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한다(Love does)3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설교자: 최종혁

사랑은 되는 걸까, 하는 걸까? 사랑은 저절로 되는 걸까, 아니면 노력해야 하는 걸까? 개인에 따라서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에 따라서 답이 다를 수 있지만, 성경의 답은 사랑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까지 ‘노력’을 해야하는거면 그건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을 고려해 보면 그 생각이 틀리지는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에는 보통 ‘좋아하는 감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악을 행하고 해를 가하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사랑하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 싫으면 싫어하면 그만이다.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싸워서 누가 이기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있다.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 형성된 특별한 관계가 있을 때 그렇다. 대표적으로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 그렇고, 언약으로 묶인 부부가 그렇다. 여기에 아주 오래된 (그래서 끊을 수 없는) 친한 친구 관계 등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는 ‘좋아하는 감정’과 관계 없이 사랑해야 하는 관계다. 물론 좋아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좀 더 쉬워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애초에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좋아하려고’도 노력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이 사랑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노력의 유일한 이유다. 자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없다.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부부 사이도 그렇다. 처음에는 마음에 드는 것, 내가 호감을 가질만한 것 때문에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하고 부부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매력으로 느꼈던 것이 오히려 싫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이미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 사이의 사랑이 이에 가깝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서로 ‘좋아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해서 항상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고는 명령한다. 감정은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가족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좋아하려고도 노력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믿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이미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형제 사랑에 이르렀다. 이미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인으로서 서로에게 실수한다.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냥 그 사람이 별로다. 어떤 성도는 나하고 너무 잘 맞는데, 어떤 성도는 사회에서 만났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 같다.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이 서로에게 있는 것이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좀 덜 싫어지고, 그러면 좀 더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가 좋아하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사람까지도 좋아할 수 있게 되면, 그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은 ‘성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이기 때문에 때로는 정말 ‘사랑한다 치고’ 행동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정말 사랑하기 어려울 때 그렇게라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도는 그렇지 않다. 사랑한다 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구원 받았다면 사랑하기에 이른 것이 맞고,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

이타심이 사랑의 핵심이다

4-7절 말씀을 통해 그런 사랑이 우리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살펴보며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오른뺨을 맞아도 되갚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왼뺨을 돌려 댄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앙갚음 하려 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재능이나 성취와 관련된 부분들이다. 사랑은 남의 재능이나 성취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나의 재능이나 성취를 드러내고 뽐내려 하지 않는다. 나의 권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겸손히 행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인다. 사랑은 그렇게 행한다.

오늘 나눌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 두 행동은 사랑의 근본(핵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나보다 남을 더 중요시 하는 것,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 바로 이타심이다.

사실 4-7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에 대한 나열은 각각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각 단어가 강조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다른 모습들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지개를 7색깔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보면 색이 나누어지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이어서 어디까지가 빨간색이고 어디부터가 주황색인지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굳이 경계를 명확히 해야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 하는 일들일 뿐이다. 사랑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뿐이다. 그런데 굳이 그 다양한 모습을 성경이 말하고, 이렇게 설교를 통해 하나씩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함을 알고 그렇게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막연하게 ‘뭐든지 사랑으로 해야지’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럴 땐 이렇게 해야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여튼, 그렇게 다양한 사랑의 모습(행위)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핵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4절 말씀만 놓고 보면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만에 반대되는 겸손이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게 한다. 오래 참고 온유한 것도 겸손하신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은 겸손보다 더 사랑의 본질(핵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이타심을 말하는데, 이타심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도 이타심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기심의 정반대다”(이타심)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잘 설명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제되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며 서로 하나될 수 있는 자들이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명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그러했던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고상한 원리들은 즉시 상실되고, 인간 영혼의 탁월한 부분들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인간의 영혼은 점차 작은 공간으로 줄어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만을 아는 작은 공간에 갇혀서 칩거(蟄居)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강력한 혈액 응고제와 같이 사람의 영혼을 자기중심이라는 매우 좁은 차원으로 오므라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료를 생각지 않고 자기 속으로만 젖어 들었습니다. 좁고 협소한 자기중심적인 원리와 감정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자기 사랑이 그의 영혼에 절대적 상전(上典)이 되어 버렸습니다. 보다 고상한 영적인 원리들은 날개를 치며 멀리 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모두 나만 생각하고, 나를 가장 중요시 하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나만 아는 편협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자기가 왕인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구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다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신 일이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나만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본다. 내가 중심인 세계에서 나와서 함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죄 때문에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단지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랑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

