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
본문 : 빌립보서 2:12-18
설교자 : 최 종 혁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구원을 이루다’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주로 과거에 일어난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칭의’의 부분, 또 하나는 날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 그리고 나중에 주님과 같은 몸을 가지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즉 구원에는 이미 이뤄진 것이 있고(과거), 지금 이뤄가고 있는 것이 있으며(현재), 앞으로 이뤄질 것이 있는 것(미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을 칭의, 성화, 영화라고 구분하고 있지 않고 그저 구원이라는 말 하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볼 구원은 그 두 번째 측면, 즉 현재 이뤄지고 있는 구원, 성화를 말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성화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화와 관련된 명령과 그러한 성화를 이뤄갈 때 우리가 갖춰야할 태도, 그리고 성화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시각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앞의 9절 말씀이 “이러므로”로 시작하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셨을 때 “이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다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이 구절의 다른 번역본을 보면 “항상 복종했던 것 같이”로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동안 복종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너희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2)라고 말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순종의 본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입니다. 믿지 않았을 때 “불순종의 자녀”였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순종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즉 ‘순종의 삶’과 ‘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순종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떠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은 편지의 대상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고 칭함 받은 “너희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두렵고 떨림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구원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평안의 삶,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내가 어떤 자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죄에 민감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신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은혜와 자비, 사랑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에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12절). 사도 바울은 내가 없을 때 더욱 그러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주저함 없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4)는 명령을 하기도 하고, 16절에서는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을 부를 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사도이자 가르침과 삶으로 본이 되었던 그가 이제 그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아마도 큰 상실감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는데,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을 이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있든지 없든지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13절에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13절). 그들 안에 행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에서 ‘행하다’는 능력있게 행한다, 효과적으로 일한다는 뜻으로, 어떤 행동 자체에 결과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원하는 일을 행하고 그것은 반드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을 때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죄를 사랑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는 죄를 미워하고 선한 것을 사모합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에 대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것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실 뿐 아니라(“소원을 두고”) 그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 뜻을 이루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13절)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신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이고 앞에서 말했던 ‘복음에 합당한 삶’, 성화입니다. 칭의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라면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져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이 성화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로 오해를 합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노력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들은 ‘구원은 하나님이’, ‘성화는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하루 하나님을 잘 섬긴 것 같으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자랑할 것이 생깁니다. 반대로 오늘 하루 실패하는 삶을 살았으면 쉽게 좌절합니다. 또 다른 오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할 때 그제서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은 오히려 성화에 있어서 방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은,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면 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서 아무런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서 본 것처럼, 성경은 둘 중 하나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말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다 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내 노력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일하지만 그 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했다는 것인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인지 의미가 모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더 많이 수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넘어지고 실패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확신 있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성화를 이뤄갈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절).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평안하고 기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의 선진들도 그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잠깐 힘든 것이 아니라 평생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불평하지 말고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그 불평은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고 지도자를 향할 수도 있고 성도들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15,16절).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요 1:12). “흠 없는” 것은 비난할 것이 없는 것, “순전한” 것은 내적으로 순수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흠 있는 자녀’도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의롭다 함을 받지만, 그 중에는 신분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자녀도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걷는 모습, 말하는 것 등이 부모를 닮아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인간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일부 일그러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상한 거울이 있어서 얼굴을 비출 때 이상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 세월 일그러진 상태로 살다가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다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 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계속해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누가 드러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며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셨던 예수님을 닮아가면 우리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하나님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일그러져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말하고, 도덕이 아닌 것을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 있다 여겨지는 뒤틀리고 삐뚤어진 세상이 되었습니다(신 32:5). 이 세상에는 빛과 생명되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낼 사람들이 바로 그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15,16절). 이것이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함께 일하면서 서로 싸우고 갈라선다면 세상은 그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어떤 하나님을 보게 될까요. 그들이 보는 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불평 없이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그러한 일들을 하라고 말합니다.

17-18절에서는 이러한 성화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 시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뻐하라”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전제로 드리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17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제사장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서로 교제하고 위로하며 긍휼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고 관용하고 서로 용납하는 모든 일들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가리켜 “전제로 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제는 제물을 드린 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의식입니다. 그것이 기화될 때 제물이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상징으로 붓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 위에 자신의 삶도 전제로 부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과 바울의 삶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과 다른 성도들의 삶을 바라보던 시각입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들과 그가 하나가 되어서 함께 구원을 이뤄갈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므로 그것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순탄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환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달려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든 기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에 더욱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현재에 당한 고난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 끝나겠지’,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 삶 때문에, 이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뤄가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매 순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이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가 있을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득히 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주는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고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평생을 두고 하는 일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일하십니다. 잘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했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 일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 이뤄낸 것임을 기억하며, 현재의 구원을 힘써 이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