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본문 : 시편 11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1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본문 3절에는 질문이 하나 등장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표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본문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11편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절에서는 다윗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4-7절에서는 다윗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각각의 목소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한쪽은 불안해하고 한쪽은 평안해 합니다. 한쪽에서는 두려워하는데 한쪽에서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한쪽은 불신의 소리이고 다른 한쪽은 믿음의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평안하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뭔가 좋은 상황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둘의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절). 다윗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어려움과 곤경이,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상황을 2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2절).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두 대상이 나옵니다. “악인”과 “마음이 바른 자”는 시편에서 줄곧 나오고 있는 악인과 의인입니다. “악인”은 단순히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른 자”는 마음의 동기가 선한 자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정직한 자”, “의인”이라고도 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이와 같이 의인, 마음이 정직한 자, 마음이 바른 자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다윗은 지금 악인이 의인을 공격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마치 사냥꾼이 새를 사냥하려고 어두운 데서 겨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악인들이 다윗을 노리며 활을 당기고 있습니다. 이제 손만 놓으면 활이 날아가고 새가 맞을 것입니다. 그것을 새가 봤다면 즉시 도망가야 합니다. 다윗의 친구들이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사냥꾼의 화살에 표적이 된 새와 같으니 도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절). 이 상황을 터가 무너진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혹시 터가 무너진다면’의 가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미 무너진 것이거나 무너짐이 임박한 상황입니다.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 성경에 보면 “터”와 “기둥”은 개인의 삶, 사회의 기초를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 82:3-5), “애굽에 칼이 임할 것이라 애굽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엎드러질 때에 구스에 심한 근심이 있을 것이며 애굽의 무리가 잡혀 가며 그 터가 헐릴 것이요”(겔 30:4). 터가 무너진다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과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의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도덕과 공의의 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친구들은 도망가라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너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고 터가 무너졌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도 그것이 잘못된 충고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것은 좋은 충고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사도 바울에게 성도들이 가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그 길을 갔습니다. 충고를 할 때는 진심으로 해야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때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윗은 친구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산으로 피하라는 친구들의 말에 다윗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산보다 안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것입니다.

친구들이 말한 “산으로 도망하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산으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책임과 의무를 내려놓고 피하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냥꾼의 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하는 새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세벨을 피해 도망한 엘리야의 모습, 가나안의 장대한 거민들의 소식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상황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산으로 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도우실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그가 자주 도망 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피해 산으로 도망했을 때 그의 몸은 산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물론 다윗의 몸과 마음이 모두 산으로 도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 땅으로 도망했을 때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피해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두려움에 맞서서 당당하고 멋진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의로운 분노로 싸웠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피하든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피하든지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런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에스라는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갈 때 왕에게 도움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가 전에 왕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하게 대하신다’고 말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에 8:21-23). 그런 에스라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다릅니다. 그는 성벽을 재건하면서 왕께 도움을 구합니다. 조서를 쓰고 물품을 달라고 하고 군대와 병사들을 요청합니다(느 2:7-9).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에스라는 신령한 것이고 느헤미야는 육신적인 것일까요? 그 두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도우심을 구하고 어떤 모습이든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그 전에 핍박을 피해 도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에 맞서서 싸우는 것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의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 안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과 행동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마음 속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내가 누구에게 피하고 있느냐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께 피하기를 선택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4절). 그가 하나님께 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누가 이 땅을 다스리고 있고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든지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주관하고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십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선택했던 첫째 이유입니다.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절). 다윗이 하나님께 피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전지하신 감찰자이시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의 일을 나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보고 계십니다.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는 구절에서 “안목”이라고 번역된 원어의 뜻은 속눈썹입니다. “감찰한다”는 것은 시험하고 분석한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면밀히 자세하게 보고 계신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 위해 눈을 찡그리면 속눈썹만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면밀히 인간 세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의인의 의로움과 악인의 악함을 보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의인을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면밀히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관이십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5절). 하나님께서 의인을 감찰하신다는 것은 그가 의인인가 아닌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인정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의인을 인정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주십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6절). 이것이 악인에게 주시는 결과입니다. 앞에서는 악인이 새를 겨냥하는 사냥꾼처럼 묘사되었지만 여기서는 악인들이 사냥감이 됩니다.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안에 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죄인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 위에 쏟아 부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에게 그 진노를 내리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절). 이것이 의인에게 주시는 결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우리에게도 의로움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외면치 않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이제 3절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요? 터가 무너질 때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의 친구들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터는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터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터는 언제나 견고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모든 일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며 자신의 뜻에 따라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세우신 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면(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나 안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믿음이 있다면), 온 세상에 터가 무너져도 우리에게 있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가운데 의롭고 선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여전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터는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다윗과 같이 평안과 확신, 믿음의 소리를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