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날 때부터 눈 먼 사람(들) 3

본문: 요한복음 9장 35-41절

설교자: 최종혁

요한복음 9장을 통해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다. 육적으로 눈먼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가셨고 예수님은 그의 눈멂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다.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그와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셨을 때, 진짜 눈먼 사람이 누구인지가 드러났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 눈 앞에 펼쳐진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이 드러내는 명백한 진리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전제를 결론으로 내려놓고, 어떻게든 그에 부합하는 사실들만을 찾고 그런 증언만을 들으려고 했다. 맹인이었던 자가 점점 빛으로 나아오는 동안 그들은 점점 더 깊은 영적 어둠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신의 특징을 보았다. 그들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진리에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고했다. 맹인되었다 자가 사실에 기초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말하자 그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를 쫓아냈다. 그들의 교만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쫓겨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되는 것 같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맹인이 예수님을 만난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고 이 모든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진짜 이유도 이제 밝혀진다.

계속 이야기 했던 것처럼 맹인은 여러모로 어둠 속에서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그를 저주 받은 자로 생각했다. 그의 죄 때문이든 부모의 죄 때문이든, 어쨌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겼다. 그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장애를 가진 자로서 당연히 성전이든 회당이든 마음껏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다. 뒤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부모도 그를 사랑으로 돌보지 않았다. 부모는 그가 “장성”했다고 말했는데, 작게는 13살을 의미한다. 실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그 나이까지 거리의 걸인으로 살아야 했다.

눈을 뜬 이후에는 모든게 달라질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뜬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와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부모도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와 거리를 두었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를 죄인 취급했고 그를 욕하고 결국 내쫓았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그에게 세상은 어두웠던 것이다. 그의 어렵고 힘든 삶의 원인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달라진 삶을 기대했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는 비슷한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바로 그 때, 처음 어둠 가운데 있던 그를 찾아오셨을 때처럼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9: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성전 근처에서 벌어졌던 이 일은 분명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었고 결국 그가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맹인이었던 자의 부모가 우려했던 일이 결코 기우가 아님도 사람들로 인지하게 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쫓겨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의 부모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기 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여튼, 맹인이었던 자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예수님은 들으셨고 그를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신 후에 사라지셨었는데 그가 다시 버림 받았을 때 다시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지나가다 어쩌다 보신 것이 아니라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 오셨다.

왜 지금일까? 애초에 이 사람이 실로암에 갔다가 올 때까지 기다리실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이 눈을 뜬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때 내가 그의 눈을 뜨게 했다고 자신을 드러내실 수도 있었다. 그가 부모에게 버림 받고 바리새인들에게 욕을 먹을 때도 함께 계시면서 그를 변호하실 수도 있었다. 그 때는 어디 가셨다가 이제야 그를 찾아오셨을까?

사실 이 질문은 처음 이 사람이 맹인이었을 때 사람들이 했던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그를 이런 고통 속에 내버려두셨을까? 질문이 같기 때문에, 답도 같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그렇게 하셨다. 그의 보지못하는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것처럼 그 이후 고통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상황을 보면 점점 나빠져간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저 눈을 뜨게 된 그에게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훨씬 더 적대적이었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물었지만 마지 왜 눈을 떴는냐고 따지는 듯이 그를 심문했다. 그의 부모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며 그의 편에 서기를 거부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욕을 하며 그를 비난했고 결국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통과하며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점점 분명해져 갔다. 처음 그는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었다(11, 15절).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물음에는 “선지자”라고 답했다(17절). 그리고 쫓겨나기 전 그는 예수님을 창세 이후로 유일하게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분명하게 설명했다(30-33절).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또 다른 이유나 목적이 있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상황을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의 눈도 점점 시력을 찾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시 27:10)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셨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에 예수님은 그에게 순종을 명령하셨지만, 이번에는 질문을 하셨다. 앞선 명령에는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이땅에서의 남은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순종이었다면,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영원한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답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와서 “힘들지?”라고 묻지 않으셨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금 얼마나 분한지와 같은 것을 묻지 않으셨다. 이 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제대로 물었듯, 이 사건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예수는 누구인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답을 정해두었다. 그들이 정한 답은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였다(16절).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였다(22절). ‘예수는 죄인이다’였다(24절).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는지도 확인하고, 진짜로 예수님이 그를 볼 수 있게 했는지도 확인했다. 증인은 맹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같은 증언을 하면서 ‘어떻게’ 이 사실을 이해해야하는 지를 물었다. 그의 부모는 상황을 파악하고 예수님을 언급하기는 거부했지만 그가 맹인으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보게 된 것도 증언했다.

이 모든 사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였다.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했던 결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핵심 증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맹인이었던 자를 그들 중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바리새인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도 어쨌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기를 거부했다. 사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이적을 목격했지만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불가지론자들과 불신자들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 예수님께서 맹인이었던 자를 찾아와 물으신 것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예수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셨다. 인자는 다니엘 7:13에서 하늘에서 올 메시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자는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면서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드러내셨다.

3:13–14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6:27 …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물으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믿느냐”.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며 1인칭으로 사용하신 ‘인자’라는 표현을 타인을 지칭하는 3인칭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되물었다.

9: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유대인으로서 그도 ‘인자’라는 타이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사실에 대한 지식을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정중하게 예수님께 다시 물은 것이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여기서 “주여”는 우리말의 “선생님” 정도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를 높여서 정중하게 부를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다.) 아마 그는 그에게 와서 말을 건 이 사람이 그의 눈을 뜨게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눈을 뜨게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즉 인자이자 메시야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줄만 알면 그는 믿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기 위해서 물었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믿고자 했다. 그의 마음은 100% 열려있었다.

