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한다(Love does)2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설교자: 최종혁

 

교회가 교회로서 기능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다. 1-3절에 우리는 사랑이 모든 것이며 따라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심지어 그 일을 하는 나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4-7절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묘사하는데, 지난 시간에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기본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래 참고 온유한 것”에 대해서 배웠다.

어쩌면 말씀을 들으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좋은 감정이나 환상이 깨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사랑에 대한 좋은 말씀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무거운 책망이었나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는 왜 이 말씀을 좋아했을까? 왜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말씀을 가만히 뜯어 보면 이렇게 쉽지 않은 말씀인데, 왜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내가 순종해야할 말씀으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순종해야할 말씀으로 봤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오래 참아 주고 온유하게 대하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좋은 말씀이다. 마음이 따뜻해 진다. 당신은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해주는 것 같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모습 그대로 다른 사람들은 오래 참아 주어야 하고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당신에게 누구도 무례하게 행해서는 안되고 화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 나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막연한 감정이나 환상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을 때, 또한 그것이 사랑임을 알 때, 실제로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받아야할 사랑이 아니라 내가 해야할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순간 따뜻한 감정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진짜 사랑을 경험하게 할 수는 없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먼저 하는 것이다.

그 참된 사랑의 첫 모습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었다. 이 두 모습은 누군가 나에게 악(해)를 행한 상황이 공통적으로 전제되어 있고, 그런 상황에서 단지 상황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고 온유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고 폭발시키지 않는다. 대놓고든 조용하게든 앙갚음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논쟁으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내가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선을 행한다. 이것이 사랑의 기본적인 모습이다.

이어서 바울은 사랑이 하지 않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나열한다. 이 목록은 고린도 교회가 특별히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반영된 목록일 것이다. 오늘은 그 중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시기와 자랑, 교만의 공통점은 이것들이 모두 능력이나 성취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를 드러내고 인정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때 우리는 시기한다. 남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을 때 우리는 자랑한다. 이 두 사랑 없는 죄의 기본에 있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살펴봤던 것처럼 고린도 지역의 특성 상 고린도 교회는 이런 문제를 더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경쟁적인 사회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은 살아 남기 어렵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도 필수적이다. 할줄 모르는 것도 할줄 안다고 해야하고 남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남이 한 일도 마치 내가 한 일처럼 잘 포장해야 한다. 시기, 자랑, 교만이 부정적이라면 적당히 괜찮은 단어로 바꾸면 된다. 열망, 자기 PR, 자신감 정도가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는 그런 세상의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이런 얘기가 그리 특별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바울 당시 고린도 지역이 특별한 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고린도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경쟁 사회 속에서 나를 중요시 여기고 나를 나타내고 나를 과시해야 함을 배우면서 자란다. 외향적인 사람이든 내향적인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내향적인 사람은 좀 더 겸손해 ‘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떻게 드러나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런 나 중심의 가치관은 결국 관계의 문제를 가져온다. 개인 간의 다툼이 생길 뿐 아니라, 비슷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편을 나누어 싸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나와 우리 교회도 이런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능력과 성취에 대하여 사랑은 그렇게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먼저 “시기하다”는 동사는 기본적으로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는 문맥 상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시기심이고, 그런 마음은 시기하는 여러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시기는 그 자체로서 죄가 되지만, 그 전에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원하는 것도 그 자체로서 죄는 아니다. 단지 ‘부러워’ 할 수도 있고, 그것이 정당한 삶의 동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헌신적으로 교회에서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부러운 마음에 함께 열심을 낸다면 그런 것은 문제될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좋은 마음도 쉽게 죄악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처음에는 ‘나도 저렇게 열심히 헌신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계속해서 그 사람만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으면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반대로 내가 더 인정을 받으면 훨씬 기분이 좋고 우월감이 느껴진다면, 그리고 주님이 아니라 그런 것이 나의 열심의 목적과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이 곧 시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모습이다. 나는 그 성도를 지금 한 몸의 지체가 아닌 경쟁 상대로 생각하여 이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기는 훨씬 더 죄악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단순히 ‘나도 저것을 가지고 싶어’를 넘어서 ‘나만 저것을 가져야 해’가 되거나 ‘저것을 빼앗아 내 것을 만들어야 해’가 되거나, 혹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저것을 가져서는 안돼’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기의 죄는 인간 관계를 아주 쉽게 망가뜨린다.

성경의 예

시기의 죄는 성경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살인까지 저질렀던 가인이 있다(창세기 4장). 가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문제였다면 원인을 찾아 고치려고 했을 것이다. 아버지나 동생에게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인에게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는데 있었다. 그것을 가인은 원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고 동생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면, 가인은 괜찮았을 것이다. 심지어 가인이 아벨을 위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 되었을 때 가인은 시기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살해했다. 시기의 죄가 친밀한 관계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았던 형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경우는 형들이 편애의 피해자가 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마찬가지로 만약 자신들이 요셉의 상황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고, 그러지 못했을 때 동생을 시기했다. 동생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았고, 시기심으로 대했을 때, 그들은 가인과 마찬가지로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었다가 결국 종으로 팔아 버렸다.

