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제나 회복을 추구하라

본문: 로마서 12장 18절 외

설교자: 최종혁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성경에는 많은 명령들이 주어져 있고, 그 명령들에는 우선순위나 경중이 없다. 즉, 이 명령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거는 최대한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거는 가능하면 지켜야 하는 것이고, 이거는 지키면 좋지만 어려우면 지키지 않아도 괜찮고 하는 식으로 성경의 명령이 주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어졌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나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동일한 무게를 가진 명령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더 잘 지킬 수 있는 명령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우리가 더 잘 지키는 명령도 있고 그렇지 않은 명령도 있지만, 명령 자체가 가진 무게감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것은 절대적이고 어떤 것은 상대적이고 하지 않다. 모두가 우리가 따라야할 명령이다.

어쩌면 방금 읽은 말씀에서 주어진 명령,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명령은 많은 성도들에게 ‘권고’ 혹은 그냥 당연한 얘기 정도로 들릴 것이다. 실제로 제일 앞에 “할 수 있거든”이 붙어 있기도 하니 더 그렇게 들린다. ‘사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싸우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 좋게 좋게 잘 지내고 싶지만 그게 안되니까 싸우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려고 하고 있고 그게 잘 안될 뿐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명령은 크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명령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 명령에서 “할 수 있거든”은 명령 자체에 대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결과에 대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명령에는 “너희로서는”이라는 말도 추가되어 있다. 결과에 관계없이 너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의미다. 풀어서 정리하자면, ‘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명령들은 단순히 내가 그 명령에 순종하면 그만이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내가 그렇게 하면 된다. 겸손하라는 명령도 그렇다. 섬기라는 명령도 그렇다. 하지만 ‘화목하라’는 명령은 나만 그 명령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화목’은 관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두 사람이 관여되어 있다. “나”는 화목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지만, 실제로 화목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때 가능하다. 즉, 관계된 사람들이 각자 이 명령에 순종할 때, 비로소 명령이 요구하는 결과의 유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 그렇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목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비슷한 말씀을 더욱 강력하게 하셨었다. 어느날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들을 금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시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막 9:40).

그러면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서로 화목하기를 추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먼저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물 한그릇이라도 주면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41절).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만약에 믿는 자 중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한다면, 즉 죄를 짓게 만든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42절). 죄는 영원한 형벌로 이어지기 때문에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빼더라도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43-49절), 형제를 그런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명하셨다(50절). 이것이 마땅히 그리고 언제나 믿는 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와 성격이 다르다고, 나와 성향이 다르다고, 무엇이든 ‘다르다고’ 배척하고 멀어지고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화목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화목하기를 추구할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먼저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또한 우리가 서로 화목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가 아니라,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해야 한다.

회복의 우선성

이 명령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용서와 회복의 문제에 있어서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용서하지 않거나 회개하지 않음으로 회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아 다른 성도를 무서운 죄에 빠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는 계속해서 또 다른 죄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죄의 문제가 없어서 용서할 일도 없고 회복할 일도 없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자신의 죄와 싸우고 연약함과 싸워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죄와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남들이 그런 나를 받아주길 기대하기 보다, 말씀에 따라 나를 변화시키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며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 심각성을 알고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그래도 죄의 문제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타깝지만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가 완전히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냐는 것인다. 그 때가 바로 앞서 살펴봤던 명령에 따라 적극적으로 회복을 추구해야할 때다. 어떤 과정을 통해 회복을 추구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먼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원한다. 우리는 반드시 회복을 추구해야한다. 지금 그렇게 해야한다.

죄로 인해서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회복을 추구하는대신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잘못 반응한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하나는 외면하는 것이다. 화를 내거나 삐지거나다. 이것은 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싸우고 힘이 없으면 외면한다. 복수할 수 있으면 복수하고, 그럴 수 없으면 혹은 굳이 그런 수고도 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피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세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개인적으로 더 많이 경험한 것은 후자다. 성도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외면하기를 택하는 경우들이 종종있다. 어떻게든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고, 그러기 어려우면 교회에서 최대한 서로 멀리 있는다. 앉는 자리도 그렇고 함께 교제해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일부러 피한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한다. 상대방이 들었을 때 내가 괜찮은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딱딱하게 필요한 말만 한다.

