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본문 : 빌립보서 3장 17~21절

설교자 : 염창훈

설교에 앞서 제가 오늘 이 본문을 택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은퇴한 목사님이 목회를 할 때 설교하기를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설교를 계속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은 집을 여러 채 사놓고 여자들과 나쁜 짓도 한 것이 들통이 난 뉴스를 봤습니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놓으라고 설교를 하더니 저런 잘못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은퇴한 사람으로서 내가 믿고 가르치는 것처럼 살고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농사도 짓고 교회 일도 돕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미국과 미얀마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곳에서 어려운 성도들을 만나기도 하고, 성도님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지 보고 어떻게 남은 삶을 살 것인가를 보고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남은 삶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는 것 말고 예수님처럼, 내가 말하고 믿고 있는 것처럼 끝까지 살고 싶다고 다짐했습니다. 저의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재물과 시간 등의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을 믿는 자처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나처럼 살아라, 나는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너희를 사랑한다는 등의 자신의 간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헌신된 사람인데 무엇보다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훌륭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기보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본받고 살고 있기에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의 특징은 거듭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자신은 예수님처럼 성도들을 위해 죽기를 원할 정도로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바울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구원하신 목적은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표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일생의 소원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 그 분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학생들과 청년들은 특히 이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아들의 형상, 주님의 사랑, 친절, 용서, 은혜가 우리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말씀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사람들은 이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처럼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예배 시간에 청년이나 학생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볼 때 참 마음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한 형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증거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빌 3:17)”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하고 그렇게 본받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과 본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이 넘도록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삶과 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병든 나사로의 집에 가서 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6)” 사도 바울은 본으로 가르쳤고 성도들은 본을 받았고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순종했고, 에바브로 디도는 사역을 도우려고 자신의 병을 개의치 않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본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런 말씀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가장이고, 어머니입니다. 직장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누군지 알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사는 동안에 주님 앞에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많이 닮은 사람들을 만나서 보고 배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끝난 뒤에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 “본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존경하던 분을 외국에 가서 만나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주변에는 왜 이렇게 본받을 사람이 없냐고 말했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그럼 우리가 본을 보이자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8-19)” 빌립보 교회 가운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빌 3:2)”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들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의식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눈물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전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해 본 적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형제들이 지옥에 가고 이웃과 가족들이 지옥에 가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금방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주님의 품에 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제 형제간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늘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을 생각하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1-3)”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동족과 친척들을 생각할 때 자신이 지옥에 가더라도 친척들이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믿는 자들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안 믿는 친척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기다 보면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큰 걱정은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 중에서 함께 삶을 나누고 식사도 하고 아프면 찾아가며 함께 했는데 혹시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분이 있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어떡하나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십 몇 년 만에 저에게 처음 복음을 전해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그때 저에게 구원받았냐고 물었을 때 저는 세례는 받았는데 구원은 모르겠다고 답했었습니다. 그 분은 30년 넘게 교회를 안 다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술이 취해서 ‘나는 구원받아서 괜찮은데 아내가 걱정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절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분은 구원받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방탕한 삶을 살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천주교인 중에 몸이 편찮으신 분이 계셔 복음을 전하러 가곤 했습니다. 그 분은 기도하자고 하면 벽으로 몸을 돌려 그곳에 대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 사진에 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은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 맥카피 선교사님께 침례 받은 것이라며 구원의 증거를 댔습니다. 암흑시대에 면죄부를 들어 자신이 문제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그렇습니다. 내가 잘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7-9)”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해주신 것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천국에 간다면 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긴 했지만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 친척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진실히 주님을 영접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모든 병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그날에 주님과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사람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섬겼는지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각각 자신이 행한 것이 선악 간에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원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 살았는지 어떻게 행했는지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를 애썼는지, 믿는 자처럼 살았는지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처럼 된다는 기쁜 소망도 있고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온전히 예수님 앞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불신자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을 보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완전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2-14)” 그는 온전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님들도 그렇게 하십시오. 내 주변에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처한 환경에서 얼마나 닮아가며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닮아 가시고 계속해서 본을 보이도록 노력하십시오.

장모님이 89세이신데 치매가 점점 심해지셔서 대부분을 다 잊어버리셨습니다. 식사하시는 것과 텔레비전 보는 것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생각합니다. 텔레비전만 껐다 켰다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은 예수님처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십시오. 치매로 정신을 완전히 놓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으로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십시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시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안 좋은 점만 얘기하지 마시고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맛있는 것을 챙겨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각기 다릅니다. 그 와중에 용서하고 친절하고 어떻게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삶입니다. 유평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참 많이 닮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