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삶의 짐을 내려놓는 방법

본문 : 시편 55편

설교자 : 최종혁

 

52편부터 이어진 다윗의 마스길의 마지막 시로서 이 시의 핵심이 되는 교훈은 22절에 기록되어 있다.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이 시편은 삶의 ‘짐’에 대한 시다. 짐에 대해서 22절의 교훈에 이르기까지 다윗이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가 1-21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삶의 짐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I.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짐은 책임이기도 하고 때로는 염려, 걱정이기도 하다. 계속 짊어져야 할 짐인 것도 있고 빨리 내려놓아야 하는 것도 있다. 불필요한 짐들도 많다. 내가 스스로 진 짐도 있고 타의에 의해서, 환경에 의해서 지게된 짐들도 있다.  

55편에서 말하는 짐은 우리 입장에서 괴로운 짐이다. 고통이다. 염려와 걱정거리다. 다윗은 3절에서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55:3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크게 분류를 나누자면 두 가지 측면에서 다윗은 괴로움의 짐을 지고 있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가 그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다윗을 향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에 죄악을 더했다.  

 먼저 이 짐은 ‘원수의 소리’와 관련되어 있다. 말과 관련되어 있는 죄악이다. 9절에는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라는 다소 과격해 보이는 표현이 있다. 쉬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주여, 악한 자들을 갈팡질팡하게 하시고, 그들의 말을 혼란스럽게 하소서.”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있어 말을 통한 의사 소통과 합의가 핵심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달라는 기도다. 마치 바벨탑에서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말, 악한 계획과 실천이 죄악을 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로 하는 일에 대해서 21절이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55:21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이들은 부드럽고 유한 말을 한다. 듣기 좋고 위로가 되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마음에 품고 있다. 그들의 말은 사실 공격하는 칼이다. 듣는 사람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11절의 “속임수”가 바로 그것이다. 마치 좋은 것인 듯, 도움이 될 것처럼, 이것이 최선이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서 이득을 취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이들은 “책망하는 자”였다(12절). 책망보다는 모욕이나 조롱, 비난이 더 적합한 단어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원색적인 비난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윗을 깎아내리고 여러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들로 사람들을 속여 죄악을 더했다. 

 다음으로 이 짐은 “악인들의 압제”와 관련되어 있다. 실제적으로 그들이 행하는 죄악이 다윗에게 큰 압력이 되어 다윗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윗은 이 광경을 멀리서부터 망원경으로 점점 가까이 보는 것처럼 묘사한다. 9절에서 다윗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에 폭력과 다툼이 계속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가서, 10절에서는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55:10 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가까이 보니 성벽 위를 두루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일은 누가 봐도 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악인들이 성을 지키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 성 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가득하다. 재난은 자연 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가져온 재난을 말한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용 당하는 상황이다. 

 더 가까이 보니 그 거리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그곳에는 악독이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떠나지를 않는다(11절). 이 성은 정의가 무너졌고 자비가 없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된 것이다. 악이 지배하고 악이 상식이 된 세상이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는 죄악에 죄악을 더했고 그것은 매우 의도적인 분노, 적대심의 결과였다(3절 하). 의도치 않았는데 벌어진 일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다윗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왕으로서 이런 상황을 보는 것이 큰 짐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 짐을 더욱 무겁고 괴롭게 만든 사실이 있다. 바로 처음에 다윗이 말한 ‘원수’와 ‘악인’이 누구냐다. 

