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교회
본문: 골로새서 3장 12~17절
설교자: 최종혁

지난 제 설교본문이었던 골로새서 1:15~20 말씀에서 예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새 창조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하시고 동시에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삽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1:16), 그 안에서 구원 받았고(1:14), 이제 그 안에서 행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골 2:6).

새 창조는 구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자가 다시 그 의미와 목적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엡 2).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구원 받은 자는 이전과 동일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구원에는 변화가 따라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생각하라(골 3:1-2)”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해야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골 3:8)”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골 3:9-10).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라면 달라야 합니다. 이것이 골로새서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럼 그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2~17)”

본문의 핵심은 하나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하나됨’입니다.

세상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4-16)”

우리 안에 있는 시기와 다툼은 죄와 정욕의 특징입니다. 죄의 근본에 있는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 나의 유익을 최우선에 두는 이기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 분열과 시기, 다툼이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있으니 당연히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땅, 육에 속한 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따라서 하늘, 영에 속한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그 반대인 사랑이고 그 공동체는 하나됨으로 그들의 사랑이 진실임을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하나되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래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그리스도의 마음(12~14절) – 하나되기 위한 성품

2. 그리스도의 평강(15절) – 하나되기 위한 노력

3. 그리스도의 말씀(16~17절) – 하나되기 위한 지침

1. 그리스도의 마음(12~14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12절)

교회의 하나됨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기 전에 바울은 먼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어떤 자들인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신분이 어떠한지를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거룩하게 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신 7:6~11) 그 목적은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고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동일한 일을 하나님은 교회에 대하여 하셨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교회를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선택하실 때도 하나님은 선택 받는 쪽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선택은 오직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특징입니다.

세상의 많은 공동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하나로 묶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민족, 언어, 성별, 고향, 학교, 출신 부대, 종교 등의 공통점은 그 공동체를 정의하는 정체성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때로는 그것이 차별이 됩니다. 그 차별이 미움이 되고 다툼이 되고 싸움이 되고 전쟁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모든 차별이 무효화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11절). 누구도 자신의 어떠함을 자랑할 수 없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자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는 무언가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 사이에서는 여러 관계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문제를 공동체는 그들의 정체성, 즉 그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을 가지고 해결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결국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 복잡한 관계가 있고 관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교회에게 그리스도가 전부라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라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정체성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몸인 교회가 어떻게 공통체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길 원하실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보겠습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이 사람들은 바로 교회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었나요? 하나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0” 신분적으로 하나된 우리가 실제적으로도 하나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먼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그렇다면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구원 받은 자라면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긍휼”은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친절함, 인자, 선을 행하려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낮아짐, 섬김이고 “온유”는 부드러움이며 “오래 참음”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에게 이런 성품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성품들은 8~9절에서 말하고 있는 “버려야할 것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성품입니다. 8절 말씀 8~9절에서 말하는 것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무너지게 하는 것들이라면 여기 언급되는 덕목들은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세우는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성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되기 위한 기초가 됩니다.

이런 성품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성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품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것들로 옷 입고 계셨던 분이십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영적인 필요, 육적인 필요를 모두 돌아보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멸시 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세리들, 여인들, 어린이들에게도 친절하시고 선을 행하셨습니다. 겸손히 낮아지셨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스승으로서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온유함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셨고 돌아보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죄인들에 대해서 참으시고, 제자들에 대해서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이 모든 성품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로 드러났습니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지만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당했지만 대항하여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어떤 일을 할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실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외부에 적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같이 하면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또 그래서 필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의 하나됨은 그런 것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 입기 시작할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런 성품은 실제로 이렇게 드러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13절)

바울은 한 성도가 다른 성도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경우를 가정합니다. 이런 일은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한 성도가 다른 성도에게 무언가를 잘못한 상황입니다. 8~9절에 나오는 그런 일을 한 성도가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속에서 불평과 불만, 원망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그럼,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교회가 아닌 다른 공동체 안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경우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그리스도를 닮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주님처럼 반응할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은 그런 상황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고 억울한 것을 싸워서라도 풀고 싶습니다. 최소한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인정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고 지금도 내 옆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제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참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세워주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 분열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결과를 낳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싸우는 대신에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적당히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만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면, 그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왕이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잠깐 이 말씀을 내 삶 가운데 적용해보십시오.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할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남편, 아내, 자녀, 직장 동료, 아니면 지금 예배당에 내가 일부러 거리를 두고 멀리 앉아 있는 한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혹 누군가 떠오른다면, 이 말씀을 꼭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님을 말합니다. “서로”, “피차” 이것이 교회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변화된 성품으로 옷 입을 때, 교회는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는 특징을 가진 공동체가 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절)”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의 요약이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 바울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기본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각자의 성격이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각자가 자란 환경이 다르고 지금 살고 있는 환경도 다릅니다. 재능도 다르고 능력도 다릅니다. 은사가 다릅니다. 그런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지체들입니다.

