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한에게 배우는 행복과 성공의 관계

본문: 요한복음 3장 22-30절

설교자: 최종혁

 

행복과 성공은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쫓고 있는 두 마리 토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둘 다를 원하지만 둘 다 얻기는 쉽지 않다. 나는 행복은 아무 상관 없고 오로지 성공만을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얻기 위해 성공을 추구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계속 포기하다 보면 이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은 지금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지금 행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가지지 못한 사람의 자기 위안일 뿐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많이 가질수록, 즉 성공할 수록 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가지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결국은 계속해서 더 큰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하지 않게 살아간다.

흥미롭게도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한 해의 끝이 되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만, 새로운 해에도 결국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마치 도박에 빠진 사람들이 한번만 더 하면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눈 앞에 행복을 매달고 한걸음 다가가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사는 것이다. 결국 한해를 마치면서 사람들은 원하는 성공도 원하는 행복도 얻지 못한채,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위로한다.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하지 못한 삶, 성공하고 싶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삶.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생’이라고 말한다. 나만 그렇게 살면 모르겠는데, 모두가 그렇게 사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어떨까?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차이가 있을까? 세례 요한의 삶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요한의 삶

요한의 탄생은 매우 특별했다. 그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노부부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이 태어났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요한의 탄생을 미리 알렸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하여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이 기적의 아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될까하며 궁금해했다.

요한은 그 부모와 같이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했고,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최소한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았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면서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그런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약속된 메시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때부터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은 지금 성공의 길목에 있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유명한 설교자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몰려든다는 얘기는 곧 그가 하는 일이 돈이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잘만하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요한은 이상한 전략을 구사한다. 사람들이 그를 최소한 엘리야에 버금가는 선지자로 생각하고 심지어 메시야라고까지 생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많은 이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에 비하면 자신은 신발끈을 풀어주는 종도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낮춰서 사람들이 자신을 더 칭송하게 만드려는 전략이었을까? 그렇지도 않다. 요한은 실제로 그가 말한 자기 뒤에 오는 ‘능력 많은 이’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나와서 사람들이 다 요한이 아닌 예수님께로 가고 있다고 약간의 불평어린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4:1을 봐도 실제로 이 시기에 요한에게로 가는 사람보다 예수님께로 가는 사람이 더 많아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라는 경쟁자가 등장해서 요한의 인기를 빼앗아간 모양새다. 그런데, 요한은 인기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분봉 왕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끝내는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해 죽게 된다. 요한은 헤롯이 그의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것을 비판했었고, 이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요한을 헤로디아는 원수로 여겨서 죽이고 싶어 했는데, 헤롯이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해서 죽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마침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고, 헤롯은 기쁜 마음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그 딸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그렇게 요한은 생애를 마감했다.

요한의 삶에 대한 평가

요한의 삶은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많은 기대를 받았고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 그 자신은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정말로 어이없음을 넘어서 치욕적이었다. 자기 신념을 지키며 고결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고작 한 소녀의 춤의 댓가로 죽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 최소한 요한은 행복하기라도 했을까? 요한의 삶에 대해 자세한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이 묘사한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는 좋은 집이 아니라 광야에서 살았다. 부드러운 옷을 입지 못했고 낙타털 옷을 입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삶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에 있어 요한은 절대적으로 빈곤했다. 요한의 삶은 따뜻함이나 포근함으로 묘사될 수 없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1:11). “여자가 낳은 자”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구다. 즉, 요한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 실패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행복에 있어서는 요한의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스스로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에게 세례 받기 위해 나아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던 상황이다. 교회로 치면 성도 수가 늘어나다가 옆에 있는 교회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요한은 그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실패라고 말할만한 상황, 불행이라고 말할만한 상황을 그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요한의 삶은 우리가 볼 때는 실패한 삶이고 불행한 삶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요한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지난 한 해 나의 삶을 돌아보라. 나는 성공한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실패한 삶을 살았는가?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딱히 성공이나 실패를 말하기도 그렇고 행복이나 불행을 말하기도 그런, 그냥 하루하루 살다보니 한 해가 갔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하기 원하고 우리가 행복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좀 자세히 보자.

요한의 행복과 성공

이미 얘기한 것처럼 본문의 배경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상황이다. 공관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후 바로 요한이 헤롯에 의해 투옥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중간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있었다. 즉,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시에 공적인 활동을 하던 기간이 있었고, 그 기간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은 점점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24절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요한이 옥에 갇혀서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요한은 처음부터 자신이 참 빛, 즉 메시야가 아니라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요 1:19-20). 그렇다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니 자기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분명하게 자신을 소개했다(요 1:23). 요한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26–27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그리고 예수님이 그에게 나아오셨을 때, 그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했다.

