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의 기도
본문: 요한복음 17장 1-5절
설교자: 조정의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자라며 기쁨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항상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 등은 추상적입니다. 청년들을 소개할 때 믿음이 어떠냐는 질문을 들을 때 난감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형제, 자매라고 할 때 어떤 모습일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영적으로 건강할 때를 기억할 때, 지난주나 지지난 주가 아니라 처음 구원받았을 때로 돌아가게 됩니다. 먹는 것도 마다하고 시편을 읽으며 일주일동안 찬양을 했던 중학교 시절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가장 건강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지난주나 지지난주, 어제였던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영적 건강에 대해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써봤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토요일 저녁 모습입니다. 내일 성도들과 함께 나눌 말씀을 찾아 묵상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그 말씀을 나눈 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주일 아침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의복을 잘 골라 입고 일찍 교회에 도착합니다.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다가 예배 시작 10분 전 예배실에 들어가 기도로 예배를 준비합니다. 예배 시간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낭독하는 말씀과 기도, 함께 부르는 찬송에 집중하여 감동을 함께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말씀 시간에 들려지는 설교를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여기고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잘 받아 적고 마음에 새겨 삶을 살아갈 때 바른 교훈과 기준으로 삼습니다. 성도들과 들은 말씀을 가지고 나누며 교제합니다. 애찬당번, 설거지, 자원봉사자를 필요로 할 때는 주께 하듯 기쁨으로 즐겁게 적극적으로 자원하여 참여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성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성도를 주중에 만나거나 연락해서 교제합니다. 우선순위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고, 그래서 시험기간이나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항상 주님이 나의 최고 우선순위라는 것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 수 없을까요? 머릿속에 늘 그런 소원만 있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냥 어쩔 수 없다 하며 그분께 가야할까요?
우리는 육체적으로 피곤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루에 10분 성경을 읽는 시간도 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자매님들은 맞벌이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살림과 육아가 이어져 쉼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를 하루 종일 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학생들, 대학생들, 청년들도 바쁩니다. 약속을 한 번 잡으려면 스케줄 조율하기가 참 힘듭니다. 육체적인 연약함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어려움이 됩니다.
정신적인 연약함도 참 큽니다. 세상에 나가 일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성도들은 서로 양보하고 섬기려고 하는 것이 기본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은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큰일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신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질서가 없고 책임지려 하지 않으려는 사회이기에 힘듭니다.
또한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서 실패합니다. 매일 수없이 듣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진리가 아닌데도 계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인 메시지는 극히 적습니다.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날마다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의 무기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과 바울은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습니다. 또한 올바른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입니다.
제가 처음에 목회자로 세움 받았을 때 저는 자기 전에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다음날 아침이 어서 되어서 출근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눈이 충혈 되고 지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도태되거나 힘겹게 싸우고 있거나 성장하지 않는 성도들을 볼 때 좌절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게으르고 완악한 종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요?
우리 모두가 이런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 싶은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은 없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히 4:15)셨습니다. 예수님은 뭐든지 척척 힘들지 않게 다 하신 것만 같지만 그 분도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참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가지셨던 세 가지 마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을 배움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기 원합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기도는 학자들에 따르면 33년 4월 2일 목요일 늦은 저녁, 다락방을 떠나 성문 밖으로 나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걸어가시던 길에서 이루어진 기도입니다. 주님은 유언과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사랑하는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르시는데 아빠라는 표현은 부자간의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1)
1-5절에 등장하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유일한 요청은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였습니다. 영화롭다는 것은(δοξάζω) “광채, 영광(으)로 옷 입다”(“cloth in splendor”)라는 의미입니다. “주는 존귀로 옷 입으셨나이다”(시 104:1) 변화산에서 주님은 이런 영화로운 모습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누려왔던 그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영광을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이것은 예수님의 33년, 총 사역을 정리해주는 표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 20:28)
이제 그 영광을 다시 찾을 때가 왔다고 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누리셨던 무궁한 영광을 다시 찾기 전에, 이 땅에서 반드시 마셔야 하는 잔, 고난이 있었습니다. 곧 있으면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올 것이고, 밤새 심문을 받으시고 수치스러운 고문과 조롱과 핍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또 다른 고난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가 주님을 은 30개에 팔 것이고 사랑하는 제자 중에 하나는 눈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할 것입니다. 호산나를 외친 백성들이 일순간 등을 돌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하이라이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 전부터 누리던 친밀함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누렸던 영광을 생각해보면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고난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면 계속 이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고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고난이 어떨 것이라는 것도 아셨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을까요? 단지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원하셨다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요청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나아가 단순히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대가가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8절에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통과해야할 고난에 대해서 9절에서는 그 고난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창세전의 영화로 높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은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까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이를 통해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죽기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십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이것,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문제는 그 영광을 추구하려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냐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노트북이 하나 있습니다. 노트북 배터리에는 100%라고 되어 있어도 10분만 지나면 방전이 됩니다. 콘센트에 연결을 해야 전원이 계속 유지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방 실망하고 좌절하고 에너지를 잃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봉사에 참여하고 교회에 잘 참석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있지 않다면 금세 방전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든 관계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두고 싶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은 여기입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just as]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2절은 1절에 나와 있는 아버지를 어떻게 영화롭게 할 것인가에 근거와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사명을 이해하는 마음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 예수님이 죽임당하고 부활하고 승천한 후 다시 얻을 권세, 인류를 구원하는 권세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권세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리보서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그 발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사명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도리어 많은 사람을 위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5-3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들 예수님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6절에 있는 바울의 찬송 가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 보겠습니다.“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 그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나눠 주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이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내가 내 영광을 여러 민족 가운데에 나타내어 모든 민족이 내가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겔 39:21)
이것이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시고, 아들을 거절한 이들에게 진노를 부으셔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영생은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생명수 강가,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닙니다. 영생은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유일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수직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수평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아들을 통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감당하고 있는 사명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그의 기이한 덕,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볼품없어 보입니다. 의미를 잃고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하는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기도 합니다. 직장생활에서, 가정에서 자녀양육에서 교회생활에서 모든 섬김과 봉사, 교제와 관계 속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모든 것이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고 영생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것도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고 충성되게 감당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악하게 감당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언행이 아버지의 영광을 이 세상에 선포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명]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목적]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간구]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4-5절)
지나간 33년의 사역을 돌아보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 예수님. 이제 아버지가 원하는 마지막 사명을 다하기 위해 고난을 앞에 두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죽기까지 순종하기 원하는 의지가 보입니다. 제자들이 본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이제까지 완벽하게 달성되었습니다. 마지막 간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주권을 완전히 신뢰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아버지의 사명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아버지, 저는 제게 하라고 주신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죽기까지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서 이제 영화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언제나 즉각적인 보상이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주어진다면 동기부여가 더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정말 잘했다고 칭찬하신다면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마을에서 쫓겨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고 비난과 배척을 받고 배신과 배반을 당했으며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계획하신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지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나요?
아버지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자기의 영혼을 송두리째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워야하는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비결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사로잡힌 마음(수직)
-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이해하는 마음(수평)
-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신뢰하는 마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17-23) 이 말씀처럼 우리의 눈이 떠져서 마음 깊숙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이해하며 주권적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