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인생, 한 줄 평

본문: 역대하 25장 1절~4절

설교자: 조정의

하나님 나라에 우리 인생이 기록된 책이 있을까? 다윗은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노래했다(시 139:16).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기록했다(계 20:12). 어쩌면 천국엔 모든 사람의 전기가 있을지도.

시편과 계시록 모두 시라는 문학적 장르라는 걸 생각해볼 때 실제로 책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책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세세히 기록한 책을 보는 것처럼 들여다보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인생이 빼곡히 기록된 책을 펼쳐 보이신다면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인생이 기록된 책의 첫 장엔 내 인생 한 줄 평이 적혀 있을지 모른다. 구약시대 분열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왕의 평가가 한 줄로 기록되고 “그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반복하여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대상 14:29; 15:7, 23).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보면 분열 왕국 총 38명의 왕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 인생 한 줄 평이 나온다. 크게 3가지로 평가를 분류할 수 있다. 좋은 왕, 나쁜 왕, 그리고 이상한 왕. 오늘 우리가 살펴볼 유다 왕 아마샤는 마지막 세 번째 이상한 왕, 애매한 왕에 속한다. 그의 인생에 대한 한 줄 평을 생각해보면서 장차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간절히 받기 원하는 평가를 그려보기 원한다. 먼저 우리가 절대로 받고 싶지 않은 평가에 대해 살펴보자.

1. 나쁜 왕(30/38)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다. 북부 10지파와 남부 2지파로 쪼개졌다.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이유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여호와 예배를 거부하고 금송아지를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점차 잃어버리고 끝내 앗수르 제국에 멸망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 이주하고 혼합 정책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게 했다. 신약시대 사마리아인은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유대인으로 정통 유대인의 비난을 받았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여로보암이었는데, 그 이후로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등 19명의 왕이 세워졌다. 여로보암의 후손이 계속 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여로보암 왕조, 바아사 왕조,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 등 9번이나 반역에 의해 왕조가 뒤집어졌다.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건 북이스라엘에 어떤 왕조가 세워져 개혁을 일으켰든 상관없이 영적으로 선한 왕이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첫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에 대한 한 줄 평은 이와 같다: “너는 내 종 다윗이 내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따르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 14:8-9)

그 후로 세워진 18명의 북이스라엘 악한 왕들의 평가는 ‘여로보암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였다’이다(왕상 15:26; 16:7, 13, 19, 25-26, 30-3; 22:52-53; 왕하 3:2-3; 10:30-31; 13:2, 11; 14:24; 15:9, 18, 24, 28; 17:2). 

남유다 왕국에도 19명의 왕이 세워졌다.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남유다는 다윗 왕조가 끊김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총 19명의 왕 중에서 11명이 나쁜 왕이란 평가를 받았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왕상 14:22).

분열 왕국 두 나라의 38명 왕 중에 무려 30명이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죄는 요약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 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긴 죄다. 하나님의 성전에 다른 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정하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다른 장소에 산당을 세워 잘못된 방식으로 예배한 죄. 누구도 이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사랑한 사람. 하나님보다 더 무엇을 추구한 사람.

신약 성경에도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 이들이 있다. 권력을 하나님보다 사랑한 헤롯 대왕, 재물을 예수님보다 사랑한 부자 청년, 돈을 주님보다 사랑한 가룟 유다. 세상을 사랑하여 복음을 버린 데마.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한 빌라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 누구도 이들과 같은 인생 평가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가 우리 인생의 한 줄 평이 되고 싶지 않다.

2. 좋은 왕(2/38) – 히스기야, 요시야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은 남유다 왕국의 19명 왕 중에서 겨우 2명에 불과하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좋은 왕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왕하 18:3). 그는 모든 우상과 산당을 제거했고,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을 떠나지 않았고 계명을 잘 지켰다(왕하 18:5-6).

요시야의 할아버지는 남유다 최악의 왕 므낫세(히스기야의 의로운 행위를 뒤집어 놓음), 요시야의 아버지는 대를 이어 악을 행한 아몬이었다. 하지만 요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왕하 22:2). 또한 그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고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는 극찬을 받았다(왕하 23:25).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수백 년간 악한 왕의 통치로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타락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유일한 의로운 두 이름이다. 그들이 완벽했던 건 아니다. 실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적도 있다. 두 사람의 모델인 다윗 왕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과 살인이라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자, 내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자라고 평가하셨다. 왜 그런가?

