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빚에서 빛으로

본문 : 로마서 13장 8-14절

설교자 : 이병권

작년에 발표된 국제금융협회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 나라 37개국의 가계 부채 비율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부채의 상승폭도 가장 높은 1위라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가정 가정마다 가지고 있는 빚이 많다는 것입니다. 빚지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하면 빚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빚을 지고 빚을 이용합니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고 대출 받아서 학비를 내고 집을 구하고 할부로 차를 사고 물건을 구입합니다. 지금 가진 돈으로만 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지게 될 돈을 미리 빌려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현실이 이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 하는 일을 당장 멈추어야 할까요?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7절을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진 것을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주어야하는 할 빚을 갚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데 빚을 갚으라는 명령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서로가 사랑으로 행하는 것, 그 외에는 어떠한 빚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질 수 있는 빚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빚은 예외니까 마음껏 빚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의 수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빚질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있으니 내 뜻대로 합니다. ‘왜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지, 왜 나를 섬기지 않는 거지’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빚을 떠넘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사랑을 주는 쪽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풉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받는 쪽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권리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사랑의 빚을 악용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명령을 지나치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모든 경제적인 활동에서 빚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일 수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어떠한 빚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만 하고 카드 사용을 악으로 생각합니다. 대출이나 할부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빚지는 것을 죄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빚을 좋은 것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빚지는 것 자체를 금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구약의 명령은 빚 자체가 금한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빚을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합니다. 빚을 주는 것은 허용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눅 6:35)고 말씀하셨고 빚지는 것과 관련된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빚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갚으라는 것입니다. 빚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7절의 갚으라는 명령이 8절에서 반복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인에게 대출 금지를 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이 있다면 계약 조건대로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는 것이고 갚을 수준에 벗어나는 과도한 빚은 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빚을 갚는 것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재정 관리나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약속한대로 성실하게 빚을 갚아야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빚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부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명령을 간단하게 바꾸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사랑에 빚진 자이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계속 갚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빚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빚을 갚으라.

그렇게 사랑할 때 우리는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의 중요함을 율법으로 설명합니다.
13:8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는 많은 명령을 남을 사랑하는 것으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바울은 대표적인 십계명의 몇몇 계명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언급하지 않은 다른 계명들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는 말씀이 요약된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의 많은 명령들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묶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율법의 모든 말씀은 두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입니다. 나무로 비유하면 사랑으로 뿌리 내린 나무는 큰 두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줄기에서 여러 명령들이 가지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 사랑이 율법을 요약한다는 말씀은 다른 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나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에 빚진 자가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중요함을 율법을 통해 설명하는 바울의 결론입니다.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성취합니다. 율법의 의도대로 율법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기에 율법을 완성합니다. 율법의 요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버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선과 악으로 사랑이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 없는 진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12장의 표어와도 같은 말씀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정리하면, 빚을 갚으라는 명령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 강조된 사랑은 다시 선과 악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제 선과 악은 빛으로 연결됩니다.

빛이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빛은 그 바탕이 되는 배경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밝은 대낮에는 아무리 빛을 밝혀도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깊은 어둠이 깔린 밤에는 빛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빛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그 바탕이 되는 시기, 때를 언급합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벌써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임하게 될 미래의 구원, 우리에게 확정되어 있는 최종적인 구원의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곧 해가 뜨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현재 우리 삶의 배경이 되는 어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빛으로 살 수 있는 때가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아직은 깊은 밤입니다. 하지만 곧 밝은 낮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종류의 인공적인 빛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습니다. 근동지역의 사람들은 해가 뜰 때부터 일어나 일을 시작했는데 한낮이 되어 뜨거운 햇빛이 있을 때에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일찍부터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임박한 구원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당장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 그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어두운 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직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 경고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사실과 다르게 과장해서 경고를 했던 걸까요? 구원의 날이 좀 늦어지더라도 준비하고 있으면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그런 의미로 그날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경고한 걸까요?

우리가 그날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누구도 그때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둘째는 언제든 그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위해 뭔가 더 준비되거나 갖춰져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의 때는 언제든 주님이 다시 오실 수 있는 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실함과 그때를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함은 우리에게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막연한 기대나 바람이 아니라 확실한 소망이기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삶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확실한데 그때는 불확실하기에 우리로 깨어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준비되게 하고 기다리게 합니다. 복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때를 알고 깨어있는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세 가지 대조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권면합니다.

첫 번째 대조는 어둠과 빛입니다.
13:12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어둠과 빛이 옷을 바꾸어 입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어둠에 속했던 우리가 비체 속한 자가 되었고 어둠의 일을 행하던 우리가 비체 일을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바뀐 옷에 맞는 삶을 삽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빛의 갑옷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전투 중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어둠 가운데 빛을 드러내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대조는 단정함과 방탕함입니다.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우리는 낮에 속한 자입니다. 여기의 낮은 빛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자로서 빛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정함으로 나타나는데,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다툼과 시기와 같은 악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악에 속한 것을 버리고 선에 속한 것을 따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대조는 주님의 옷과 육신의 일입니다.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옷은 사람의 신분과 능력을 보여줍니다. 왕의 옷을 입은 사람은 왕의 신분과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그 능력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고 그리스도의 삶이 나의 삶이 되어서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 속에서부터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고 나를 위한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을 통해 가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이 악을 도모하는 것이고 어둠에 속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육신의 일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선행으로 빛을 비추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빛이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빛이기에 그에 합당한 선행으로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행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 이웃 사랑이기도 합니다.

찰스 스윈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생자가 없는 죄는 없다’ 죄는 반드시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희생자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 그 모든 악은 희생이 있습니다. 악으로 인해 지불되어야 하는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 누군가가 그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될 수 있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희생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선행으로 빛을 비출 때, 빛 가운데 행하고 어둠을 버릴 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할 때,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어둠의 일을 하면, 방탕함에 거하고 있으면, 육신의 일을 도모하고 있으면 아무리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해도 진짜 사랑을 행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서 선물을 주고 아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며 여러 가지로 수고를 다합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면 어떨까요? 아내를 위한 수고는 거짓이고 진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정말 배우자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라면, 정말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먼저 하나님 뜻에 합당한 빛을 행하는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내가 빛 가운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고 악을 미워하며 사는 것,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며 깨어 기다리며 사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고 이웃에게 참 유익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빚을 갚는 일과 선행으로 빛을 비추는 일은 서로 분리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말씀합니다(히10:24).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힘써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날이 더욱더 가까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도전과 유혹이 만만치 않은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장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고 그렇게 살도록 서로를 부추깁니다. 이런 어두운 때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로서, 빛의 갑옷을 입은 군사로서 선을 행하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셨기에 우리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본을 좇아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을 행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 되신 주님을 좇아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으로 빚을 갚으며 선행으로 빛을 비춥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