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사의 노래

본문: 시편 108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08편은 전장에 나서는 용사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12-13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싸울 것을 다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도 다짐한다.

그런데, 시편 108편을 읽어보면 익숙할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찬양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이미 살펴봤던 시편 57편과 60편의 뒷부분을 합쳐서 하나의 시로 편집했기 때문이다. 108편 5절까지는 57편 7-11절과 같고 6절부터는 60편의 5-11절과 같다. 약간 수정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두 시편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두 시편 모두 다윗의 시편이었기 때문에 108편도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시편 57편은 표제에 따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기록한 시편이다. 다윗은 사울과 싸울 수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기도했었다(시 57:1). 재앙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기도가 6절까지 말씀이고, 7절부터는 그 신뢰를 찬양으로 바꿔 하나님을 높인다. 바로 그 찬양이 108편 1-5절에 사용되었다.

시편 60편의 배경도 표제에 언급되어 있는데,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다. 표제를 보면 뒤로는 승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내용이 이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비참한 패배를 당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4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과정에서는 그런 패배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 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이 5절부터 11절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부분이 시편 108편 6-13절에 사용되었다.

정리하면, 시편 108편은 두 시편에서 고난의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제외하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찬양과 기도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주석들은 108편에 대한 주석이 따로 없고, 시편 57편과 60편에서 해당되는 부분의 주석을 참고하라는 내용만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편 108편을 같은 내용의 단순한 반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시편 108편은 어떻게 오래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의 나에게 적용되고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두 시편을 이렇게 하나로 엮은 사람은 다윗은 아니다. 다윗처럼 사울에게 쫓겨서 굴로 피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다윗처럼 전쟁에 나가는 상황이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다윗과 정확히 같은 경험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그 확신 가운데 기도하고 찬송한 것이 성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편 96편이 말하는 “새 노래”다.

96:1–3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다윗에게 새 노래였던 시편 57편과 60편이, 108편에서 다시 새 노래가 되었다. 다윗이 가졌던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시편 108편의 편집자는 현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며 기도하고 찬송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시편 108편은 우리에게도 새 노래가 된다. 우리가 같은 확신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면 그것이 곧 새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과 시편 108편의 편집자가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4, 7-9절)

먼저 다윗이 가졌던 확신의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108:4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 즉 자기 백성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물론 107편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만큼 위대하다. 다만 4절이 강조하는 것은 그런 위대함의 크기보다는 범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 보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진리)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도 가득 채울만큼 온 우주에 가득하다. 그래서 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3절이 말하는 것처럼 만민 중에서, 뭇 나라 중에서 드려져야 한다. 그리고 5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셔서 모든 피조물이 그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합당히 높여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은 어느 지역, 어떤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라고 말씀하셨다(요 10:29).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은 그 모든 것과 상관없는 곳에 계시지 않다.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은 어느 곳에나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주 어디를 가든 진리이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도 없다. 광야에 있든, 바다에 있든, 포로가 되었든, 병 중에 있든, 어디든, 그리고 언제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 따라서 이를 거절한 자와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합당하게 보응하신다.

이 사실을 가장 뼈아프게 깨달았던 사람 중 하나가 앗수르왕 산헤립이었을 것이다. 그는 승승장구하며 유다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랍사게를 사신으로 보내서 항복할 것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하 18:32–35 …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

산헤립에게 있어 여호와는 ‘민족의 모든 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무리 여호와라고 해도 다른 민족의 신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여호와도 예루살렘을 자신의 손에서 건져낼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굳이 힘빼지 말고 항복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당시 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왕하 19: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왕하 19: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히스기야는 여호와가 자기들에게만 국한된 신이 아님을 알았다. 여호와는 세상을 만드신 분으로서 유일한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을 지닌 앗수르에게서도 하나님은 건지실 수 있음을 믿고 이렇게 기도한 것이다. 천하 만국은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했다. 그것을 위해 히스기야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산헤립의 군사 18만 5천을 치셔서 산헤립을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셨다. 산헤립은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저 여러 민족의 신 중의 하나가 아니라 천하 만국의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산헤립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는 유다와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의 믿음과 생각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진리는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의 보편성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확신의 근거다.

이런 일반적인 원리 위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적인 약속의 말씀을 기억한다.

108:7–9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8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9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이 말씀은 어쩌면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들은 계시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후에 보여주셨던 땅에 대한 약속을 이렇게 정리한 것일 것이다.

7절의 세겜과 숙곳은 야곱이 라반에게서 도망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야곱은 먼저 요단 동편인 숙곳에 머물다가 그 후에 세겜에 정착했다. 그저 우연찮게 그곳에 살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그가 살게 되었던 것이다.

8절도 마찬가지로 요단의 동편과 서편의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길르앗과 므낫세는 요단의 동편을, 에브라임과 유다는 요단의 서편을 대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땅에 대해 하나님은 소유권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땅은 본래 그 땅에 살던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땅을 원하시는대로 하실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9절에서 모압과 에돔, 블레셋을 언급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나라들로서 다윗 당시에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 나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선포하셨다. 그 나라들을 이미 발 아래 두고 계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성취될 것에 대해 다윗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다윗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뭔가 좋아지고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편 57편에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재앙 가운데, 재앙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사울은 뭔가 앞으로는 달라질 것처럼 말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시편 60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린 것 같이 전쟁에서의 패배를 경험했다.

만약 이런 상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다윗은 반응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거짓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옛날 이야기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포자기하거나 혹은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두 시편에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기로 그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기로 그 마음을 정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경험하는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이 찬양과 기도로 이어졌다.