앞의 나쁜 왕과 달리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섬겼다. 우상을 삶에 두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섬기지 않았다. 하나님 말씀에 모든 영역에 있어 순종하려고 했다. 실족하여 불순종의 죄를 지을 때도 있었지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며 순종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신약에도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을 이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신실하게 기도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열 한 제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 사도 바울.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동역한 크고 작은 일꾼들. 무명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평생 신실하게 살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

나쁜 사람에 비하여 매우 적은 무리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신다. 잘하였다고 평가하신다. 당신은 이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가?

3. 이상한 왕(6/38)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로 쫓겨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의로운 자로 남을 자신은 없다. 중간 지점이 있을까? 

이제 이상한 왕 혹은 애매한 왕 아마샤를 만나볼 차례다. 그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웃시야, 요담과 더불어 일단 유다 왕국의 선한 왕으로 분류되는 왕이다.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을 애매한 왕으로 분류한 이유는 따라오는 말, “그러나”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다’ 이 말이 바로 이어진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무슨 문제일까?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이들은 백성이 율법에 반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배의 방식만 자신들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한 문제였다(가나안 백성의 우상숭배).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아마샤를 비롯한 여러 왕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백성을 인도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예배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우상숭배 제단을 왜 그냥 내버려 두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아마샤의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역대하를 기록한 저자를 통해 아마샤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읽어보자(대하 25:1-4).

1 아마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2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3 그의 나라가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죽였으나

4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는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29년 동안 다스렸다(1절). 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뒤에,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지만(대하 24:26, 사밧, 여호사밧), 그 자녀는 죽이지 않았다(3-4절). 주님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의 죄를 자녀에게 물지 않은 것이다(신 24:16,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이처럼 아마샤는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한 줄 평을 들어보라.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그러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5:2) 마음을 다하여 하지는 않았다(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긴 하되 전심으로 하지는 않은 사람. 예수님 말씀대로 열심히 잘 살았지만, 마음을 다하여서 하지는 않은 사람. 이것이 아마샤를 비롯하여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남유다 왕국 여섯 명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였다(아사 제외,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왕상 15:14). 그들은 대놓고 하나님 외에 우상을 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겼던 것도 아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계 3:15). 열심히 주를 사랑하며 섬기지도 않고 반대로 주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지도 않는 미지근한 상태를 하나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6).

이상하고 애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내 인생 한 줄 평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긴 했지만, 마음을 다하여서 하지는 않았다”라면 얼마나 부끄럽고 후회스럽겠는가? 당신의 삶을 살펴보라. 삶의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그 주변부에 세워둔 산당이 있지는 않은가?

어떤 이들에게 산당은 돈이다. 재물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 어떤 이들에게 산당은 자식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어떤 이들에게 산당은 쾌락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은밀히 쾌락을 즐기며 산다. 어떤 사람에게 산당은 출세다. 세상에서 잘 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갉아먹는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허용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이상하고 애매한 삶, 미지근한 삶으로 끌고 간다. 과감히 뿌리 뽑아라. 그렇지 않으면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내 인생 한 줄 평을 듣게 될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긴 했지만, 전심으로 하지는 않았구나.”

어떻게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섰을 때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우리 손으로 한 모든 주를 위한 일들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지도 못할 존재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나쁜 놈으로 평가받을 것이 죄악 중에 출생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빌 2:1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정직한 일에 대한 찬양은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자랑하려면 오직 주님만 자랑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야 한다(빌 2:12).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풍성한 사랑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받은 자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한다. 그분을 기쁨으로 섬기기 원한다.

얼마 전 TV에서 자전거로 40일 동안 4,000km를 타고 한 청년을 만나러 간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약 10배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그가 만난 청년은 21살 젊은 남성이었는데 그는 청년을 만나자마자 끌어 안고, 청년이 가져온 청진기로 청년의 심장 소리를 듣고 눈물을 쏟아냈다.

알고 보니 젊은 청년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의 딸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딸이 세상을 떠나고 너무 그리워서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어 먼 거리를 기쁨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어떤 배경에서 자랐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이식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전심으로 사랑하신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받는 우리가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나라에 갔을 때 내 인생이 적힌 책이 있다면, 그 책 첫 장에 내 인생 한 줄 평이 있다면, 크고 작은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너는 나를 전심으로 사랑하였다’라고 적혀있기를 원하지 않는가?

코로나 19사태가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몰라 많은 사람이 두려워한다. 종말을 믿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두려움과 함께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 곧 떠날 세상에 미련이 있지는 않은지, 그동안 너무 애착을 갖고 살았던 건 아닌지. 하나님은 어쩌면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인생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 같다. 내 인생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 한 줄 평을 듣기 전에, 먼저 자기 인생을 평가해보라. 그리고 주변을 잘 정리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