이런 관계의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의 문제가 두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고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 주변의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 부부 사이에 이런 문제가 생기면 모든 가족,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이 간다. 특히 교회에서 사역을 하려면 함께 해야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런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점점 본인도 그런 사역들이 불편해 지고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교회와도 멀어지고 신앙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한 두 달이 아니라, 일 이 년이 쉽게 넘어간다. 그렇게 십수년을 넘어 수십년을 보내기도 한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어쨌든 관계는 무너져있는 상태가 된다. 회복하고 싶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 있고, 결국 교회 전체를 연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무너지게 만들기도 한다. 세상 속에서 교회가 그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4:2를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두 사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것을 명했다. 둘이 대판 싸우고 술 마시면서 풀거나 혹은 그냥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교회의 인도자들에게도 이 두 사람을 도와서 빨리 문제를 해결할 것을 말한다. 특히 이들은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들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교회에 큰 악영향을 끼치고 또 다른 죄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냥 둬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되어야 했다.

예수님도 이런 관계 회복의 우선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5:23–2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배를 드리려다가도 회복해야할 관계의 문제가 떠오르면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회복되지 않은 관계는 그 예배를 뒤로 미뤄야할만큼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회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린 아이가 달리다가 넘어져서 상처가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상처가 너무 무섭게 생겨서 외면하는가? 상처를 건드리면 아플 것 같으니까 그냥 두는가? 아니다. 최대한 상처를 빨리 치료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처가 감염이 되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따라서 치료도 더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관계 가운데 들어온 죄가 만든 상처도 마찬가지다. 상처가 생겼으면 즉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치료가 길어질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늦추면 안된다. 치료를 미루면 그만큼 치료는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회복을 추구하라는 말은 지금 회복을 추구하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소극적 상황에 따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은 그만큼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회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여러 말씀들을 통해 살펴보자.