어떻게 그의 마음이 이렇게 준비되어 있을 수 있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불가지론자나 불신자였는데, 어떻게 이 사람의 마음만 이렇게 달랐을까? 다른 사람은 간접 경험이었고 이 사람만 직접 경험이었기 때문일까? 그것이 차이를 만들 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10명이 모두 동일하게 고침을 받았다. 누구는 더 깨끗해지고 누구는 덜 깨끗해지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7:19).

비슷한 일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무엇이 사람이 마음을 여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다.

16:13–14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바울이 하는 말을 루디아만 들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주께서 마음을 열어 바울을 말을 따르게 한 사람은 루디아였다. 루디아가 마음을 열어 복음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그 어떤 설득력 있는 말이라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 어떤 유창한 말도 의미가 없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린 아이의 말이라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고전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전도했던 장면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매우 전략적이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셔야함을 그는 알고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했다.

맹인이었던 자가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하셨던 것이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그는 마치 시력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서서히 알아갔고, 이제는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이야기는 모든 영적으로 눈먼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고자 그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가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태어난다. 육적으로는 일부의 사람이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그렇다. 모두가 영적인 맹인이어서 앞을 보지 못한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다.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사실 그런 노력조차 하려고하지 않는다.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 어둠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먼저 보시고 그를 찾아오신 것처럼, 그리고 그의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구원할 자를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그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말 구원 받은 자라면 누구도 “내가 믿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은 맹인이 “내가 눈을 떴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내가 실로암에 가서 내가 내 눈을 씻었고 그래서 보게 되었으니 내가 눈을 뜬 것이다라고 맹인이었던 사람이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고, 그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증언했던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진짜 눈을 뜬 사람의 고백이다. 잃었던 생명을 찾고 광명을 얻은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놀라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믿나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맹인이었던 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다. “인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셨다.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보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들었겠지만 평생을 맹인으로 살아온 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특별하게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직접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뜨게한 너의 눈으로 지금 그 사람을 보고 있지 않느냐. 지금 너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네가 믿고자 하는 메시야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다. 예수님은 먼저 바울이 보지 못하게 하셨고 다시 그의 눈을 보게 하시면서 그를 구원하셨다. 그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맹인이었던 자 앞에 구원의 빛이 환하게 비추이고 있었다. 그 빛이신 예수님 앞에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는 동일하게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지만 의미는 달라졌다. 앞선 “주여”는 일반적이고 정중한 표현이었다면 여기 “주여”는 겸손과 낮아짐의 표현이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 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이것은 날 때부터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 그 눈을 뜨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때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다.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절한다. 예배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합당한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배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렇게 한다. 담대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경험할 수도 있다. 삶에서 누려왔던 좋은 것들을 빼앗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기 보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고난 받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이제는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떠서 보고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우리도 맹인인가”

맹인이었던 자의 믿음의 예배로 이제 모든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고,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주셨다.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은 때로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심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때로는 평화를 준자고 말씀하셨는데 때로는 평화가 아닌 검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말씀하신 것 뿐이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오셨던 것은 최종적인 심판을 하러 오셨던 것은 아니었다. 최종적인 심판은 우리가 지금 계시록을 통해 매주 배우고 있는 것처럼 나중의 일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16 이하에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심판 받는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자들, 이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는 자들로서 맹인이 된 자들이다. 영적인 측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할 뿐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요한복음 9장에서 만난 바리새인들이 정확히 이런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에게 더 이상의 가르침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40절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이 바리새인들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예수님의 맹인에 대한 말씀에 갑자기 끼어들어 “우리도 맹인인가”라며 스스로 맹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본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맹인이어도 자신들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참아도 자기들을 맹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들이 진짜 맹인이었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진짜 맹인이었으면 영적으로도 맹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의도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더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라고도 표현하셨었다(마 15:14). 그들은 스스로 ‘인도하는 자’라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맹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 역시 날 때부터 눈먼 자들로서 겸손히 예수님의 빛 앞에 나오지 않으면 심판받을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39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보지 못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보지 못함을 인정하는 자를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보게 하신다. 그들이 구원의 빛을 경험한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아니라 “제가 맹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교훈

이제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살펴봤다. 물론 아직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10장 21절에 가서도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두고 같은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24절에서는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고 요청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말을 듣지 않는’ 그들에게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시지만, 결국 예수님의 양이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여기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이고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이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같다면, 적어도 한번쯤은 정말 진지하게 성경이 말하는 사실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사실을 사실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성경을 비판하기위해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도 많다. 제목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대충 알고 있는 성경 지식으로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성경이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고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만약 자신이 이 말씀의 맹인처럼 예수님을 만나 빛으로 나아왔다면,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참된 예배자가 되길 바란다. 눈을 뜨는데 맹인이 한 일이 없는 것처럼, 구원 받는데 우리가 한 일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라고 남들과 달라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은혜이고, 놀라운 은혜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 예배는 예배당에 모여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맹인이었던 자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언하고 주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고난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숨기고 소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빛이신 예수님을 더 밝히 전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셨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빛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할 낮이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길 구하며, 담대하게 주님을 선포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은 무관심할 것이고 누군가는 욕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이상한 반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그 일에 우리의 순종이 쓰임 받는다면 그 역시 우리가 크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두려움 없는 증인, 두려움 없는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