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을 잊은 하나님의 예배자들에게
본문: 시편 50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가끔씩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에 의문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당장에 내일 시험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니 지금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지금 시험을 보고 있지는 않으니 폰으로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뒤적거린다. 학생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비슷하다. 일은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미루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나라의 시민처럼 오늘을 살기가 쉽지 않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정말 그런 것처럼 살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육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이런 것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정말 지금 하나님께서 내 옆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보고 계신다면 (실제로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만약 이 일을 여전히 할 것 같다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할까?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나의 예배는 어떻게 달라질까?

사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내가 실제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지금과 달라질 것들이 있다면 그만큼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다.

오늘 시편이 바로 그런 장면을 그린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눈을 뜨라고 책망하신다. 눈을 감고 하나님은 보지 않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예배하고 싶은대로 예배하고 살고 싶은대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눈을 떠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올바르게 예배하고 올바르게 살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신다.

이 책망과 명령은 매우 엄중하다. 그래서 이 시편은 아주 엄중한 상황을 그린다. 바로 재판이다.

상황 – 재판(1-6)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1절)

먼저 시인인 아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히브리어 세 단어로 표현한다. 엘, 엘로힘, 야웨. 우리 성경에는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엘”은 주로 창조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지칭한다. 엘로힘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야웨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신 이름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 표현들이 다 중요하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는 말씀이다. 다른 누가 와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다. 바로 이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께서 재판장으로 재판을 여신다. 먼저 그분은 세상을 부르신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해 돋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이니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4절에서는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불러]”라고 말하는데, 이 역시 하늘과 땅을 부르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증인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이다. 좌우양옆 뿐 아니라 위아래의 가능한 모든 증인들을 불러 모으신다. 증인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1절만 봐서는 이들을 왜 부르시는지 알 수 없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온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불러 모으신다는 말만 하고 있다.

2-3절은 그렇게 증인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장엄하게 임하심을 그려낸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2절)

시온은 시편 48편에서 봤던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온전히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그 곳이 온전히 아름답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오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빛과 삼키는 불과 광풍으로 표현된다(3절).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이런 거대한 현상들이 종종 함께 언급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도 우레, 번개, 빽빽한 구름, 불, 연기 등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다. 이런 거대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현상들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부르시고 그 안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잠잠하지 아니하실 것이다(3절).

잠잠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 그대로다. 그냥 아무 말하지 않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무엇을 하실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4절)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에서는 뭔가 불길한 표현이다. 3절의 시작에서도 이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여서 뭔가 우리에게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뉘앙스였는데, 4절은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여전히 이 판결은 좋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하늘과 땅은 이 판결에 있어서 중요한 증인이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몇 번이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지금 하나님은 그 증인들을 불러 세우고 계시다. 그리고 마침내 피고들을 부르신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5절)

하나님은 피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들은 “성도들”이다. 이들이 진실로 거룩한 자들인지, 즉 믿고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언약의 백성 안에 포함된 자들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언약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하나님은 제사로 언약한 이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공적으로 체결할 때(비준할 때), 하나님께 제사(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피를 가지고 그들에게 뿌리며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선포했었다(출 24:4-8). 제사로 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우리말로는 “언약하다” 혹은 “언약을 맺는다”고 표현하는데 원어를 그대로 옮기면 “언약을 자르다/쪼개다”가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짐승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그들이 맺는 언약이 엄중하며 따라서 신실하게 언약을 지킬 것을 다짐했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계속해서 짐승의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이런 엄중한 언약을 맺었음을 계속해서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재판관이 입장한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6절)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재판관이시다. 그리고 이제 그 백성을 판결하실 것이다. 판결의 내용이 그들에게 호의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실 것인가?

 

I. 첫번째 판결문 – 그들의 공예배에 대하여(7-15절)

이 판결문은 고발 내용과 지시 사항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판결문을 말하기에 앞서서 백성들을 부르시며 지금부터 그들이 들을 말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신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7절)

공의의 재판관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전해질 내용은 객관적으로 공정할 뿐 아니라 악의가 전혀 없는 애정 어린 책망이자 명령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A. 고발 내용(8-13절)

첫번째 고발의 내용은 그들이 드리는 공예배 혹은 의식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부분이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8절)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 즉 예배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책망하시지만 그들이 드리는 제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제사는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적절한 제사를 드렸다. 적절한 의복을 입고 적절한 짐승을 가져와서 적절한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다했는데,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의 공예배에 대해 고발하시는 내용을 보라.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9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10절)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11절)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12절)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절)

이 고발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하나님은 “난 너희의 제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물을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다(9절). 하나님은 그 당연함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재물을 가져갈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하나님은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으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짐승들이 하나님의 것이다(10-11절).

혹시 하나님이 배고프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치자(12절). 그래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실 이유가 없다. 온 세계가,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12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져오는 제물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셔야만 허기를 면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13절).

