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에 합당한 삶 PART III
본문 : 베드로전서 1:13-17
설교자 : 조정의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본문 말씀에는 세 번의 명령어,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Hope)”,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Holy)”, “두려움으로 지내라(Honor)”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구원에 합당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앞 구절에서 찬양하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을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완성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당연히 성도는 그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하는 자에서 순종하는 자로,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의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이제는 17절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구원받은 사람의 합당한 삶이라고 할 때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지 모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지내다”는 말은 왠지 수동적이고 나태한 삶을 보여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중하게 처신한다’는 뜻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살아가십시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단어는 의지적이고 능동적으로 특정한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씀에서 여러 군데 이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고후 1:12, 딤전 3:15, 히 13:18, 엡2:3).

또한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려움 안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지내라는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불안, 공포가 될 수도 있고 공경, 경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17). 이 두려움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의 속성과 성품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순종하는 자식”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6). 곧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신 6:2)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수 24:14)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신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니엘 5:6을 보면 하나님을 본 벨사살 왕의 모습을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 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딛친지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와 같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5에서도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에서도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종일 신음 하므로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의 시작부터 그러했습니다. 범죄한 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모든 인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없습니다. 현재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21),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세상 사람들은 이렇듯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외함도 없고 그 말씀에 따라 살지도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범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모두 심판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들은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공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들은 그날에 가장 큰 두려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했던 선한 일들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한 것, 좋은 일을 했던 것들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거룩하신 보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도 상실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외모로”(외적증거, 율법)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대로”(믿음, 구원)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서 평생 두려움 없이 죄로 가려진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 자녀, 친구에게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떨 날이 올 것이라고, 무서운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갈 순간이 올 것을 말해줘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17). 우리는 심판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이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물론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훈계하고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지식을 복음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다스리시고 선악을 판단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뤄내신 것을 복음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다가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동기가 생긴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없을까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에게 심판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나태하게 할까요?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으니까 이제 마음대로 살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은 누군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아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어둠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평가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우리의 공적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3-15). 어떤 사람은 하늘의 상이 필요 없다고 말할 지 모릅니다.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하다’라고 스스로 겸손한 듯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남아있는 공적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고 나서 그저 어둠 가운데 삶을 즐기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큰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광과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구원에 합당한 삶으로 세 가지 명령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두려움으로 지내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의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