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13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에 쓴 두 번째 서신이다(A.D.55).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고(A.D. 50,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 행 18장), 18개월간 생산적인 사역을 마친 바울은(18:10),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다가, 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에베소에 새로운 선교 본부를 세우고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행 19장). 

고린도 교회에 첫 번째로 쓴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고(고전 5:9),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그들에게서 온 편지에 답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글로에)에게 직접 들은 고린도 교회 상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한 마디로, 고린도서는 교회를 함께 건강하게 견고하게 세우기 위한 편지다.

본문은 편지의 인사말에 해당한다. 각각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 관한 간략한 설명, 그리고 짧은 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찾기 원한다: 1) 바울은 무슨 권리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으려 하는가? 2) 고린도 교회는 어째서 바울의 권면에 따라야 하는가? 3) 결국 누가 교회를 굳게 세우는가?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일꾼의 역할과 교회의 정체성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누구인지 성경적인 관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1. 부르심을 받은 일꾼(1절)

바울은 무슨 권리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으려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내세울 만한 권위가 제법 많았다. 먼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이었다(4:15). 그들을 양육한 첫 목사가 바울이었다(이후 아볼로, 3:6). 고린도에 있으면서 바울이 수고한 것과 감수한 것을 가지고 호소할 수도 있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다: ‘18개월간 낮에는 천막을 만들어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고, 온갖 비방과 핍박을 받으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거기서 쫓겨났을 땐,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여 수많은 고린도 사람을 믿고 세례받아 교회로 자라게 만든 나 바울’(행 18장).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충분했다. 고린도 교회는 더 이상 바울의 리더십 아래 있지 않았다. 성도들은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로 찢어져 있었다(1장).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지 않는 교만한 무리가 교회 내부에서 성도를 이간질 했다(4장).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시시콜콜한 이유로(독신, 자비량) 그를 비판하는 성도들도 있었다(9장). ‘바울이 글만 그럴듯하지, 직접 보면 별볼일없고, 설교도 잘 못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방했다(고후 10:10). 

이 상황에서 바울이 소스데네를 대필자로 삼아(행 18:17) 편지를 쓴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다. 그도 한 사람으로서 교회 일부가 자신에게 적대적이고 자신의 리더십을 부정하거나 인격적으로 무시할 때, 교회에 꼭 필요한 권면을 이토록 담대하고 권위 있게 써 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으려 한 것일까? 그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1절).

이 짧은 소개 글로 바울은 자기 소명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자천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추천된 일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이다(고후 3:1; 갈 1:1). 그가 전달하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과 교회를 바로잡는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이론이나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 대사 즉 사도였다. 

바울은 본래 가말리엘이라는 위대한 랍비 밑에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예수를 멸시했다. 유대인을 사칭하는 그리스도인을 매우 혐오하여, 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옥에 가두고 멸절하는 데 대단한 열심이 있었다. 그렇게 다메섹에 숨은 그리스도인을 찾아가는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나주셨다. 그분의 사도, 즉 메신저로 부르셨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로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이것이 바울이 담대하게 고린도 교회를 권면한 권위의 근원이다.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일꾼은 소명을 매우 엄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시면서,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라고 명하셨다(겔 3:17). 그리고 마땅히 전해야 할 바를 전하지 않을 때, 그 죗값을 일꾼에게서 찾겠다고 경고하셨다(겔 3:18-21). 부르심을 받은 일꾼은 소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전달하는 메시지를 성도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리더십에 반항하거나 무시한다 해도, 인격적인 모욕과 비방이 낙심하게 만들 때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대신하여 깨우치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고백했다(갈 1:10). 물론 주가 맡기신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해야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먼저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 뜻대로 할 때만, 그분의 백성도 은혜를 누리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개혁파 국교회 설교자 찰스 시므온은 캠브릿지 교회 자기 성도들에게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예배석 문을 잠그고, 창문에 돌을 던지는 등 노골적인 적대감을 늘 일꾼에게 보였다. 10년 이상. 시므온은 40년 동안 사랑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진리로 그들을 깨우쳤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바울도 그랬다. 그는 교회를 향한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쓴 편지를 통해 그들을 깨우쳤다. 그들을 근심하게 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 넘치는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음을 그들이 알기를 간절히 원했다(고후 2:4). 모든 부르심을 받은 일꾼이 그래야 한다. 그분을 대신하여 깨우치고, 그분의 사랑으로 해야 한다.