갑자기 이런 말씀을 왜 하시는걸까? 누가 하나님이 이렇다고 생각이나 할까? 당시의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이 필요한 것을 그들이 주면 그들이 필요한 것을 신이 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비슷한 생각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즉, 어떤 사람은 정말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필요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만들 수 있다. 의무감에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만든다.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다가 때가 되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을 마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리의 예배만 기다리고 계시는 분인 것처럼 만든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필요로 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절대로 아니고, 사실은 정확히 반대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하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만 드려지는 예배는 전혀 그 반대의 사실을 주장한다.

B. 지시 사항(14-15절)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던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지시하신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4-15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즉 공적으로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제사는 “감사”의 제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서원을 갚으라는 명령도 마찬가지 의미다. 그들이 서원하여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조금은 갑작스러운 명령을 하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조금만 더 읽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모습이다.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날마다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살면서 하나님을 잊고 살면 형식적인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내게 일어난 좋은 일들은 내가 이루어낸 성취일 뿐이고, 그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가 된다. 그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려지는 예배라고 해도 예배가 될 수 없다. 감사가 빠진 예배는 자신을 영화롭게 할 뿐이다.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니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얼마나 끔찍한 감사 기도인가! 이것은 감사의 예배가 아니다. 자기를 영화롭게하는 형식만 남은 예배일 뿐이다. 그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구원을 경험하며 감사하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된 감사가 나오고 그것이 올바른 형식의 예배가 된다.

이것이 참된 예배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런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를 준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예배가 시작하기 몇 분 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예배이자 예배를 준비하는 날들이다. 삶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면서 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매일의 감사가 모여 감사의 예배가 되고 그런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II. 두번째 판결문 – 그들의 삶예배에 대하여(16-23절)

이 두번째 판결문에서 하나님은 더욱 직접적으로 삶예배의 문제를 지적하신다.

A. 고발 내용(16-21절)

공예배가 올바르게 드려지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는 삶을 지적하셨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험하며 감사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두번째 고발에서는 좀 더 심각한 경우를 다루신다. 이들을 하나님은 “악인”이라고 부르신다. 먼저 언급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잊었다면 이 사람들은 뻔뻔하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뻔뻔함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외식적인 예배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그런 예배가 가당키나 하냐고 물으신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16절)

우리말 번역 > “네가 무슨 권리로 내 법을 말하고 내 언약을 네 입에 담느냐?”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권리가 없는 자들이다. 왜냐면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에 던지며”(17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지만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 “앞”에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뒤”에 둔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진리를 싫어하고 거기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말씀에 듣지 않는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이 이들이 하는 일을 보라.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18-20절)

하나님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출 20:15) 도둑질이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출 20:14) 간음하는 자와 함편이 되는 것이 이들에게 어렵지 않다. 악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고 앉아서 형제를 비방하고 돌아다니면서 험담하는 것은 어떤가? 사랑과 진리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원하지 않으시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죄악된 행동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들이 직접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어쩌면 겉으로 볼 때 이들은 이런 일과 거리가 멀어 보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도둑질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원색적인 비방의 말이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둑이었고 간음하고 있는 자였고 형제를 비방하는 자, 살인하는 자였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관계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21절과 같이 경고하신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21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암시하시는 것처럼 그들의 죄는 가려져 있었다. 사람에게 가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최소한 그들의 생각에서 그러했다.

심지어 하나님도 잠잠하셨다. 이것을 그들은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같은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하나님의 침묵을 절대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뻔뻔하게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에 따라 살고 그에 따라 예배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크며 그 죄를 드러내실 것이라 경고하신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거룩해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이것은 가장 무서운 경고의 말로 들렸을 것이다.

B. 지시 사항(22-23절)

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오직 참아주고 계시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절)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섬긴다고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은 것이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했다. 그들이 뒤로 던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그들의 앞에 두고 그들이 미워하던 하나님을 교훈을 사랑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찢으실 것이고 누구도 그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할 수 없다. 하나님 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할 수 없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절)

다시 한 번 14절의 명령이 반복된다. 진실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의 고백 뿐 아니라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 완벽할 수 없는 삶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실패할 것을 알기에 하나님은 제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올 길도 마련해 두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려는 진실된 마음이고 그런 마음의 결과로서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더욱 가까이 이끈다. 성공은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리게 할 것이며, 실패는 낮아짐과 은혜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게 할 것이다. 이 모든 삶과 공적인 예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시다.

 

도전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잊은 하나님의 예배자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돌이키기를 명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이 책망은 오늘날의 예배자들인 우리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혹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잊고 있다면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여할 마땅한 예배는 진정한 감사의 예배다.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자. 혹 우리는 의무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다. 모든 것에 충만하시며 능하신 하나님을 삶에서 잊고 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마치 무언가 부족하여 우리가 그것을 채워드려야 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는 삶이 감사의 예배로 이어질 것이다.

혹 우리는 뻔뻔하게도 위선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다.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삶에서 잊은 것이다. 사실 위선적인 예배는 삶에서 뿐 아니라 예배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잊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감사로 예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참된 예배자,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