다윗을 시기했던 사울은 어떤가? 사울은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다윗을 시기했다. 자연스럽게 다윗이 자기 자리를 넘보는 상황이 되었을 때,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다. 시기의 결과였다.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쉽게 그것이 반드시 나의 것이어야 하고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되고, 그렇게 시기는 관계의 파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예들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만약 아벨이 아니라 아담이 가인과 함께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동일하게 가인은 아담을 시기하고 아담을 죽였을까? 모르긴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은 가인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가인이 시기할만한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을 시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슨 좋은 옷을 입고 있든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절하는 것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시기는 대부분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내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혹은 나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보다 잘하거나 더 인정을 받거나 할 때, 그럴 때 시기의 죄가 우리를 다스리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럼 고린도 교회는 어땠을까?

고린도 교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분쟁의 원인이 바로 시기였음을 밝혔다.

고전 3:3–4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교회가 육에 속한 세상과 똑같이 행하고 있었다.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었다(고전 1:12). 이런 상황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교회 안의 어떤 성도가 바울과의 관계나 친밀함을 통해 그 안에서 인정 받는 일이 있었다. 아마 여러 성도들이 그를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앞에서 이야기 해달라고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 성도를 시기한 다른 성도가 아볼로를 내세우기 시작했고, 어떤 성도는 게바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로 자신들이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지고 다퉜을 것이다. “게바야 말로 사도 중의 으뜸이다. 바울이야 말로 우리 교회의 개척자이자 최고의 학력을 가진 교사다. 아니다. 아볼로의 언변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는 식으로 논쟁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폄훼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제대로 된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둥, 아볼로는 바울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중, 게바는 우리하고는 상관도 없다는 둥, 이런 저런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가치를 매기고 순위를 정하는 일들을 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세상에서 했던 일들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교회는 다툼과 분쟁이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시기가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허무신 막힌 담을 다시 세웠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회복된 관계를 다시 무너뜨렸던 것이다.

고린도 성도들의 은사에 대한 열정은 쉽게 시기로 이어졌다(12-14장). 그들의 열정은 은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서로 더 드러나는 은사를 원했고, 그렇게 은사를 사용하길 원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남보다 잘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얼마나 인정받고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서로가 비슷한 입장에 있었기에 시기의 죄는 더욱 쉽게 고린도 교회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구원을 받았다. 세상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영적으로 봤을 때 그들은 비슷하게 출발했던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라도 성공하기 위해 더 열심을 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인정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집을 제공하고 식사를 제공하던 부유한 사람들이 시기심에 만찬을 먼저 먹고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은사가 사랑이 아닌 시기로 사용되면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만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일들은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린다. 성도들은 유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서로 다투고 분쟁하고 나눠진다. 고린도 교회가 그러했고, 오늘날의 우리도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경쟁심은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될지 모르지만, 교회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세워진다. 따라서 시기하지 않을 때 교회는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면에서 자신을 잘 점검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주님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인지 점검해야 한다. 사랑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심으로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점검해 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교회 안에서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형제 혹은 자매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면 된다. 내가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 잘하고 싶은 일이다. 그런 일을 나보다 어린 누군가가, 교회 새로 온 누군가가, 애초에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내 친구가, 나보다 더 잘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때, 내 마음이 어떤지를 보라는 것이다. 실제 상황이 아니어도 한번 그런 가정을 해보라.

그런 상황이 기쁨이 되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정말로 주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그 일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사랑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누가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성도들이 유익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랬던 것과 같다. 그 사람에 비해 나는 더 적은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 역시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생각하고 열심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일하는 모습이다.

만약 그런 상황에 기뻐할 수 없다면, 내 안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시기의 죄와의 싸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죄가 나를 원하고 있지만 나는 죄를 다스려야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반문했었다(창 4:9). 가인은 그의 아우를 지키는 자가 되었어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형제 자매를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시기는 우리 사이에 있을 곳이 없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다른 성도의 재능과 성취를 시기하지 않는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원하는 어떤 일을 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분량에 따라 충성하면 된다. 사랑은 그렇게 일한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죄악된 반응이라면, 자랑은 나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죄악된 반응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랑은 “과시하는 것”, “우쭐대는 것”, “뽐내는 것”을 의미한다. 남들 앞에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잠언 말씀은 이것이 지혜롭지 못한 행동임을 명확히 말한다.