1:29–30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이런 요한의 노력의 결과로 그의 제자들 중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아닌 예수님에게로 갔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의 제자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정확히 우리와 같은 성공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을 알았을텐데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당신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사람, 당신이 증언하던 사람이라고만 표현한다. 그들은 요한이 주인공이기를 원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요한이 하는 말이나 요한이 보이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 요한이 그 사람은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저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보다 늦게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경쟁자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 경쟁자에게 사람들을 다 빼앗기고 있으니 이들은 속이 상했고, 이런 상황에서 담담한 요한에게 오히려 따지듯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요한이 어떻게 답하는지 보라.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의미다. 바울은 비슷한 맥락에서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분열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어떤 재능과 능력이 있어서 무슨 일을 잘 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아보이는 일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없다. 어떤 사역은 사람이 보기에 더 좋아 보일 수 있다. 더 성공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얼마나 충성했는지가 중요하다. 요한은 그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역할은 그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이제와서 사람들이 떠나가니까 원래 내 역할은 그런게 아니었어라는 식으로 요한이 변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성경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요한은 하나님께 분명한 사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렇게도 말했었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요한이 아닌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문제로 봤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일은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의 결실을 보는 것이었다. 그 일은 제자들을 분하게 했지만, 오히려 요한은 기쁘게 했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30분이면 끝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그렇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계속되는 축제의 기간이었고 신랑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 결혼식을 준비했다. 예식과 축제와 관련된 모든 일 중 그가 맡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부를 신랑에게 데리고 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환경에서 신랑과 신부를 만나게 하여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랑의 친구(들러리)가 해야할 일이었다.

요한은 여기서 친구가 “크게 기뻐”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친구의 마음이 신랑의 마음과 같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는 기뻐할 이유가 없다. 자기가 주인공도 아니고 어떤 큰 댓가를 받을 수도 없는 축제를 준비한 것으로 크게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랑이 결혼을 기뻐하는 것처럼 친구도 친구로서 그것을 기뻐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했다는 면에서 보람을 느낄 때 기뻐할 수 있다. 신랑의 기쁨이 친구의 기쁨이어야 친구도 신랑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상황이 이와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는 죄인들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소개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더 이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짜 신랑이며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요한은 기쁨으로 지켜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풍성한 기쁨으로 채웠다. 그것이 그의 행복이었다.

그러면서 요한은 확실하게 자신의 사역을 보는 관점을 말한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님이 흥하기 위해 자신이 쇠하여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한숨을 내쉬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슬퍼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요한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면 친구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야 한다. 거기서 자신이 어떤 유익을 더 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든 관심은 이제 신랑과 신부에게 가야하고, 자신은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이 자기 삶을 보는 관점이었다. 요한은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거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성과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사명을 충성스럽게 한다면 그것이 곧 요한에게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의 행복도 거기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주셔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더 이상 내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인해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쁨의 이유가 바뀌고 성공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요한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타까운 인재일 것이다. 그의 삶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요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하늘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한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그럼, 우리는 요한에게서 어떤 행복과 성공의 관계를 배워야할까?

요한에게 배우는 행복과 성공의 관계

가장 먼저는 행복과 성공에 대해 우리는 세상에서 배운 관점을 버려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그 행복을 위해서 어떤 성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먼저 내가 쇠하고 하나님이 흥하셔야 한다. 그렇게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은 내 삶에서 내가 쇠하고 하나님이 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요한처럼 오히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삶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예수님 믿어서 좋은거 하나 없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고민 없이 그냥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하면서 편하게 사는 친구들이 더 행복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짜 행복과 성공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이 원리는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행복과 성공을 두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죄로 인해 우리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짓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여기 요한이 그런 것처럼 또한 바울과 같은 다른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늘의 관점에서 이 땅의 행복과 성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짜 행복한 삶,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

다음으로 그런 관점에서 나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아직 며칠 남은 시간 동안 지난 한해를 돌아 보라.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좋았던 일들,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행복과 성공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나름 행복한 한 해를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다른 곳에 있다면 나는 행복한 한 해를 보낸 것이 아니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과 관계없이 그저 내가 세운 어떤 목표를 이룬 것으로 한 해를 잘 살았다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열심히는 살았다는 것으로 쉽게 위안을 삼아서도 안된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고전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세례 요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산다. 이것은 꼭 교회 안에서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성공이다. 요한처럼 사람들이 볼 때 ‘망했다’고 할 수 있는 일들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성공이다.

그러니 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계획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의 행복과 성공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에 충성하고 그것을 기뻐하자.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