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백성에게 좋은 소식
본문 : 누가복음 3장 15~20절
설교자 : 조정의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냐

 

누가는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 즉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 차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장에서는 구속사의 두 핵심 인물에 대해 소개했는데 하나는 주인공이고 또 하나는 그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었습니다. 주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하나님의 택한 종,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창세기의 예언(3:15)부터 시작해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구약에 250-300차례 예언).

그 예로 이사야의 예언을 보시겠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7).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메시아는 정의와 공의를 영원히 세우실 왕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의 역할을 한 번에 온전히 이루러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매우 위대한 조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나실인이었고, 날 때부터 천사가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예언을 받은 사람은 삼손, 사무엘 정도로 손꼽습니다. 요한은 기적적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나이가 많은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낳게 된 기적의 아이인 것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1:13-16).

그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말라기가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또한 700년 전에는 이사야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5)고 그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의 탄생이 수백년 전에 예언되었던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위대하고 엄청난 사람도 그저 조연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 앞에 큰 자”(눅 1:15)였지만, 예수님은 “큰 자”(1:32)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1:32)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1:76)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1:43)가 아니라, “주 앞에 앞서 가서 주의 길을 예비할 자”(1:76)였습니다. 그는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2:10)이 아니라 그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말 3:1)였고, “소리”(사 40:3)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요단강 부근으로 나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1:77; 3:3). 과거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지(정죄, 심판, 회개, 구원)을 그 역시 선포했습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말했고(정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했으며(심판),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회개). 이제는 그들을 구원할 사람(“구주,” 2:11)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제 그는 메시아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내용입니다.

상황: 백성들이 요한을 오해하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3:15)

당시 백성들은 혹시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말라기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은 어떤 선지자도 어떤 말씀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요한이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선지자들처럼 말입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실인이었고 천사들이 예언했던 기적의 아이였습니다.

그가 외치는 메시지의 탁월함에 수많은 백성들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에서 “무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7:29). 그들 중에는 백성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리와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영향력과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고, 더구나 그는 비범해보이게도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 3:4; 막 1:6). 400년의 침묵 끝에 나타난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이를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 알려 줄 필요가 생겼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교만을 타고났습니다. 남 앞에서 나를 낮춘다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나를 높여주었을 때 겸손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참 선지자라는 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요한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칭송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은근히 즐길 수도 있습니다. 크게 반박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습니다. 아님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예언했던 것과 아버지가 노래했던 찬양을 들어 자신의 비범함을 드러내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반응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6)

세례 요한은 자신과 그리스도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영적인 변화에 대한 하나의 예식입니다. 물 자체가 그 사람을 회개하게 하거나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는 있지만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 메시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고, 죄에서 사함을 받고 새생명을 얻게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는 유대인들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궁극적은 구원 메시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바로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정결케하시며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바로 이 능력의 영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성령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6-7). 성령을 부어주는 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되는 일입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영혼을 소생시키며,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구원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게도 하고,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훈련 도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죄에 대해 심판하실 때 “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불이 어떤 의미인지 말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요한)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그리스도)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 3:1). 여기서 “불”이 언급됩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악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메시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시고 동시에 심판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요한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분은 너희를 구원할 수도 있고 심판할 수도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나보다 먼저 계신 분”(요 1:30)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태어나기는 요한이 먼저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말할까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말씀합니다(삼상 2:6-8).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구원자와 심판주가 되십니다.

요한은 메시야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 문화를 알 때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신었던 신발은 우리나라의 짚신처럼 발바닥은 보호하지만 나머지는 열려 있는 형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중동지역은 모래가 많습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발에 모래와 먼지가 많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집안에 들어왔을 때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줍니다.

신발끈을 푸는 것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가르침에, 종이 주인에게 하는 모든 일을 제자가 스승에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만 이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신발끈을 푸는 일입니다. 종들 중에서도 유대인 종에게는 이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낮고 천한 자가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자신은 그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못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주인이고 나는 종이다’, ‘나는 그의 가장 미천한 종이 되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할 그 때, 죄인과 원수로 취급했던 세리와 군인들까지도 찾아올 정도로 참 선지자라고 추앙받던 그 때,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천한 종이 되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역으로 그가 선포하는 메시아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높으신 분인지를 말하였습니다.

