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순종은 예배고, 순종이 예배다

본문: 베드로전서 2장 9절 외

설교자: 최종혁

 

‘순종은 예배다’라는 말은 우리가 순종하는 목적과 관계된 말이고, ‘순종이 예배다’라는 말은 예배의 방법과 관계된 말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목적은 예배하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예배하는 방법은 순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서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는 무엇을 더할 수 없고 뺄 수도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해당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영광스럽지 않은 하나님은 없다. 덜 영광스러운 하나님도 없다. 더 영광스럽게 되셔야할 하나님도 없다. 그런 존재라면 애초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기도 한다. 이미 온전히 영광스러우신 하나님를 우리가 더 영광스럽게 만들 수 없고 추가로 더 드릴 영광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걸까? 먼저는 로마서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묘사다. 이후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죄악된 상태, 즉 살인이나 성적인 타락, 사기, 시기, 비방과 같은 것들이 언급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일 뿐이고 그 근본에 있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알지만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허망한 생각과 어두운 마음이다. 어리석음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는 것은 먼저는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내가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명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선포하는 것과 관련된 명령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이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창조의 목적이고 따라서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최상의 의무다. 우리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곧 예배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위대하다고 말하고 찬양한다면 그것이 예배다. 모든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면 그것이 예배다. 사랑과 섭리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배다. 하나님께 합당한 모든 반응이 예배인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은 예배다

그럼, 이제 순종과 예배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순종은 예배다. 이것은 우리가 순종하는 목적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위해 순종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베드로는 구원 받은 자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표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사용되었던 표현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별하여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셨다. 그들이 특별해서 선택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복’을 약속하셨다. 이 복은 여러 물질적인 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것을 순종의 최종 목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즉, 너희가 이 땅에서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싶으면 나의 말에 순종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브라함이 복이 되어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창 12:3). 이것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이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예배할 때),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의도하셨던 모습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4:5–7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통해 다른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예배하게 되는 모습을 모세는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에게 합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잘 드러난 사건이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풍요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와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왕상 10:9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이런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셨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순종(예배)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어 우상 숭배에 빠진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해야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제사장 나라였고, 신약의 교회가 또한 그러하다고 베드로는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목적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 새로운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 즉 순종으로 달성된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 신령한 제사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13: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말씀에서 두 종류의 신령한 제사를 말한다. 입술의 열매와 손발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우리가 흩어져서 드리는 삶의 예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둘이 항상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하는 것도 아니지만, 두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드려야할 예배라는 점이다.

이 신령한 제사(영적 예배)에 대해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기록했다.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행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순종은 예배다.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린다.

베드로전서에서도 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베드로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음을 말하기에 앞서 이미 그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했다.

벧전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모든 악한 것을 버리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것을 버려야지’라는 생각이나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흙탕물이 터져나오는 수도꼭지를 손가락으로 막으려는 것과 같다. 잠시 막을 수는 있겠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흙탕물은 막을 수 있어도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는 없다. 왜 흙탕물이 나오고 있는지 원인을 찾아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씻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것을 버리는 것 뿐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것이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그 말씀에 따라 먼저 변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내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꾼다. 그렇게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최종 구원에 이를 때까지 영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말이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는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된다. 순종이 예배인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그런 삶은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한다.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순종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 순종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종하려는 동기도 이것이 되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얘기같지만, 세상의 사상에 물든 우리의 가치관은 이 당연한 얘기를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다. ‘순종’은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도 내가 원하는 무언가여야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복을 얻는 것을 순종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큰 착각은 순종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일 것이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이 이런 착각에 바탕해서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신이 자비를 베풀어 준다거나 혹은 그 나머지를 채워서 구원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비슷한 사상이 기독교 안에도 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래도 내가 뭔가는 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구원 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자기가 뭔가 잘한 것 같으면 구원의 확신이 생겼다가 그렇지 않으면 금방 확신이 사라진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마치 구원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순종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뭔가는 해야지’가 겸손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교만한 말이 없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시는데, 내가 이것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온전한 순종에 내가 무언가를 더해야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신 구원에 절대로 내가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 구원은 내가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순종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실 구원 받지 않았다면, 어떤 순종도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내가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들이 사실 순종이 아닌 것이다.

구원이 아닌 가정의 화목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순종의 댓가로 기대하는 경우도 많다. 물질적인 풍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복은 순종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실 수 있는 것들이지, 그것 자체가 순종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언제든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라. 순종하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바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만큼 순종했던 사람이 없지만, 바울만큼 고난을 당했던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어떤가. 요한이 그렇게 비참하게 참수를 당한 것이 그의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의 성도들도 왜 선한 자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순종의 결과가 항상 그들이 생각했던 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만큼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산 사람이 없다. 그런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순종이 원하는 일의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그럼 뭐하러 순종하냐’고 물을 법하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질문을 한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진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얼마나 열심히 섬겼고, 얼마나 헌금도 빠지지 않고 했고, 얼마나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고, 얼마나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나에게 주어진 것이 이게 뭐냐고 따진다.