시편 108편의 편집자는 다윗과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족장 시대부터 다윗의 때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경험하는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증되었다면, 그 후로 지금까지 그 사실이 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편 107:1이 선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리고 시편 119:89가 선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두번 성취되면 효력이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골딩게이, <Psalms 90-150>, 271.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오직 한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한번의 성취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온 말씀이란 사실을 확고하게 하고 또 다른 성취를 바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상황에만 적용되도록 제한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그전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성취하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편 108편의 편집자는 거기에 더해 다윗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다윗 이상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논리는 지금 이 시편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다윗의 때 이후로, 또한 시편 108편이 기록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다니엘과 친구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목숨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이 형통하게 하셨다. 우리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유다 민족이 멸망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기꺼이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하셨다. 우리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셨던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셨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것을 알고 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묻는다(롬 8:32). 그리고 그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확신한다(롬 8:39).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살고 있든 상관 없다. 어디서 살고 있든 상관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늘보다 높으시며 하나님의 진리는 궁창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땅에 대해서만 “내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에 대해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모든 것’에서 우리는 종종 나와 내 상황은 제외시킨다. 내가 예상치 못한 큰 일을 만날 때 주로 그렇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예상치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도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승리를 외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을 확증하셨고 그 진실하심을 확증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 이미 있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잘못된 안경을 벗고 제대로 된 안경을 쓰는 것과 같고 더러워진 안경을 닦는 것과도 같다.

가끔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서 밖이 왜 이렇게 어둡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더러운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뿌옇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그렇게 본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감정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잘못보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우리의 눈을 교정해 준다. 깨끗하고 제대로 된 안경을 씌워서 제대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말씀이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그렇게 말씀으로 우리의 확신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진리는 지금 나에게도 변하지 않음을 확신해야 한다.

이 확신은 두 가지 합당한 반응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찬양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다.

찬양(1-5절)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1절은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뿐이다.

어떤 상황 때문에 낙심해 있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화가 나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함을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 반문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를 확신하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 그 말씀들을 묵상해보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찬양하지 못할 상황에 내가 내몰린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욥이 좋은 본이 된다. 욥이야 말로 찬양하지 못할 상황에 내몰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욥은 재물을 다 잃었고 사업도 다 잃었다. 심지어 자기 자녀도 하나 둘이 아니라 전부 잃었다. 그때 욥은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며 하나님을 예배했다(욥 1:20-21).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런 욥이 너무 큰 고난에 정신을 놓았다고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욥은 정신을 놓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렸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그 마음을 정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찬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찬양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내가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내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내 지금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 결심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잠자는 모든 것을 깨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2절)

이 찬양은 혼자만의 찬양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3절)

어떤 상황 중에 있든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숨길 것이 아니다. 모든 상황 중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은 만민과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신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108: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실 때 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실 때 감사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고, 또한 우리의 고난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여 하나님을 높일 수 있다. 어느 때든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인해서 또한 하실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내 마음을 정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확신하는 우리에게 합당한 첫 반응이다.

기도(6-13절)

다음은 확신의 기도다.

108:6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이 기도는 5절에 언급됐던 찬양의 목적에 합당하다. 하나님이 그 영광을 나타내시고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나타내셔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건지시려면 지금 이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한다. 한편 당돌해 보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드리는 절박한 기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어지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상기하고(7-9절), 하나님께 묻는다.

108:10–11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 1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상황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있지만, 여전히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함께 해주시기를 구한다.

108:12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결국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도 없다. 여기 사용된 ‘헛됨’은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된다. 우상은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이 그렇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이 뭔가를 해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한다. 그래서 이 확신의 기도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108:1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이것이 확신하는 자의 기도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보여주실 때까지 저는 꼼짝하지도 않겠습니다’가 믿음 있는 자의 기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런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런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확신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한다. 그것이 용기다. 이것이 연약한 자가 아닌 용사의 기도이다.

도전

시편 108편은 용사의 노래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전장을 향해 나가는 용사의 노래다.

용사에게는 필요한 것이 많다. 공격과 방어에 필요한 무기들이 있다. 평소에 꾸준한 훈련도 필요하다. 경험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쟁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용기일 것이다.

이 용기는 어디서 올까? 용기는 확신에서 온다. 물론 올바른 근거를 가진 확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용기는 만용이며 객기일 뿐이다. 그런 용기는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린다.

다윗이든 시편 108편의 편집자든, 그들은 전장에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확신으로 용감히 행했다. 그리고 이는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확신과 용기를 준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할까 싶을 수 있지만, 영적 전쟁을 하는 우리도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고 따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은 결혼 생활에 있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사랑과 순종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경을 따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주변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말릴 것이다. 나도 불안하다. 이렇게 하면 평생을 남 좋은 일만 해주면서 살 것 같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용기있게 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자녀 양육이나 직장 생활, 남녀의 역할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에 비해서 지금은 더욱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반대하고 있다. 적군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거기에 우리를 기만하는 전략도 더욱 치밀해져서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채 무감각하게 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용기있게 행해야 한다. 시편 108편에는 사실 두 용사가 등장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용사가 있고, 그런 용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장에 던져두고 알아서 싸워이겨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용사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싸우신다. 오늘 말씀의 7-9절이 바로 그런 용사이신 하나님의 노래다.

이 노래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불안감도 없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자로서 기뻐하시며 적들을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그들을 정복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확신 가운데 용감히 행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에게도 확신의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 용사의 노래를 불러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도 용감히 행하자. 세상의 지혜에 담대하게 “아니”라고 거절하고, 하나님의 지혜에 기꺼이 “네”라고 순종하자.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새 노래로 하나님을 하늘 위에 높이 들어올려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