당시 요한은 아직 메시아의 권능이나 이적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3-34). 요한은 아직 메시아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권능과 권세를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그분을 알았고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메시아가 하시는 일을 한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7).

키는 타작할 때 삽과 쇠스랑 같이 생긴 것을 하늘로 날리면 알곡은 밑으로 떨어지고 지푸라기와 쭉정이는 멀리 떨어지게 하는 농기구입니다. 저녁에 산들바람이 불 때 그 일을 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보리를 까불리기 위해 저녁에 타작마당에 나와 일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룻 3:2). 곡식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는 것은 성령과 불의 세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보관하는 것과 밖에서 태우는 것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은 밖에 나가서 태움을 당하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 와서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 불못에 대한 유사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2-15).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받을 것이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누가 사람을 구원합니까? 그리고 누가 사람을 심판합니까?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분,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4~29).

생명의 권세와 심판의 권세가 그분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집니다.

구약의 계시록과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증언을 볼 때 사람은 그 행위대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행악하는 자들, 범죄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는 것은 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하는 등의 착한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습니다(눅 18:19).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할수도 없습니다(롬 8:7). 생명의 부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새로운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로 그 새로운 영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4-15).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자, 그가 선한 일을 행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계속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질 것인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은혜를 구할 것인지. 그분께 겸손하게 나간다면 그리스도의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천사들이 목자들 앞에서 했던 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19-20).

이상하게도 이 구절에서는 요한이 주어가 아니라 분봉왕 헤롯이 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헤롯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이고 갈릴리 지역을 담당했던 분봉왕입니다. 그는 로마에 살았던 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좋아하여 자신의 아내로 취합니다. 그녀는 동생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배다른 동생의 딸이기도 합니다. 헤롯은 남의 아내를 빼앗고 자신도 전처를 버리는데 그로 인해 헤롯의 장인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헤롯은 로마 정부의 개입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헤로디아는 로마 시민인 전남편을 떠나 분봉왕인 헤롯을 택했고, 이후에 ‘분봉왕’이 아닌 ‘왕’이라는 칭호를 얻고자 로마에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권력욕이 강했던 여자로 보입니다. 결국 그 의도가 발각되어 로마 황제가 분봉왕을 폐위시키고 유배지로 보냅니다. 이들 부부는 이렇듯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들에게 많은 책망을 했고 그 결과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헤롯은 한 가지 악을 더했습니다. 그들이 헤로디아의 일과 자신이 행한 모든 악한 일에 한 가지 더한 악은 바로, 죄를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명했을 때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에게 많은 이들이 나왔습니다. 세리와 군인까지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말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라고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죄에 직면하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하나님을 주인으로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그 주인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반응은 그 반대로 죄에 대해 듣지 않는 것입니다. 헤롯이 그렇게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사람을 가두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진리를 귀찮아 하며 하던대로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가는 진리와 그리스도에게 대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를 세례 요한과 헤롯 안디바의 반응을 대조하여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목자들 앞에서 천사가 외쳤습니다. 났을 때 목자들 앞에서 천사가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과연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일까요?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일까요, 헤롯처럼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는 사람일까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롬 3:10-12). 우리는 모두 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히 9:27). 성경은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요 3:16).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섬기면서 은혜와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헤롯처럼 진리에 귀를 막고 교만에 사로잡혀 자신이 삶에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드디어 메시아 어떤 분인지 소개했습니다. 이제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사역의 방향을 빠르게 바뀌어 가고 사람들도 빠르게 예수님을 향해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세례 요한이 계속해서 예수님이 참 메시아이심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분통하게 여겼지만,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곧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겸손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제 누가의 기록에서 사라지고(7장에서 언급), 그가 가리킨 예수님께서 등장합니다. 풍성한 진리를 충만한 지혜를 가지고 등장하셔서 본격적인 공적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기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