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본문 : 골로새서 1장 15~20절

설교자 : 최종혁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그런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예수가 최고인지 누가 모르냐!’고 반문하면서 좀 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자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에 예수님에 대한 책입니다. 구약에서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신약에서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럼 성경은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실제로 사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실제적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이론적인 책일까요? 그냥 지금 사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잘, 지혜껏, 힘껏 살면 되는 것일까요? 정말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가는 데만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그냥 ‘예배 시간’에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에만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고 실제로 살아갈 때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곧 예수님으로 ‘충분함’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살 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생을 누리는 삶,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위대하심, 그분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 실제적으로도 직장과 가정에서, 교회에서 등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로 교회를 핍박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여러 방법 중 현재까지 그 효과가 입증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충분성을 구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놀랍고 위대하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생각해 봐야하고 이런 것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예수님 말고 다른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적 사상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은 맞는데, 그 외에도 이런 저런 것들도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무언가를 더 쌓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 혹은 한 차원 더 높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처럼 말했습니다. 후에 영지주의라고 알려진 이단적인 사상의 싹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너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의 실제 삶도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골로새 교회와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다들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또 다른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지혜가 필요하고 사랑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상은 이상이고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제 삶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으로는 충분하지 않아.”라고 삶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곧 예수님으로 충분함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부분을 살펴 보기 원합니다.

본문은 간단히 말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분하기에 따라서 몇 가지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두 가지로 정리하길 원합니다.

  1.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15~17절)
  2. 예수님은 새 창조의 주님이시다(18~20절)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15절). 여기서 말하는 “그”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형상’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일까요? 이 말의 의미는 2장 9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예수님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거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신데 형상으로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3).

예수님을 하나님을 닮은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만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성품이 빠짐 없이 거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그 피조물 속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롬 1:20). 피조물들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예수님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어떻게 다를까요?

특별히 인간은 가장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 조차도 인간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은 될 수 없었습니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추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부분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0:30-33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맞습니다. 거짓말이고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계시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않는 분’이 맞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일 수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또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아들을 통해서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무리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많이 닮은 사람도 자신을 보면 예수님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드러내셨다는 부분보다는,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임하셨지만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그분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단지 보이는 것으로는 어떤 특별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 행동, 성품에서 하나님이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설명합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예수님이 첫 번째 피조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나신”은 시간적으로 최초의 출생을 의미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지위나 신분의 뛰어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 우리말의 ‘첫째’도 비슷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 순서상 첫 번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최고, 으뜸의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신분 상 뛰어나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내가 또 그(다윗)을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시 89:27)라는 표현은, 단지 시간적으로 먼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께 특별하고, 다윗이 모든 왕들 중에서 하나님께 특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이 피조물 중에 가장 먼저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럼,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16절) 창조한 사람은 만물이 아닌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16절과 17절에서 계속해서 ‘만물’과 예수님을 함께 언급하며 그 관계를 말합니다. 16절에서는 만물과 예수님을 창조 사역의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만물은 그“에게서” 혹은 그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 밖에서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관계없이 창조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혹은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 사역에 있어 성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작정하시고 계획하셨다면, 그 일을 실행하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성자)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은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요한은 또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물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존재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면 ‘창조된 자’이고 그렇다면 나의 존재 목적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입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과 만물의 관계는 이렇듯 명확합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나에게 속한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내가 원하는 목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만물에 대해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16, 17절에서 저자가 반복해서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만물’입니다. 풀어 쓰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만드셨고 그분을 위해서 있다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에 포함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물에 포함됩니다. 하늘과 땅이니까 바다에 있는 것은 빠지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적인 표현으로서 모든 우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든지 볼 수 없든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 우리가 밤하늘에 보는 수많은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의 낮을 환하게 비추고 온기를 전달해 주는 태양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가 먹는 식물과 동물을 자라게 하는 비도 포함되어 있다.
  •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포함되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예수님이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 중에서 바울은 특별한 존재들을 언급합니다.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비슷한 표현이 2:15에도 나옵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냥 읽으면 인간 왕들, 정치지도자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세상의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표현은 ‘천사들’의 여러 범주를 지칭합니다. 아마도 천사들의 체계를 지칭하는 표현일텐데, 성경에서 딱히 어떤 순서를 찾기는 어렵습니다(cf. 롬 8:38; 엡 1:21; 벧전 3:22).