삶의 고난을 만날 때, 그러 인해 연약해졌을 때, 그렇게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윗도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계속해서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세상에서 잘못 배운 가치관 때문에 비롯되는 일들이다. 우리는 내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상황에 적용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도 이 정도는 해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때로 불순종한 자에게도 복을 주신다. 그것이 은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바로 죽지 않고 자녀를 낳으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순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반석에서 물이 나왔던 것도 모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먼저 순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그것은 복일 수도 있고 복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욥의 말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욥 2:10). 중요한 것은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는 것이다(욥 1:21).

이것이 순종은 예배라는 말의 의미다. 내가 순종하는 것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는 것이 중요하다. 순종의 결과가 내가 볼 때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으로 순종할지 말지를 결정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종은 예배다. 순종은 예배하려고 하는 것이지 복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을 통해 내가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순종으로 칭찬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종에 대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당연한 댓가가 아니라 은혜이고 따라서 감사해야 한다. 순종은 예배이기 때문이다.

순종이 예배다

다음으로 순종과 예배의 관계에 있어 생각해 볼 것은, 순종이 예배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우리는 순종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으로서 피조물들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 자기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받으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다면, 바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14:17–18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영광을 얻으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고 심판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와 그의 군대가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짧게 언급한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다(민 20:8).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모으고 이렇게 말했다.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는 마치 자신이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주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던 방법으로 반석을 두 번 쳤다. 민수기 27:14에 따르면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었다. 불순종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순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20:12–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난 것에 대한 부분이다. 모세는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하나님의 거룩함은 나타난 것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거룩함은 나타났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공급하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만약 순종이 아닌 결과가 예배라면 이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앞서 바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니 바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결과가 예배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과가 예배가 아니라, 순종이 예배다. 모세의 불순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지만, 그 순간 모세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바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예배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예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우리가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도 세상의 사상이 흘러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순종은 예배다”에서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실용주의적인 사상이 문제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결과가 좋기 때문에 과정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상을 따라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의 음악을 따라하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교회 안에 계속해서 도입한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이것이 교회의 예배인지 어떤 콘서트나 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들도 많이 생긴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이 실제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을 높이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어쨌든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지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주변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케팅의 도움을 받고 경영학의 도움을 받는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원리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을 통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지만 나는 예배하지 못했을 수 있는 것이다. 순종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방법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더 좋은 방법이 사람에게 있을리 없다.

이 원리는 공적인 예배 뿐 아니라 삶의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성경의 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남녀의 모습, 가정의 모습, 자녀 양육의 모습이 지금 성경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 내 삶을 즐기는 것, 남보다 나의 행복을 항상 먼저 추구하는 것,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 사랑하기보다 사랑 받으려고 하는 것 등은 세상에서는 기본 상식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과에 앞서 지금 당장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삶의 목적이 예배이고,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우리가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순종이 예배다.

도전

순종은 예배고, 순종이 예배다. 순종의 목적은 예배가 되어야 하고, 예배의 방법은 순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 원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네 가지에 유의하라.

첫째로는 무엇보다 말씀(성경)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말씀을 주셨다. 그 안에 거짓이나 오류가 없을 뿐 아니라, 이 말씀은 충분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지 않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해서 이 확신이 흔들릴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주실 것이다. 따라서 먼저 중요한 것은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말씀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아무리 정확한 설명이 담긴 설명서가 있다고 해도 읽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읽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석해도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류가 없이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도 우리가 읽지 않고 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의미를 찾으면서 읽는다면 성경을 읽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되 바르게 읽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어려운 부분도 있고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으셨다. 확실한 것부터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점점 성경의 메시지가 분명해 질 것이다. 때로는 그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상식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닐거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셋째로 그렇게 읽은 말씀에 정확히 순종해야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유혹이 많다. 아예 순종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정확히가 아니라 대충 순종하고 싶을 때도 있다. 다른 방법으로 순종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순종이 예배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것이 내 삶의 목표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넷째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 순종은 예배다.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순종할 이유는 충분하다. 순종의 결과가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삶은 오히려 어렵고 힘들어 질 수 있다. 아니,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크다. 건강이나 사업, 관계 등 여러 면에서 더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결과에 관계 없이 하나님은 나의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는 긍휼을 얻지 못하다가 이제는 긍휼을 얻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된 자들이다. 긍휼을 입은 자들로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순종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그것이 또한 순종의 동력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 순종의 결과로 다른 무엇을 기대하지 말고, 순종할 수 있는 것 자체를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 예배는 우리의 의무이지만 또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확신 가운데 순종으로 우리가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