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와서 보라

본문: 요한복음 1장 35-51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가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많이 듣고 자세히 알아본다고 해도 내가 직접 만나서 보고 경험하는 것하고는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했던 일이 그러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을 때는 그분을 보라고 도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일이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이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수님이 안드레와 베드로를 만나는 장면과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나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했었는데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제자들에게 증언합니다.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1: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증언은 셋째 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증언의 내용은 둘째 날에 언급했던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이 증언을 듣고 행동합니다. 두 제자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40).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아닐까하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여기서도 자신을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했고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선생을 바꾸는 두 사람이 무정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세례 요한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명에 충성했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신이 증언했던 분이 오셨기에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 이 일을 위해 수고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문자적이면서도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뒤따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그분의 삶을 보고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첫 걸음을 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무엇을 구하느냐”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두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따르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조금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는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 곳이 어디인지 물으면서 조금 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제가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와서 보라” 간단한 말이지만, 제자들의 일생을 바꿀 수 있는 입니다. 두 제자는 그날의 나머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보냅니다. 열 시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 정도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 만남은 다른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가 했던 일이 그러합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찾았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안드레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등장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지금처럼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일을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고 또 헬라인 몇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6:8-9; 12:20-22).

이렇게 안드레 덕분에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로, 베드로로 바꾸셨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권위가 있는 분이십니다.

지금의 베드로를 생각하면 반석이라는 이름은 그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습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뜻대로 변화된 베드로를 반석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부르시고 빚으시고 사용하십니다. 모난 부분을 다듬어 가시고 타고난 성질을 바꾸어 가시면서 예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완성된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변할 수 있기에 변화되어 가야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보고 들으며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경험할 때, 우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너도 와서 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눈으로 직접 그분을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서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로 두 사람이 추가됩니다. 먼저 빌립이 추가됩니다.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또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더 넓은 문맥에서 넷째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셨고 그를 부르십니다. 성경에서 빌립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공관복음에는 빌립이 나오는 것은 열두 제자들의 목록뿐입니다. 그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빌립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갈릴리 벳새다 사람입니다. 벳새다라는 지명은 고기 잡는 집이라는 의미인데,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빌립을 알고 계셨는지 어떻게 만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빌립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빌립은 주저 없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자는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만남은 다른 만남을 만들고 다른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만듭니다. 가장 일반적인 전도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성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옛적부터 모세와 여러 선지자가 예언했던 분, 성경이 가리키고 오시기로 약속된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있습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게다가 나사렛 출신입니다. 엘리트 집안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중심, 주목 받는 지역도 아닙니다. 그래서 빌립의 증언을 들은 나다나엘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요21:2). 그런 의미에서 나사렛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사람들에게만 멸시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같은 갈릴리 사람에게도 멸시를 받았던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같은 곳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질문이 되었습니다(요7:41-42).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베들레헴 사람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려진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편견에 대해서 빌립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1:46 …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 그리고 사실과 다른 오해와 거짓들, 그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와서 보라”입니다.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보고 생각하면 무엇이 진리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와서 보라” 지금 빌립의 도전은 단지 나다나엘 대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와서 보고 예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자가 되라는 도전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도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보기 위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속임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생각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속이는 사람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닮았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은 나다나엘은 그것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아시는지 질문합니다.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지식을 말씀하십니다. 랍비 문헌에서 무화과나무 그늘은 묵상과 기도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장소를 초월해서 나다나엘을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다나엘의 편견과 의심은 빌립의 증언으로 해결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즉시 해결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나다나엘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의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빌립의 초청에 응답했기에 그는 이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고 그리고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 말씀에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진실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확실함 혹은 변함없음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이 신뢰할 수 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진실로 진실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노니’의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구약의 배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외삼촌에게로 도망가는 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하늘까지 연결된 사다리를 보았고 그 사다리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고백하며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에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벧엘이 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은 야곱이 꿈을 꾸었던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과 땅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옛적에 야곱이 꾸었던 꿈이 예수님을 통해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증언과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와서 보라는 초청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아서 메시아를 만났음을 증언했고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서 구약에서 예언된 그분을 만났음을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수고와 증언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일을 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차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아셨고 그들을 뜻대로 부르셨고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사람을 찾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셨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와서 보라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조금 먼저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조금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에게 와서 보라고 도전하며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