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팔려가는 요셉
본문: 창세기 37장 12~36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요셉의 꿈과 그 꿈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을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요셉의 형들이 동생인 요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고,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요셉, 그리고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자신이 왕이나 될 것처럼 말합니다. 도대체 좋게 볼 수 없는 철없는 녀석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원인이 되어서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야곱은 양 떼를 치기 위해 세겜까지 간 아들들이 마음에 걸려서 요셉을 그들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요셉이 그곳에 가서 형들을 살펴보고 혹시 문제가 있으면 자신에게 말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정보원을 보내는 겁니다. 이미 전에도 요셉은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야곱이 보기에 요셉은 이 일의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잘 몰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 역시도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형들을 찾아 그냥 길을 떠난 것을 보면, 형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애굽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 야곱에게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집니다.

 이렇게 요셉은 형들을 만나려고 집을 떠나는데, 이 일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 곳에 가는 거니까 간단한 일이겠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시키는 거니까 쉬운 일이겠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요셉이 가야하는 거리를 따져보면 보통일이 아닙니다.

 요셉은 헤브론에서 출발해서 세겜까지 가야 하는데(14), 그 거리가 대략 80킬로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 혼자서 가기에는 버거운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3~4일은 족히 걸어가야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4일을 걸어가는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아버지가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요셉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요셉, 그의 나이 열일곱.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늦둥이 십대 아들. 하지만 요셉은 그 길을 혼자서 갑니다. 멀리 세겜까지 음식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잠은 어디서 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요셉이 세겜에 도착하니 형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형들은 벌써 다른 곳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형들은 없습니다. 지금처럼 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고 편하게 지도를 볼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세겜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형들이 없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멀리 이곳까지 힘들게 왔는데 요셉은 들에서 방황합니다. 형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겁니다.

 그 때 들에서 방황하고 있는 요셉에게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네가 무엇을 찾느냐?”(15) 놀랍게도 그 사람은 형들이 간 곳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이 도움을 얻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도단은 지금 요셉이 있는 세겜에서 21킬로 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요셉의 여정을 생각하면 남쪽에 헤브론이 있고, 북쪽으로 세겜이 있고, 더 북쪽에 도단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도단은 다메섹과 애굽을 연결하는 길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지나던 통로였습니다. 지형적으로 상당히 험한 곳이지만 풀과 물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이 도단에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는 더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요셉의 형들은 가까운 지역을 두고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양들을 치고 있었던 걸까요? 아버지 눈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면 생각 없이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을까요?

 가나안 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어디에서나 방목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그렇게 양을 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보리와 밀을 추수한 지역으로 가서 양을 치고, 그 이후에는 물과 풀이 있는 산악지대로 옮겨 다닙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길을 떠난 때가 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먼 길이지만 헤브론 골짜기에서 출발한 요셉은 형들이 있는 도단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온갖 위험에 노출된 상태로 혼자 형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지금, 모든 위험을 넘기고 안전하게 형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에게 정말 위험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을 보호해야 했던 형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어찌되었든 요셉은 이렇게 멀리까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혼자서 5일 이상을 걸으며 형들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요셉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되는 형들의 모습이 18절부터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요셉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형들이 대조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형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요셉이 이들을 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16절에 요셉이 했던 말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16) 어쩌면 이 말은 요셉 이야기에서 하나의 큰 질문과도 같은 말입니다.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요셉은 형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 도단에서 찾은 형들을 요셉의 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요셉은 언제 형제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형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요셉이 도단에 도착하자,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멀리서부터 봅니다. 채색옷을 입고 있는 요셉은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온다며 비아냥거리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렇게 해서 형들이 생각한 것은 요셉을 죽이고 구덩이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존속살인과 시체은닉이라는 끔찍한 범행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범죄입니다. 또한 이들은 동생을 죽인 후에 이 일은 은폐하기 위한 대책을 세웁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20)

 재미있는 말입니다.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악한 짐승인가요? 늑대일까요? 사실, 요셉의 생명을 빼앗는 악한 짐승은 요셉의 형들입니다.

