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뢰, 결과를 맡기다

본문 : 룻기 3장 10-18절

설교자 : 이병권

룻 3:10-18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저는 오늘 “신뢰, 결과를 맡기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분문은 타작마당에서 한 밤 중에 룻이 했던 프러포즈에 대한 보아스의 대답으로 시작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포러포즈에 대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좋아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룻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함으로 차근차근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10절에서 13절까지 이어지는데 룻기에 기록된 가장 긴 말입니다.

먼저 10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는 룻을 “내 딸아” 라고 부르며 크게 칭찬합니다. 룻이 얼마든지 젊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실 룻에게 죽은 남편의 친족과 결혼해서 집안을 다시 세워야 하는 그런 책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룻은 젊은 남자가 아니라 보아스를 선택합니다. 그것은 자신보다는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더 생각한 결정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선택에 감동합니다. 룻이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여기서 말하는 “인애”는 우리가 1장에서 살펴봤던 헤세드입니다. 신실한 사랑, 헌신된 사랑, 언약 사랑, 충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룻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도 되는데,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베들레헴까지 온 것은 헤세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룻이 젊은 남자와 결혼해도 되는데, 보아스와 결혼하려는 것은 더 큰 헤세드라는 것입니다. 룻이 자기감정이나 자기 이익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와의 약속을 지키고, 나이 많은 보아스와 결혼하려는 것은 헤세드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룻을 축복하며 칭찬한 보아스는 이제 룻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11). 보아스는 지금 룻의 마음을 헤아리며 따뜻한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긴장하며 걱정하고 있을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두 가지 내용으로 룻을 격려합니다.

하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을 따지지 않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안심할 수 있도록 이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룻이 현숙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이 대담한 프러포즈를 오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룻을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이 어떤 사람인지 백성들이 다 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룻의 마음을 무겁게 할 만한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프러포즈에 대한 약속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오해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현숙한 여인을 찾으면, 먼저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 마지막 장에 현숙한 여인의 모습이 어떠한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룻기가 사사기 뒤에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룻기가 잠언 뒤에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마지막 현숙한 여인에 대한 기록, 그 다음에 룻기가 이어집니다. 룻기에서 룻이 역사 속에 실제 하는 현숙한 여인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잠언의 현숙한 여인과 룻을 연결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면 현숙한 여인을 무엇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보고, ‘이 사람은 현숙한 여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까? 현숙한 여인을 잠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룻기에서는 헤세드를 행하는 룻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헤세드로 나타납니다. 헤세드 사랑이, 헤세드의 실천이 현숙한 여인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현숙한”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보아스를 묘사할 때 썼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2장에서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말할 때 썼던 단어입니다. 이 커플의 모습을 보십시오. 유력한 남자와 현숙한 여자, 두 사람의 특징이 같은 단어로 묘사되어 평행을 이루며 연결됩니다. 환상의 커플 아닙니까? 보아스가 여자로 존재한다면, 그건 룻과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룻이 남자로 존재한다면, 그건 보아스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단순히 외면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매력과 힘이 있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룻의 프러포즈에 대한 보아스의 확실한 대답 ‘오케이’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가 불쑥 튀어 나옵니다. 이래서 룻기가 재미있는 겁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12). 보아스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룻에게 알려줍니다. 룻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보아스 입장에서 얼마나 하기 싫은 말일까요? 그냥 말하지 않고 덮어둬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아스는 사실을 밝히고 정정당당하게 절차를 밟겠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또 다시 긴장 상태로 접어듭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룻과 맺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둘을 우연 아닌 우연으로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이 둘을 통해 그 뜻을 이루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룻은 보아스의 지시에 따라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힘든 새벽에 돌아갑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한 것은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이것을 별식이라고 합니다. 남의 말 하는 것은 특별한 음식처럼 맛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맛있는 별식이 하나 생기면 놓치지 않습니다. “어머머, 이런 민망한 일이 다 있나! 글쎄, 어제 밤에 말이야~ 룻이, 아이고! 말을 못하겠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비밀인데, 자기만 알고 있으라고 말해주는 거야!”

보아스는 이런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책임 있고 지혜로운 지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아스가 자신의 날개로 룻을 보호하는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돌려보내기 전에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룻의 겉옷에 담아 줍니다. 한 번 되어 주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에, 보아스가 얼마의 곡식을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보아스의 성품을 생각하면, 아마도 많은 양의 곡식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보리는 17절에서 알 수 있듯이, 보아스가 룻에게 준 것이라기보다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결혼에 대한 신부의 몸값이라고 말하는데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아스의 관대함에서 나오는 호의입니다. 보아스는 늘 이렇게 잘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이제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풍성한 곡식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룻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미가 묻습니다. “얘야~ 어찌됐니? 무슨 일이 있었어?”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오미, 자신이 며느리에게 이 일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했을 것입니다. 아마, 마음을 졸이며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래 의미 그대로를 말하면 “내 딸아, 너는 무엇이니?” “내 딸아, 너는 누구니?”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이제 보아스의 부인이 되었니?’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룻은 있었던 모든 일을 시어머니에게 알려줍니다. 17절입니다.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여기서 빈손이라는 말은, 1장 21절에, 모압에서 돌아오면서 나오미가 ‘비어 돌아왔다’라고 했던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나오미가 했던 말을 다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삶이 흉년과 아들들의 죽음으로 텅 비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오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지만 그녀의 삶은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코 빈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녀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18절은 나오미가 룻을 격려하며 조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와 룻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실제로 이 후로, 나오미와 룻의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보아스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이제 배턴은 보아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보아스가 마무리 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신뢰합니다. 그가 이 일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지켜보자고 며느리를 격려합니다.

사실 보아스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더 가까운 친족이, 자기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 사람 모두 이 일에 대해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묵묵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룻기 전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결국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하는 이 마지막 말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 일을 성취하시기까지 쉬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오늘의 이야기는 보아스와 룻, 두 사람의 결혼을 가로막는 뜻밖의 존재를 알려주며 끝이 납니다. 그러면 보아스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이 일을 이루실까요? 룻기는 이제 마지막,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 한 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교훈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신뢰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신뢰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꾸미는 것은 신뢰가 아닙니다.

보아스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룻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 그 헤세드의 모습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가치 있는 일이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친족의 의무를 다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보아스는 지금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아스에게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룻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 사실을 밝히고 정당하게 일하기를 선택합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른 유혹이 없었을까요?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을 룻과 나오미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가까운 친족도 이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보아스가 입을 닫고 모른 체하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내 뜻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대로 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과정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를 숨기거나, 살짝 비틀거나,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거나,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정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나님 신뢰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갈등입니다. 가정생활과 학교와 직장과 사업과 인간관계와 재정,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까지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를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정을 꾸미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과정을 꾸미지 않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옳은 것을 선택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옳은 선택을 통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보다 더 값진 재산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일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기 위해 과정을 꾸미는 것이 언제나 더 쉽고, 언제나 더 달콤합니다. 그와 반대로 결과에 대해서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말 괴로울 만큼 힘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과정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과정을 조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과를 그분께 맡기고, 믿는 바대로, 말씀에서 배운 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에 따라 행하십시오. 성령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그 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기대하며 옳은 일을 선택하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며 과정을 꾸미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것이 신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