27:2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칭찬 받을만한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입으로 자신을 칭찬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좋은 일을 하고도 좋은 소리를 못듣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자기 자랑이 심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 때문에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을지 몰라도, 그런 것이 사라지면 그 사람 때문에 그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자랑은 지혜롭지 못하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 단지 그것이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행동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성취를 이룬 사람, 인정 받을 만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 일을 뽐내면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높여서 교회를 분열되게 만든다. 또한 듣는 사람을 시기의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 사람의 죄의 본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자기는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랑하려는 의도도 없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그냥 나눈 것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때론 정말로 순수하게 그렇게 했던 말들이 시기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실제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들은 훨씬 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부러워하라고 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이나 행동은 교회를 무너뜨린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가서, 사랑 없는 자기 자랑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라고도 말한다.

고전 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에서 인정 받는 모든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그래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오직 그 모든 일을 하신 하나님 만을 자랑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다.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구원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룬 성취나 재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고 우쭐대고 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 자신이 인정 받고 싶어 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결국 그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니 나를 칭찬하고 높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사람(3:18),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8:2),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14:37)들이 있었다. 서로 방언을 하려고 하고 예언을 하려고 했던 것도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묻기도 했다(고전 4:7). 그들은 마치 모든 것이 자기의 능력이고 자기의 성취인 듯이 자랑했던 것이다.

자랑은 그렇게 해서 나는 높이고 남은 낮춘다. 나는 우월감을 느끼고, 남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준다. 이렇게 하는 나는 대단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는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실상은 그렇게 사랑 없이 하는 모든 일이 아무 것도 아니고,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까지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면 서운하다. 어떻게든 그것을 남에게 말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그냥 두면 결국 누군가는 알게되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도 모를 것 같을 때는 어떻게든 남이 알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대놓고 말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은근히 자신을 드러낸다. 외식하는 자들이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로는 하지 않지만 뭔가 티를 내는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예배당 청소를 하고 나서 일부러 어디 한군데를 하지 않거나 혹은 어디 불을 켜두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누군가 알아보게 만든다. “아, 제가 어제 예배당 청소하러 왔다가 깜빡했네요.” 내향적인 사람도 그 나름의 자랑하는 방식이 있다.

우리가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고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몰라준다고 해서 내가 나를 알아주고 남이 나를 알아주게 만드는 것은 사랑 없는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남을 깎아 내리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누군가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 나는 더 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성취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은사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객관적으로 내가 더 낫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대로,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사용하시는 것 뿐이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앞서 살펴본 시기와 자랑의 죄의 근본에 있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교만은 나를 본래의 자리에 두지 않고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나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주장한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쉽게 판단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나와 비교하면서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다.

이런 교만은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만하다. 앞서 말한 시기와 자랑이 그 증거이기도 하고, 실제로 이 ‘교만’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골로새서 2:18을 제외하면 고린도 교회와 관련되어서만 사용되기도 했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18–19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교만은 서로 대적하게 만든다. 교만은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한다. 그러면서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잘 알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은 죄를 용납한다. 남의 죄는 쉽게 정죄하지만 자신의 죄는 쉽게 정당화 한다.

그리고 교만은 교회를 무너뜨린다. 교회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가 중심인 교회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이 방언을 하면 자신이 얼마나 방언을 잘하는지를 뽐내려 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이 예언을 하면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드러내려 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이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면, 그것으로 자신이 가장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세운 교회는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계실 수 없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교만한 열심은 교회를 무너뜨릴 뿐이다.

사랑은 이렇게 교만하지 않다.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지, 혹은 내가 더 낫지 않아서 속상한지 생각해 보라. 더 잘 섬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서 속상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보다 더 낫지 못해서 혹은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속상한지 생각해 보라.

교만은 내가 더 낫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에서 나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중요하고 다른 성도가 중요하다. 그런 사랑은 절대 교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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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어떻게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에 말한 것처럼 시기와 자랑은 교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해결은 교만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그리고 그 해결은 이 땅에 살았던 사람 중 가장 겸손했던 예수님에게 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 말씀은 이것일 것이다.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하게 자신을 높일만한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무리 자신을 높인다고 해도 그것이 교만이 될 수 없는 분이시다. 본래 가장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셨다.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교만하지 않으셨고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셨지만, 마치 자기보다 우리가 더 나은 자들인 듯 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 겸손의 사랑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사랑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데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마땅히 취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것이 겸손의 시작이다.

우리가 교만한 이유가 무엇인가? 당연히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마땅히 저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가진 것은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절대 교만과 시기와 자랑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실제로 나의 권리가 아닌 경우 뿐 아니라, 나의 권리일지라도 마땅히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본이다.

내가 하는 일들을 모든 성도들이 다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수고를 하면 칭찬 받을 권리가 나에게 생겨서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다른 성도도 그 일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모임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 어떤 교제는 그 시간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만 옳은 것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한 말에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사람이 정말 말을 잘못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죄의 문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감히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와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의 나의 교만의 문제다. 내가 마땅히 그 정도의 대우는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나를 높이려는게 아니라,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잖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했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이 당연히, 마땅히, 상식적으로 누려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겸손의 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데 따를 수 있는 완벽한 본이 되시기도 하지만, 또한 유일한 힘이 되기도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자기를 낮추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본이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주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사랑하자. 시기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자.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