회복의 필수 요소

피해자일 때 – 용서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 말씀은 개인의 죄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치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좋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가정하고 있는 상황은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한 상황”이다. 즉, 내가 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경우다. 이 때 싸우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 형제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회복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말씀하셨다. 비슷한 맥락에서 누가복음 17:3에서는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두 말씀 다 피해자가 직접 죄를 범한 가해자를 대면하여 가해자가 회개할 수 있게 도울 것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다. 회복을 목적에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 모든 죄에 대해서 그 죄를 드러내고 잘잘못을 따지고 상대가 회개할 때까지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그냥 지내야 하는 것일까? 마태복음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먼저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을 말씀하셨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할 것을 말씀하셨다. 단계를 지날수록 사람 수가 늘어난다. 처음 벌어진 죄의 문제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특히 내가 피해자라면 그 슬픔과 억울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해서 좀 공감이라도 얻고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죄를 범한 사람을 함께 욕하면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정감을 가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죄의 영향력도 커져간다. 두 사람의 문제가 어느새 10사람의 문제가 되어 버리고 그 이상으로도 커진다. 정말 일방적으로 한쪽이 잘못하는 경우가 많이 없음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문제는 어느새 두 세력 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내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고 상대방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고, 중간에 해결해야 할 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죄의 문제는 정말 사소한 것이었을 수 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죄 때문에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어떤 문제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서 정말 신뢰할만한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죄의 영향력을 키우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죄를 쉬쉬하면서 감추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죄와 관계된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영향력은 커지고 상처도 커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단계를 밟으면서 죄의 문제를 다룰 것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나”에게서 끝내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을 찾아가서 상대하지도 않으면 죄의 영향력은 거기서 끝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상대방의 죄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그냥 덮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 죄를 덮는 것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를 드러내는데 있어 신중을 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들, 상대방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불편하고 마음 상하는 일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있다 보면 이런 일들이 많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 열 사람은 괜찮은데, 한 사람이 괜찮지 않을 수 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 중에 실수로 선을 넘는 농담을 할 수도 있다. 그게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정색을 하면서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인간 관계는 정말 경직될 것이다. 사소한 잘못들을 다 드러내서 따지고 대면하면 작은 문제가 크게 되고 오히려 죄의 영향력도 커지게 된다. 그런 죄는 내가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계속해서 ‘사소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이렇게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같은 죄여도 상황에 따라서는 덮어주어야 할 때가 있고 반대로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날선 태도를 버리고 이해하려는 마음, 용납하려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여유가 필요하다.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내가 연약한 것처럼 상대도 연약하다. 내가 실수할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실수할 수 있다. 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내가 그렇게 해주를 바란다. 아마 이런 경우에 상대도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마음으로 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마음으로 회개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죄를 대면하는 대신 덮어주기를 선택하여 화목하기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씩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고 나서도 굳이 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형제님 지난 번에 저한테 이렇게 하셨는데, 저 상처 많이 많았어요. 그래도 주님께 기도하고 하면서 형제님 용서했습니다.”라는 말을 굳이 찾아가서 하는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모를까봐 그렇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조금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다.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면 그 사람의 죄가 묻히는 것도 있지만 나의 선이 묻히기도 하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랑으로 죄를 덮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죄를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우리가 피해자로서 제일 먼저 회복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죄가 있고 그 때는 분명 죄를 대면해야 한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 말씀에서 “드러나거든”으로 번역된 동사는 “붙잡히거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가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면 드러나는 것이니까 드러나거든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사람이 죄에 붙잡혀 있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사소한 죄’라도 그것이 반복된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에 붙잡혀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죄는 그냥 덮어 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키우는 결과가 되어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은 더 큰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상대가 죄에 붙잡힌 상태라면 그 죄를 드러내야 한다. 대면해야 한다.

죄를 대면하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고 성경에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으니, 상황에 따라 우리는 지혜를 구하고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이 그렇게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즉 죄를 죄로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나단이 다윗의 죄를 대면했던 장면은 매우 극적이고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죄를 다루셨던 모습을 보면, 직접적으로 죄를 지적하기도 하셨고,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셔서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기도 하셨다. 죄를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마치 의사가 치료를 위해 환부를 드러내듯이, 함께 회복을 추구하기 위해 죄를 죄로 드러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는 피해자인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힘들게 회복을 힘써야하냐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먼저 나를 찾아와서 무릎 꿇고 빌어도 용서해줄까 말까인데, 왜 내가 그런 불편을 일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혹은 반대 극단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죄를 드러내라고 하니 제대로 드러내주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다. 조목조목 다 따져서 잘못을 가리고 만방에 그 추악함을 드러내 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죄를 대면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처럼 생각한다.

어느 쪽도 성경이 의도한 반응은 아니다. 둘 다 그 목적이 회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를 대면하는 목적은 그 사람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봐서 같은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죄의 영향력을 최소로 만들고 무너진 관계를 다시 바로 세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런 죄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서로가 회복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 일을 알리기를 사탄은 원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의 죄로 극도의 효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싸우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그냥 이 문제를 외면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게 교회 안에 작은 틈들을 만들어 놓으면 큰 댐이 작은 틈 하나 때문에 무너지듯 교회도 그렇게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확히 사탄의 계략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배운 것처럼, 우리는 피해자라 할지라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만약 죄의 문제(영향력)가 크지 않다면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사랑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조차도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회복을 추구하기를 원하신다.

가해자일 때 – 회개

그렇다면 가해자는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가해자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앞에서 읽었던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은 사실 가해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가해자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보다 회복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예배보다도 이 문제의 회복을 우선순위에 둘 것을 말씀하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와 별개로 보지 않으시는 것이다.