이런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차이가 없다면 교회는 다양하게 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이 이런 차이를 갈등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꼭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은사의 차이, 관심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여러 갈등이 교회 안에는 있습니다. 은사의 차이란 교회 안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런 교회를 온전하게 묶어서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혀 그런 감정이 없을 때라도 나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가 아닌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우리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옛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입고, 새 사람을 입기를 거절한다면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고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우리가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될 때에 세상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평강(15절)

사도바울은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있다 보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15절)

그리스도의 평강 혹은 평안은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개인적인 차원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은 때로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네 마음에 평안함에 따라서 결정해라”라고 말할 때, 이 말씀이 인용되기도 하는데 그것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로 “그리스도의 평강” 보다는 “나의 평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들이 서로 화평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성도들 간의 화평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즉 우리 마음의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별히 바울은 여기서 교회 안 성도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 핵심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결정을 하게 되는데, 그 때에 가치의 핵심, 우선순위에 둘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평케 하신 것처럼 우리도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는 싸우는 자, 편을 가르는 자, 다투는 자, 경쟁하는 자의 모임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어떤 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끼면 그렇게 결정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연약함들은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도와줘야하는 부분이지,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교회는 가장 연약하고 육신적인 사람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화평 혹은 하나됨을 항상 마음 속에 두고 그것이 무엇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이 우리 마음을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우리는 어떻게든 내 유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교회 안의 여러 부서가 행사 준비를 합니다. 만약 경쟁이 우리를 주장한다면 어떨까요? 연습 시간과 장소를 두고 싸울 것입니다. 끝나고 나서 누가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순위를 매길 것입니다.

만약 “개인의 관심”이나 “선호”가 우리 마음을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예배 시간에 우린 어떤 찬양을 드려야 할까요? 악기는 쓰는 게 좋을까 쓰지 않는 게 좋을까요?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각자가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 마음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냥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경쟁, 다툼, 분열, 개인의 관심 같은 것이 아니고 서로 평안한 것, 즉 하나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부르심의 목적이 ‘평강’에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신분에서 당위성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로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강을 위하여서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관계에 있어 지배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나의 유익을 추구하려고 하고, 그것은 끊임없이 다툼과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바울은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17절에서는 “감사하라”는 동사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감사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말입니다.

감사의 반대는 감사하지 않는 것, 불만, 불평입니다. 불만과 불평은 지금 가진 것보다 무언가를 더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면 욕심이 되고 욕심은 싸움과 다툼으로 이어집니다(약 4:1).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감사의 태도입니다. 감사는 어떤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하기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 허락하신 사람들 속에서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됨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3. 그리스도의 말씀(16~17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합니다. 16절과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은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공적 예배라면, 17절은 성도 개개인이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공적 예배(16절) –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회가 모였을 때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합니다. 우리 교회의 말로 바꿔보면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고 설교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교회마다, 성도들 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가르침은 어때야 하고 권면은 어때야 하고, 어떤 찬양이 더 좋고 어떤 기도가 더 좋다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그런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예배의 지침이 될 때, 우리는 하나되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포괄적으로 본문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삶의 예배(17절)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삶의 예배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는 삶으로 예배합니다. 그 예배의 지침도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내가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라면, 내가 하는 말이 주의 말이고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입니다.

은사와 재능에 따라서 각자가 다른 일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설거지 봉사를 하든 주일학교 교사를 하든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찬양을 해도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성도와 교제를 해도 주의 이름으로 합니다. 직장에 가도, 학교에 가도 주의 이름으로 갑니다. 가족들과 여행을 가도 주의 이름으로 갑니다.

무엇을 하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살아갈 때 분명 부딪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가치를 가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때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고,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기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문제의 해결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이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획일화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다 똑같이 이렇게 해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교회의 모습은 획일화된 교회가 아니라 하나된 교회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동기로,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는 하나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되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도전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왜 나에게 나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가 용납해야할까요? 그냥 안보면 그만인데, 왜 용서해야할까요? 왜 굳이 피곤하게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추구해야 할까요? 내가 편한 게 좋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왜 성경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고 할까요? 교회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렇게 해야한다고 왜 그렇게 강조할까요?

먼저는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분에서 강조한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었고, 이제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될 때에 하나님이 세상에 드러나고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높임을 받으시길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높임을 받으실까요?

세상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본래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육신으로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십시오.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할 때, 주님의 마음, 주님의 평강,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가득할 때, 세상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그것을 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택함 받아 거룩하게 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새 사람을 입은 자처럼, 그리스도가 전부인 사람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처럼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