 왜 요셉의 형들이 악한 짐승이 되었습니까?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했던 동기는 동생을 향한 시기와 미움입니다. 마음에 있는 시기와 미움을 다스리지 않으면 이런 무서운 열매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도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가인은 아벨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다스리지 않았고, 결국 동생을 죽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비참한 인생의 결말을 맞이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시기와 그로 인해 생기는 미움은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나뉘게 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미움은 순식간에 커져버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 무엇이든 다 나쁘게 보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이나 사울이나 요셉의 형들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악한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쉽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3:15)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살인과도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뿐만 아니라 결국은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는 미워하는 마음, 그 악한 마음에 매여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순간순간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내가 할 일은 그 마음을 다스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억하는 일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마땅한 나를 하나님은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를 거절하고,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죠? 도대체 사랑할 만한 구석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죠?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와 비교를 하겠습니까? 혹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고 내 안에 생기는 미움을 다스리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동생을 향한 미움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죽임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 무엇일까요? 살인의 목적에 대해서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20) 형들은 요셉을 죽여서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고 합니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획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히 맏형 르우벤은 요셉을 생각합니다. 상황을 봐서 요셉을 구출해서 아버지에게 보낼 계획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는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르우벤의 제안에 따라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집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물이 없어서 지금은 살아있지만, 계속 여기에 갇혀있으면 물이 없어서 죽게 될 상황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형들의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요셉은 오랜 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입니다.

 동생을 구덩이에 던져 넣은 형들은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합니까? 형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25). 동생을 죽이려고 가둬두고 그 곁에서 자기들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17년을 함께 지낸 동생입니다. 정말 잔인한 형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형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상인들을 보게 되었고, 유다가 요셉을 노예로 팔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따릅니다. 요셉이 팔려 갈 때 형들에게 얼마나 애원하며 도움을 구했을까요? 훗날 그들이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형들은 애원하는 동생을 모른척했고 매정하게 동생을 팔아버립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정작 요셉의 말은 한 마디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마치 요셉이 정말 죽은 것처럼 요셉의 입에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은20에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고, 요셉의 채색옷은 염소의 피가 적셔진 상태로 야곱에게 보내집니다. 형들은 요셉의 죽음을 직접 말하기보다 조작된 증거를 보여주고 아버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의도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옷을 주며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32)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할 때는 비상하게 머리를 잘 씁니다. 놀라운 지적능력을 발휘해서 정말 어리석은 일,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겁니다.

 야곱은 요셉의 옷을 보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애통합니다. 오랫동안 슬퍼합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의 위로를 받지 않습니다. 자신이 요셉에게 가겠다고 말하며 죽은 아들을 위해 슬피 웁니다. 야곱의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클까요? 자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시켰을까? 세겜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후회를 하며 괴로워했을까요?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과 깊은 슬픔에 빠진 야곱에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묘하게 반복되는 야곱의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처럼 야곱의 아들도 아버지를 속입니다. 옛적에 야곱이 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속인 것처럼, 지금 야곱의 아들도 염소를 가지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에게 같은 일을 당합니다. 자신이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상황을 보면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로 애굽에 팔려갑니다. 혼자서 며칠 동안 먼 길을 걸어가는 수고를 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노예라는 신분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이야기한 것뿐이고,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요? 요셉에게는 너무도 과혹한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형들은 동생을 향한 미움을 다스리지 못해 끔찍한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계획대로 요셉을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꿈도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파괴되었고 산산이 부서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요셉의 꿈이 요셉 자신의 것이라면, 꿈의 성취가 요셉에게 달려있다면, 요셉의 꿈은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꿈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사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막은 것이 아니라 꿈의 성취를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을 막기 위해, 그 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는 마음으로 동생을 애굽에 팔았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훗날 요셉이 이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적들의 음모와 죄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그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내 삶에 벌어지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과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요셉과 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며 성실하게 나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기, 미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 아무리 많은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결국 완벽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온전하신 뜻을 위해, 모든 것을 합당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잘 아시기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기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냥 그분께 그분의 자리를 맡겨드립니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가운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여러 일들 중에서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습니까? 피하고 싶은 일들, 무시하고 싶은 상황들, 그냥 덮어두고 싶은 것들, 속 시원하게 욕하고 싶은 사람, 마주치기도 싫은 사람, 절대로 호감이 생길 수 없는 까다로운 사람, 정말 악한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멈추지 말고, 피하지 말고,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내가 뿌려야 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내가 해야 할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며, 내가 베풀어야 할 긍휼과 자비를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며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이 만들어가고 계시는 인생의 큰 그림 속에 나에게 맡겨진 어느 한 부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