무례히 행함과 자기 유익을 구함은 이기심의 결과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면,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이기심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이기심에서 나오는 행동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무례히 행하는 것이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된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고 상대를 ‘고려(배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끄러운 일을 하고 또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을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이 사람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가 그것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 하거나 혹은 수치를 당하는 등 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아도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 그 사람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 정말 순수하게 무례한 일을 할 때가 있다. 어른이 그렇게 하면 정말 무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일들을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한다. 엄마 아빠가 자는 방에 맘대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침대까지 기어 올라온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집에서 싸운 얘기를 학교 선생님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한다. 악의는 없다. 그냥 하는거다. 우리 아빠는 뱃살이 엄청 많다고 우리 엄마는 방구를 잘 뀐다고 친구들에게 말한다. 놀랍게도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귀엽게 보이긴 하지만, 무례함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기도 한다. 상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치고 가르쳐야 한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어른들이라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이들처럼 정말로 몰라서 남에게 무례하게 행할 때도 있지만, 알면서도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하는 얘기를 읽다보면, 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상대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내 의견이 다를 때 정중하게 반론을 제기하기 보다, 그냥 비웃고 조롱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올바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너는 뭐냐는 식으로 의견을 무시할 뿐 아니라 사람을 무시한다.

특히 무례함은 어떤 면에서든 상하 관계가 있을 때 드러나기 더 쉽다. 서비스 하는 사람을 하인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죽하면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면 지금부터 상담할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멘트가 나오겠는가. 나이가 벼슬인 사람도 있고, 자신의 위치가 벼슬인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명백한 잘못도 사과하지 않고, 당연히 상대방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가정한다. 반대로 상대가 잘못했을 때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모임 시간에 내가 늦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늦으면 불 같이 화를 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너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상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무례함이다.

또한 무례함은 내가 먼저 무례한 일을 당했을 때는 거의 반사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에게 무례하게 행한 사람을 내가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말에 내가 기분이 나빴으면, 상대방도 최대한 그렇게 기분 나쁠 수 있게 되돌려준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도 한다. 지금 나는 무례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기분이 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 상대방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례함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중요하고 나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 우리는 나의 유익을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둔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내가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실례를 보자.

이기적인 교회, 이타적인 사랑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5장)

고전 5:1–2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례한 행동이다. 아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을 가장 중요시 했기 때문에 벌어진 죄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교회가 그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않고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교만’의 문제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기준보다 자신들의 기준을 따르며 죄를 대면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죄를 대면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묵인했거나, 아니면 그렇게 했을 때 잃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동기는 동일하다. 이들은 죄를 범한 사람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했다는 것이다. 편함을 추구 했든지, 아니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무언가(재정?)를 추구 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인데, 교회는 자기 유익을 위해 그것을 외면했다.

여기서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은 자신이 잃을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죄를 대면하는 것이다. 죄를 들춰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도 딛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교회의 지체로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무례하지 않게 죄를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6:1–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죄를 감싸주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그 의미가 죄를 그냥 묵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죄는 말 그대로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죄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처럼 먼저 드러내서 치료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덮어 주어야한다. 있는 상처를 그냥 감춰서 안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통해 상처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좋지 않지만, 상대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 입장에서는 왜 더 아프게 하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 과정에서 무례하지도 말아야 한다. 남의 죄를 대면하면서, 나는 이런 죄를 대면하는 사람이니까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정죄하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죄에서 떠나 주님을 닮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죄를 지적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으로 죄를 대면해야 한다.

교회 안의 송사(6장)

고전 6:6–8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형제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까지 가져가서 끝까지 싸웠던 이유는 결국 양자가 모두 자기 유익을 끝까지 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의를 당하고 싶지 않았고 속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고 속여서라도 자기가 이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에게 무례하게 행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으로 행했다면, 이렇게 끝까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 손해를 감수하며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 중 한쪽이라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면,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데까지는 못가더라도 최소한 끝까지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은 교회 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내가 틀렸다고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그 결과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게 된다. 누구 한 사람이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의 유익을 구한다. 사랑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8장)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0–11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 숭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이라도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분명히 말했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다. 입장 차가 있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조차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도 그냥 음식이니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 음식을 먹었을 때, 그런 동일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성도가 양심을 거스르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었다. 바울은 그것이 “형제에게 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12절).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경우는 꽤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은 형제는 바른 믿음(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지식 자체가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지식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이 사랑 없이 행해졌다는 점이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만 했다. 무례하고 자기 유익을 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진리는 오히려 다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건 그 사람 문제지”라고 말하기 쉽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결국 그 사람도 바른 지식을 가지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배워야 하고 마음을 넓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모두가 바르게 알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따라 행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했다(고전 8:13). 이것이 지식을 사용하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서로가 가진 지식으로 서로를 정죄하거나 실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그러기 위해 평생 고기를 먹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해로운 모임(11, 14장)

