번 돌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사소한 예지만,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때로는 그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유혹을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죄로 이끄는 유혹이라는 시험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가 이 시험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두 번에 걸친 야고보서 공부를 통해 시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주님 닮도록 하는 도구이며,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허락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해서 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12절까지 야고보가 외적인 환경이나 어려움 다시 말해 시련이라는 시험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면, 13절부터 말씀하는 시험은 우리의 내적인 시험에 대해서 유혹이라는 측면을 다루고 있는 겁니다.
시련이라는 시험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허락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받는 죄의 유혹도 역시 하나님께 온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유혹이라는 시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시험도 시련이라는 시험과 같이 모든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이라는 시험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이러한 유혹에서 면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 받은 자로서 더 이러한 유혹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며 갈등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유혹의 함정들을 미리 알고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유혹에서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그 유혹에 대해서 완전히 면역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붙들고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나이가 많든지 나이가 적든지 관계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떤 일을 하든, 어디에서 살든지,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유혹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게 유혹에서 완전히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서 유혹에서 이기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고, 승리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유혹이라는 시험, 다시 말하면 여기 계신 어떤 분도 이 유혹에서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유혹에 대해서 대비해야 합니다. 유혹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유혹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유혹에 대한 오해, 이해, 지혜입니다.

먼저 우리는 유혹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혹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혹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에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유혹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그 죄의 탓을 돌리는 겁니다. 나를 유혹에 빠지게 한 근원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죄를 지었어, 이런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 때문에 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거야, 그래서 이것은 모두 하나님 책임이야“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유혹에 넘어갈 때, 유혹에서 실패할 때, 우리는 내가 유혹에 빠진 원인을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찾기를 원합니다. 핑계를 대며 책임을 미루는 겁니다. 특히 유혹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담에게서 볼 수 있고,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나서 그 잘못을 아내에게로 돌립니다. 결혼 전에 아내를 보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던 아담이 이제는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불순종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매님들 어떠십니까? 아담의 모습 속에서 남편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런데 아담의 말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아내에게만 잘못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나는 아닌데 하나님이 이 여자를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이 여자 때문에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겁니다.

나에게 이러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 장소, 그 시간, 그 상황, 그 사람을 탓하며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여러분, 이것은 오해입니다. 야고보는 분명하게 하나님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유혹하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죄로 이끄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유혹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절대로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실패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험하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죄를 짓도록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유혹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제 유혹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 유혹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바로 유혹에 대한 이해 부분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4,15절).

우리가 당하는 유혹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나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1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이 아님을 밝히고 그 유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14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험, 다시 말해 유혹은 자기 욕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유혹을 바르게 이해하십시오. 유혹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혹이라는 시험은 바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은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서 욕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소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심에 이끌려서 미혹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욕심에 끌려 미혹된다는 것은 낚시를 할 때 물고기가 미끼에 끌리는 장면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러분 낚시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물고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먹이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물고기를 유혹합니다. 처음에는 경계를 하지만,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보니 먹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번 건드려봅니다. 또 한 번 건드려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참을 수 없어서 덥석 물어버립니다. 그 순간! 물고기는 낚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 미끼를 물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고개를 들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면, 호기심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합리화와 그럴 듯한 이유를 대며, 우리는 유혹이라는 꼬드김에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선택은 당연한 거야, 다른 사람들을 봐봐 다 이렇게 하는데 멀, 이번 한 번만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보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그냥 해” 이런 수많은 속삭임들이 우리의 욕심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결국 죄를 낳게 되는 겁니다. 욕심이 커지면 죄에 이르게 되고,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욕심에 이끌려 죄를 범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그 사람의 특징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는 영원한 심판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욕구를 어떻게 다스리며 절제하고 계십니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욕심대로 행동하고 습관적인 죄로 이어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욕심의 결과를 보십시오. 죄의 결과를 보십시오. 그 결과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망입니다. 유혹이 순간적인 만족이나 달콤한 쾌락으로 우리를 부르고 손짓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도 큰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소중한 것을, 정말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것으로 바꾸는 것, 정말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그 순간 그것만 얻게 되면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만족할 수 있다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안달하도록 우리를 이끌지만, 결국 그것을 가졌을 때 남는 것은 뒤늦은 후회와 허무함뿐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합니까? 나의 마음이 욕심으로 뜨거워질 때 지옥의 뜨거운 불길을, 그 무서움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유혹의 결과를 기억하십시오. 그 끝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영원한 사망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는 우리를 붙들어 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나타낼 수 없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세상은 갈수록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나름의 논리로 꾸미고 죄를 용납하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죄는 죄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든지 관계없이, 죄를 어떻게 미화시키고,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하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죄를 단호하게 죄라고 말하며, 이 죄를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를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고, 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너무도 더러운, 추악한 죄입니다. 여러분, 썩어서 지독한 냄새가 나고 보기만 해도 역겨워서 구토가 나오는 더러운 쓰레기를 정말 예쁘게 정성을 다해 포장한다면 괜찮을까요? 누군가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준다면 받으시겠습니까? 정말 멋진, 명품 포장지에 담으면요? 그래도 싫으세요? 페브리즈 좀 뿌리면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겉을 아름답게 꾸민다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죄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혹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쉽게 생각하고, 여러분이 쉽게 말하고, 여러분이 쉽게 행동하는 그 죄로 인해, 그 죄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죄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습니다.