 55:12-14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이들은 다윗이 충분히 잘 아는 사람으로서 믿을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사회에 있는 죄악과 함께 싸우고 함께 짐을 나누며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 중 다윗의 이런 상황에 가장 유사한 것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이다. 이 시에서 묘사하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러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었고 아히도벨은 최고의 책사였다.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했을 때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섰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 사용했던 계략이 바로 좋은 말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다(삼하 15:6). 그는 세상 좋은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억울한 말을 들어주고 그에게 절하려는 사람을 끌어 안고 입맞추었다(삼하 15:1-5). 반란 세력을 모으러 헤브론으로 갈 때도 다윗에게는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서원을 이루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곳에서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불러 함께 반역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압살롬은 다윗이 차기 왕으로 생각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그의 책략을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처럼 여길 정도로 신임이 있었던 사람이었다(삼하 16:23). 14절에서 다윗이 언급한 아름다운 추억을 충분히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윗과 함께 의논하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런 사람이 다윗을 비난하며 악의를 가지고 그를 공격하고 했다. 죄악을 쌓으며, 가장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야할 예루살렘을 폭력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고 무자비하고 부정직한 사회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다윗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이 모든 악이 자신이 잘 알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이런 말과 행동으로 죄악을 행하는 이유는 19절 하반부에서 언급된다. 

 55:19 …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좋은 것에 대하여 그렇게 할 때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정말로 무거운 짐, 고통의 상황이었다. 

 다윗과 같은 짐을 우리도 지고 있을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렇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지 않는 자들로 인한, 죄로 인한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자들의 죄로 인한 짐도 많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가장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이다. 다윗과 똑같은 심정일 때가 있다. 차라리 믿지 않은 사람이면 내가 이해는 하지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을 것이다. 각자가 지고 있는 짐의 종류와 크기는 다르지만, 모두 저마다의 짐은 있고 그 짐은 항상 무겁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다윗은 어떻게 해야했을까? 무엇보다 다윗이 항상 이런 면에서 잘하는 것은 그것을 빠르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무언가 다 정리가 되고 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간다. 때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도 감정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정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다윗도 그렇게 한다. 

 이 시편의 전개도 그렇다.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탄식의 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15절까지 하나님께 자신의 고된 짐에 대해서 탄식하면서 자신이 짐을 지고 있다. 하지만 16절에서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 차이를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자. 

 II내가 짐을 질 때, 나는  (1-15절) 

15절까지 다윗은 자신이 짐을 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다(1-3절)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탄식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구하면서 탄식한다. 3번이나 즉각적인 응답을 구한다. 하나님께서 귀를 닫고 계시거나 숨어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당장에 응답해주셔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불평 섞인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근심은 불평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편하지 못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안절부절 못하며 불평하고 그로 인해 탄식했다. 

 불평은 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워한다(4-5절) 

다윗이 지고 있는 짐은 고통 자체였다. 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유발했다. “심히 아파하며”는 고통 중에 몸을 비트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진통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친구들의 배신이 이런 고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내적인 고통과 함께 실제적인 외적인 고통도 있다. 죽음의 위험이 그에게 있었다. 과장된 표현으로서 “죽음같은 위험”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같은 것이 이 시편의 배경이라면 다윗의 이 표현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음의 위험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두려워하고 떨었다. 공포가 그를 덮었다고 말한다. 다윗의 표현은 흥미롭다. 그는 본래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골리앗과 싸웠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는 용사다. 하지만 두려움과 떨림이 그에게 이르렀다. 여기 “이르고”는 “들어왔다”는 의미다. 두려움과 떨림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포는 마치 거대한 덮개처럼 그를 덮었다. 즉, 그의 안과 밖이 모두 두려움, 떨림, 공포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안과 밖의 고통은 안과 밖의 두려움이었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할까? 그런 상황에서 싸우려는 사람은 드물다.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본능이다. 다윗도 그런 마음을 표출한다. 

 하려 한다(6-8절) 

할수만 있다면 최대한 안전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를 압박하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본래는 성이 안전하고 광야는 위험한 곳이여야 맞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것을 반대로 만들었다. 이곳을 벗어나 광야에 숨는 것이 안전하다. 이 상황은 “푹풍”과 “광풍”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도저히 준비를 한다고 잘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피난처로 도망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에 본능적으로 도망했던 것처럼 다윗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윗은 고난에 대한 시편을 많이 기록했지만 고난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보였던 적은 없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도피하고 싶다는 마음을 기록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한다. 그만큼 이 짐은 다윗에게 무겁고 고통스럽다.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분노한다(9-15) 

이 단락은 다윗의 호소로 시작해서 호소로 끝난다. 9절에서 그는 바벨탑과 같은 심판을 구하고 15절에서는 고라와 그 추종자들에게 내려졌던 것과 같은 심판을 구한다. 원수가 된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이 죄악된 상황에 대해 다윗은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구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있는 악을, 그로 인해 전염병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퍼진 악을, 악인들을 심판함으로 멈춰달라고 다윗은 하나님께 분노가운데 호소한다. 