고전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전 11:20–22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함께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은 무례하게 행동했다. 자기 유익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먼저 많이 먹어서 배부르고 취할 정도였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했다.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의 경우도 그렇다. 고린도 교회는 서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려고 했다. 다른 형제가 이미 말하고 있든지 말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말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또 자기 말은 끊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해야 했다.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내가 말을 해야할 것 같고 모두가 내 말을 들어야할 것 같을 때라도 말하기는 더디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무례하게 반응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무례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모임라면 차라리 모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런 모임은 오히려 해롭기 때문이다. 잘하는 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로 교회는 세워진다. 사랑은 나를 내세우기 위해, 나의 유익을 위해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사도의 본

아마 이런 무례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행동의 극치를 볼 수 있는 예는 사사기 19장에 기록된 어떤 레위 사람과 그의 첩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행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 유익만을 추구했다는 말이다. 불량배들은 레위 사람을 원했고, 레위 사람은 그들에게 자신의 첩을 내주었다. 결국 그 첩은 밤새 능욕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심지어 그 죽음에 애통하는 사람도 없었다. 철저하게 무례함을 당한 것이다.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이 당하는 무례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던 유대인들도 그렇게 남에게 무례하게 행했다. 그들은 일부러 병자를 데려다 놓고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안고치는지를 지켜보기도 했다. 예수님께도 무례한 일이었지만, 그 병자들에게도 무례한 일이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었던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여인이 당하는 무례함이나 수치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신나서 그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왔을 것이다. 자기 유익을 위해 무례하게 행했던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고 따라서 무례하게 행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피곤하실 때도 자기를 찾아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집에 보내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직접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귀찮게 할만한 어린아이들도 쫓아내지 않으셨다.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셨지만, 그것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셨다. 오히려 간음 중에 잡혀왔던 여인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은 무례하게 행하던 그들의 죄를 드러내셔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다.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무례함을 당했을 삭개오를 예수님은 바라보시고 그의 집에 일부러 머무셨다.

어리석었던 제자들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반복해서 가르치셨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에게까지 그렇게 하셨다. 무례하지 않으셨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내용을 보라. 예수님은 간절하게 십자가를 피할 수 있기를 구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이 정말로 원하셨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구하셨다. 아버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들을 예수님은 사랑하셨기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유다가 군병들과 예수님을 찾아와 잡으려고 할 때도 예수님은 같은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 끝까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렇게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셔서, 우리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 그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예수님의 본이다. 사랑의 본이다.

나에게만 관심이 있으면 주변의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의 아픔이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의 수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에게서 눈을 떼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 우리는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을 본받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고전 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다. 우리가 살아야할 삶이다. 우리가 해야할 사랑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짚어보자.

도움

먼저는 내가 어떻고 그 사람이 어떻고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나와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내가 어떻게 대할지를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신기하게도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배려심이 떨어지고 나의 유익을 좀 더 생각한다. 그러다가 결국 무례하게 행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행동을 한다. 사랑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가족들, 친구들, 특히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그런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저 사람에게는 이렇게 할 수 있고, 저 사람도 이 정도는 받아줘야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이타심의 핵심은 다른 사람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두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내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마음에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해야 한다. 그럼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 사랑이 된다.

물론 무례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잘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필요도 있다. 어떤 문화에는 아무 문제 없는 행동도 다른 문화에서는 무례한 일이 되는 것처럼, 개인도 그렇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문제 없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무례하게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 말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한다. 상대의 기분, 상대의 감정, 상대의 생각,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정말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랑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내가 그 사랑을 받았고, 내가 사랑해야할 그 형제도 그 사랑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그 형제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그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랑을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님은 하셨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이 사랑이 조금은 쉽게 느껴질 것이다.

다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제자들이고, 우리가 바로 그 제자다. 갈라디아서 5:24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내 유익을 간절히 구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된다는 마음의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릴 때가 있다. 이 정도 참았으면 이제는 저 사람이 상처를 받든 말든, 한번 제대로 폭발시킬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우리의 정욕과 탐심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이라도 한듯이 나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태다. 그래서 로마서 6장의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여기라”고 명하고 우리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의 말을 전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죄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 그 은혜로 내가 어떤 자가 되었는지 기억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내가 나의 유익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할 때, 진정한 유익을 누릴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정말 모르겠으면 ‘속는 셈 치고’ 한번 순종해 보라. 집에서 그렇게 해보라. 교회에서 그렇게 해보라. 그럼 정말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 정말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정말로 좋아하는 사이에서도 쉽지 않다. 너무 당연하다. 우리는 이기심 하나로 살아왔던 사람들인데, 이제 와서 이타심으로 살려고 하니 당연히 쉽지 않다. 내가 왕이었는데, 이제는 종이 된  것이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한다는 말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렇게 힘들면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혹은 그렇게 해서 큰 유익을 얻는 것도 아니면서, 애써 사랑하려는 모습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허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세상과 다름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