그럼, 바울이 여기서 갑자기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뒤에서 이런 천사들을 십자가로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고 말하며 ‘천사 숭배’(골 2:18)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들어왔던 잘못된 사상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혹은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천사들 중에 뛰어난 천사라고 주장하는 이단적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고, 바울은 절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편지의 시작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만 최고라고 생각하다가 다른 천사들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이단사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천사와 다릅니다. 천사는 ‘만물’에 포함되지만, 예수님은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다시 이렇게 정리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7절)

예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창조되기 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그분이 곧 창조주이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요 1:1-2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아주 오랜 옛날)에, 영원에 있느니라

단지 먼저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만물’ 즉 피조물의 일부가 아니라는 말이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피조물과 창조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께 붙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만물을 붙들고 계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움직이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계속해서 그들을 붙들고 운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멈추시면 만물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크게는 거대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별들을 정확하게 운행하게 하시고, 작게는 작은 먼지, 분자, 원자 하나까지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라고 할 때, 그저 나를 만드시고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위대하심, 다르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창조주시고 절대적인 주권자이십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위대한 존재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 어떤 지혜보다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이런 분을 두고 다른 무언가를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다른 무언가를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피조물로 창조주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죄의 근본에 있었습니다(롬 1:23. 25).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이 여전히 같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분으로 충분함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좀 더 믿는 자와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창조의 주님이시다(18~20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18절)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이어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물의 창조주에서 교회의 머리로 범위가 좁아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18절 끝이나 20절 중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모든 만물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끝이 날 것입니다. 사실 15~17절까지 말씀만 보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선하신 예수님께서 주권자이신데, 어떻게 이 세상에는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을까?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수많은 악한 일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주권자이심은 사실입니다.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모르시는 일,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분의 통치에 반기를 든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탄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른 우리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버려 두시고 허락하신 상태입니다.

죄가 피조물 안에 들어 왔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죄로 인해 망가지고 뒤틀린 모든 것들이 바로 잡힐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때가 옵니다. 궁극적인 완성은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의 핵심이 예수님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 승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일에 동참할 자들이 바로 지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합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물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 회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본이 되시고 주인이 되신 것처럼,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머리”, “근본”, “먼저 나신 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신약 성경은 교회를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건물이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중 바울이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한 표현은 ‘몸’입니다. 교회는 어떤 기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각자가 다르지만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이 표현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여기서 예수님을 그 몸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과 머리의 관계입니다.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머리가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골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몸에 모든 필요를 머리가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의 모든 필요도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에 하나의 머리가 있는 것처럼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예수님이십니다.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반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을 통해 채워야 할 어떤 필요를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고 있다면 어떨까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해서 어떤 필요는 다른 사람을 통해 채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합니다. 충분합니다. 그것이 19절에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분이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근본이시요

예수님이 교회의 시작이십니다. 친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시작이십니다. 우리 생명의 시작이시고 진정한 삶의 시작이십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먼저 나신 이”는 15절에 나온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고 동일한 의미입니다. 순서상 먼저가 아니라 가장 뛰어나고 특별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부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에도 있었고, 예수님도 죽은 자들을 살리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부활처럼 믿는 자들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으뜸됨’입니다.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단지 ‘교회’의 으뜸이 아니라 ‘만물’의 으뜸이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미 으뜸이시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앞으로 진정한 으뜸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해서 일어난 세력들을 지금은 허락하고 계시지만,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으시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이 되실 때가 옵니다.

엡 1:20-22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cf. 빌 2:9-11)

비단 믿는 자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 위에 예수님의 주권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만의 으뜸이 아니라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18절 말씀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시고 근본이시고 부활하셔서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일, 즉 성육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속 사역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9절)

모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빠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기에 예수님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에 들어온 이단적 사상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여러 존재들을 통해 그 신성을 나타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섬기지만 여러 뛰어난 천사들도 섬겨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합니다. 다른 어떤 통로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절)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 말했던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만물의 창조주, 주관자가 만물을 그 발 아래 무릎 꿇게 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 부활이라는 것을 통과해서 그렇게 하실까요? 그냥 무릎 꿇리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해야 한다는 것은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원하셨습니다(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와의 싸움을 끝내고 이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발적 평화가 있고 강제된 평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무릎 꿇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교회의 으뜸이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실 것입니다.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하고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 시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 가운데 그렇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심판의 고통 가운데 그렇게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으신 분들은 늦기전에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미 예수님을 지금 주로 고백한 자들은 예수님이 새 창조의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살리셨고 구원하셨고 지금도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아닌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순종과 그분으로 인한 만족이 필요합니다.

 

도전

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가? 누가 우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였는가? 누가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고 있는가? 누가 만물의 존재 목적을 제시하는가?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 교회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는가? 누가 교회의 시작이 되어서 교회를 존재하게 하셨는가? 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서 모든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그 발 아래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가? 누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가? 예수님이십니다.

복수정답도, 유사정답도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질문의 유일한 답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으로 충분하십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위대한 분이시라면 그분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다른 즐거움, 다른 만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위로도 지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살아가는 다른 방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1:16절). 우리는 “그 안에서” 구원 받았습니다(1:14절).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2:6).

특별히 우리는 교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고,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기뻐하려 하고, 그리스도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가 위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하는 복음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 부모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자녀가 따르겠다고 말하겠습니까? 오늘날 복음이 힘이 없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같아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그분으로 충분함을 인정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가운데 선포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