사탄은 여러분 앞에 여러분이 좋아하는 미끼를 던지며 여러분을 유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경계하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미끼를 보고 미혹되어 그 미끼를 덥석 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죄를 선택하게 될 것이고 말 그대로 낚이게 되는 겁니다. 요즘은 신종사기라고 해서 우리를 낚으려고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피싱(Phising)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하며 경계를 합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거나 문자를 받을 때 조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유혹이라는 피싱(Fishing)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정보보다, 우리의 물질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유혹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 유혹에서 승리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 18절).

우리가 유혹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겁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그것에 우리의 확신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속아 넘어가고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한다면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빛들의 아버지로 표현되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피조물과 같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변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완전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은 좋은 것을 주셨다가 내일은 나쁜 것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피조물 중에 하나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구별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셔서 따로 분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의 생명이, 그분의 온전한 희생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우리가 생명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가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절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좋으신 분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안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을 가지며 집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완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향한 신뢰를 굳건하게 하고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의지하며 유혹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추구할 때 가능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며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어떤 유혹을 당하든, 그것이 얼마나 끈질기든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전한 은사와 승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강건하게 하며 유혹에 맞설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 집중하면, 그분께 집중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분이 아니라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다른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죄가 주는 일시적인 만족에 나 자신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죄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기 위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구약의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였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하나님이 주신 가장 위대하고 완전한 선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면 우리 인생 가운데 유혹이 몰아칠지라도 견고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를 채울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시고, 유혹이 찾아왔을 때 분명하게 “아니야!”라고 대답하십시오. 직접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영어가 익숙하신 성도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No” 여러분에게 유혹이 찾아 왔을 때 어떻게 해야 되죠? “아니야! 난 그것에 속지 않아! 난 정말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되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혹의 그 순간에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이 자리에 계신 유평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유혹에서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키모들이 이리를 사냥하는 방법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그들은 칼 한 자루와 짐승의 피만으로 이리를 잡습니다. 먼저 예리한 칼날에 짐승의 피를 발라서 그것이 얼 때까지 놓아둡니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다시 피를 발라 얼리고, 또 피를 발라 얼리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피가 칼날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계속합니다. 그런 다음 칼날을 위로 보이게 해서 칼자루를 땅에 단단히 묻어둡니다. 그러면 밤중에 이리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칼날을 핥기 시작합니다. 얼어붙은 짐승의 피와 싸늘한 칼날이 이리의 혀를 마비시키고, 이리는 칼날에 제 혀를 베어 자신의 피를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더욱 허겁지겁 그 피를 먹기 위해 칼날을 핥게 되고, 혀는 갈가리 베이게 됩니다. 결국 이리는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 갑니다.

유혹이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욕심에 끌려 죄에 빠지게 될 때 그 결과는 분명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모든 것이 너무 평온하니 오늘은 특별히 내 인생을 망치는 일을 해야겠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러한 생각으로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자처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불 가까이 가면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활활 타고 있는 불길 가까이로 가지 않습니다. 유혹이라는 손님이 여러분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노크를 할 때 문을 열어주지 마십시오. “아니야” 라고 말씀하십시오! 시작부터 기회를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인생에게 존재하는 두 가지 길을 대조합니다. 하나는 성숙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는 시련을 견뎌냄으로 이르게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유혹에 넘어감으로 이르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는 풍성한 삶으로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 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