 악에 대한 다윗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에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12절에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그의 분노는 단순히 ‘악’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고 그 악이 자신의 친구에게서 나왔다는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다윗이 역사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면서 조금은 과격하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금의 악이 당장에 멈춰야하는 것도 이유이지만 그 악을 자신이 믿고 의지했었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다. 

 다윗이 자신의 짐을 지고 있을 때 보인 반응은 우리도 흔히 우리 짐을 지고 있으면서 보이는 반응이다. 불평하고 두려워하고 도망치려하고 분노한다. 짐이 무겁고 버거우니 보이는 반응이다. 그 자체로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은 반응인데, 사탄은 이런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불평하는 것은 괜찮고 오히려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속으로 삭히는 것보다 100배는 낫다고 말한다. 두려운 감정은 더욱 키운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도피하는 것도 가능한 해결책이라고 한다. 지금을 감당할 수 없으면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하라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피하거나 끊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 도피는 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분노하라고 한다. 다윗의 경우처럼 기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분노하고 되갚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사탄은 이렇게 하면 우리가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속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혹은 겉으로는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제시하신다. 다윗은 15절까지는 자신이 짐을 지고 있었지만, 16절부터는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III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은  (16-23절) 

들으신다(16-17절)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소리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소리도 들으신다(19절).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의심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은 들으신다. 알고 계시다. 그리고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정반대의 모습으로 행하실 것이다. 

구하신다(18. 22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구하신다(16절). 비둘기의 날개가 없어도, 피난처로 도망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전쟁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시는 분이시다(18절). 나를 붙드셔서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22절).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상황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흔들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멸하신다(19-21, 23절) 

반대로 앞서 언급했던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이웃을 배반하고 속이고 싸우는 자들,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이다(19절). 예부터 계시는 하나님은 예부터 그렇게 해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나님은 내리실 것이다. 

내가 불평하고,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고, 분노하는 이 상황들, 그렇게 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이 짐들을 하나님은 해결하신다. 

  

이렇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흥미롭게도 여기 나오는 ‘짐’이란 단어는 성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어로서 후에는 ‘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하면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짐이라는 것이 그렇다. 좁은 의미에서 짐은 내가 원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짐은 항상 내려놓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짐은 염려고 걱정이다. 고난이다. 

 어쩌면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시발점은 짐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 짐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 허락하신 것이라는 의미다.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나에게 허락되고 주어진 것이니 하나님께로 다시 가져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짐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진짜로 짐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고 그럼 나에게는 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 짐을 맡긴다는 것은 16-23절에서 다윗이 하겠다고 한 것들이다. 즉,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기도하고 불평, 두려움, 분노,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 상황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 결국 짐은 내가 계속 지고 있는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게 맞다. 말씀에서도 22절에 보면 하나님께 짐을 맡긴 것에 대한 결과로서 하나님이 너의 짐을 대신 지실거고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요동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께서 짐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도록 도우신다는 의미다. 이길 수 있게 하신다는 의미다. 

 삶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평, 두려움, 도피, 분노로 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 능력을 기도로 의지하며 그 짐을 지고 그 짐을 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참된 삶의 짐을 내려놓는 유일한 방법이다. 

 

도전 

결국 이 시편의 교훈은 신약의 이 말씀들로 이어진다.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어떤 짐이든 우리는 염려할 수 있다. 불평하고 두려워할 수 있다. 도망할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지키시는 하나님께 유일한 해결이 있다. 그 하나님의 의지하여 기도로 우리의 짐을 맡기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셔서 우리를 평안하게 흔들리지 않게 붙드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