2. 부르심을 받은 성도(2절)

자,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어째서 바울의 권면에 따라야 하는가? 왜 바울의 권면은 옵션이 아니라 명령으로 봐야 하는가? 조언이 아니라 반드시 따라야 할 법으로 여겨야 하는가? 바울이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볼 때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2절).

먼저 그들은 지역적으로 고린도에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였다(단수). ‘교회’라는 말(에클레시아) 자체가 ‘불러낸 무리’를 의미하고, ‘하나님의’라는 수식어는 이 교회를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들을 무엇으로 부르셨는가? 이후에 이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성도라 부르셨다. 연약하고 완악한 면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온전히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다(완료된 사건).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그들을 계속해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완료된 사건이 가져온 현재의 변화). 

바울은 고린도 성도만 이런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2절). 고린도뿐만 아니라 각처에서(전 세계 모든 지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민족, 인종, 성별, 나이, 문화, 나라,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우리의 주가 되신다. ‘예수를 주로 부른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마 7: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주를 경배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께 순종한다는 것을 함의한다”(아놀드, 65p).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성별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경배하고 순종하도록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부르신 자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린도는 폐허가 된 곳을 로마 황제가 재건한, 한마디로 뜨는 도시였다. 지리적 위치와 조건 때문에 무역과 상업의 발전과 함께 엄청난 부를 가져왔고, 밀집된 지역에 몰린 수많은 인구가 온갖 우상숭배와 오락에 젖어있었다. 높은 신전에는 천 명에 이르는 창녀가 있었고, 밤에는 도시로 내려와 사람들을 유혹했다(‘고린도인이 되다’, 코린티아조마). 로마의 자유인과 퇴역 군인, 유대인을 비롯한 외국인 난민들과 노예들이 뒤섞여 있었고, 모두 이 성장하는 도시를 통해 자기 배를 불리고 이름을 내고 욕구를 채우기를 갈망하게 만드는 곳이었다(개인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팽배). 문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런 세속적인 문화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 되려 하지 않고, 자기 기쁨을 위해 분열되었다. 성적인 범죄를 치리하지 않고 무마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오늘날 교회도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속적인 생각과 옛 사람의 욕구에 따른 결과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그런 면에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성화를 위한 서신이다. 개인적인 적용도 가능하지만, 교회가 함께 거룩하게 지어져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일꾼이 전달하는 주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야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6). 이렇게까지 철저한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의 복종은 곧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는 교회의 마땅한 의무이고, 복종하지 않는 것은 그 부르심을 내팽개치는 무서운 배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라고 불렀다(히 6:4-6).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낸 자들이라고 불렀다(요일 2:19).

주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0:27). 주께서 부르신 자를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주님의 양이 아니다. 교회에 있지만(물리적으로) 교회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신분적으로). 반대로, 참 교회는 목자를 사랑하여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 14:23). 목자의 음성이 분명할 때, 따르지 않는 것은 그분의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결코 아니다.

3. 부르신 이의 은혜와 평강(3절)

마지막으로 바울의 축원을 살펴보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반드시 자녀에게 넘치도록 은혜와 평강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 13:11).

바울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평강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 있는 교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고전 1:4):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그러므로 교회가 온갖 세속적인 생각과 욕구를 버리고 온전히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반드시 넘치도록 주어질 것이다. 바로 거기에 모든 교회의 소망이 있다. 고린도 교회 처럼 심각한 문제가 가득한 교회라도.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셨다. 일꾼과 성도 모두 부르심을 받은 것에 충성할 때,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