앞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회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랑으로 죄를 덮거나 혹은 사랑으로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 가해자가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문제의 해결은 훨씬 쉬워진다. “자, 지금부터 당신이 뭐를 잘못했는지 얘기해 줄테니까 잘 들어봐”라고 시작되는 말은 하는 사람도 어렵고 듣는 사람도 어렵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이런 것들 잘못했어. 혹시 당신에 보기에 내가 또 잘못한게 있으면 얘기해줄 수 있어?”로 시작하는 말은 그나마 쉬워진다. 우리는 가해자의 입장도 되고 피해자의 입장도 될 수 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둘 다가 된다. 그렇다면 어쨌든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회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맞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결국 죄를 대면할 때 가해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듣는 것”이다(마 18:15). 단순히 귀를 열고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죄를 대면하여 하는 말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 17:3은 분명하게 회개를 말한다.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회복을 위해 피해자가 해야할 것이 용서라면 가해자가 해야할 것은 회개인 것이다.

사실 회개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자주 사용하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왠지 좀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죄로 인해서 관계의 문제를 만들었을 때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 회개했던 사람은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다. 그것을 위해 첫째로는 내가 잘못가고 있음을 알고 인정해야 하고 둘째로는 그렇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죄를 인정하고 실제로 그로 인한 변화가 있어야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죄의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변명은 회개에서 빠져야 한다. 사과할 때 “내가 잘못했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저런 얘기를 덧붙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변호하게 될 때가 많다. 그 때 나는 마음이 이랬고 이런 상황이어서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 때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회개가 아니라 변명이나 유감 표명이 될 때가 많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의 사과문이나 입장문처럼 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상대가 기분 나빴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유감이다는 식이 된다.

제이 아담스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용서와 회개에 대한 세상의 대체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벌어진 일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만 표현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서 내 마음이 좀 그렇다는 것으로는 회복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순간의 감정은 어쩌면 그런 미안한 마음의 표현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될지도 모르지만, 죄는 여전히 죄로 남아있고 같은 상황이 되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표현은 그렇게 하더라도 죄에 대해서 분명히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거기서 돌이켜야 한다는 말이다.

후회도 회개와 유사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후회는 과거성만 있지 미래성이 없다. 후회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거짓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한다. 그런 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져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죄를 드러내어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제대로 된 회복을 경험할 수 없다. 더 쉽게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해자라면 회복을 추구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다. 먼저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죄를 범한 대상에게 회개해야 한다. 이 두 회개는 대상이 다를 뿐 그 본질은 종일하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장에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지와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나의 회개가 진실된 것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론

회복은 앞서 말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회복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 피해자는 힘든 용서를 해야하고 가해자는 힘든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야 참된 회복이 가능하다.

‘난 굳이 저 사람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 없어. 그냥 적당히 살거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를 만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나를 어떻게 파괴할지 내가 속한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파괴할지 알지 못한다. 몸 안에 죄의 질병을 그냥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이면 내가 무너지고 내가 속한 영적 공동체인 교회도 무너질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작은 자’들에 대한 염려를 표명하셨다. 부부 싸움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녀들이 되는 것처럼 내가 외면하고 있는 죄로 인해 작은 자들이 실족하여 넘어질 수 있다. 용서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회복하지 않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용서와 회개를 통한 회복이다.

다시 처음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나는 마음으로 먼저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아서 관계가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나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는데, 상대방이 용서하지 않아서 관계가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죄악된 세상을 살면서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구하고 그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겸손히 화답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서 “나로서는”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묻겠다. 지금 내가 용서하지 않고 있는 관계, 회개하고 있지 않은 관계, 회복하고 있지 않은 관계가 있다면, 언제 용서하고 회개하고 회복할 것인가? 천국에 가면? 아니면 천국에 가서도 그 사람 없는 곳에서만 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려워서? 귀찮아서? 어떻게 할지 몰라서? 두려워서? 밖에 나가기 싫으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 여러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을 이유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회복을 추구할 때다.

우리 교회가 용서와 회개와 회복이 필요 없는 교회가 되면 너무 좋겠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하는 교회, 회개하는 교회,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