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본문: 시편 39편
설교자: 최종혁

 

다윗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시다. 다윗이 어떤 고난을 당했고 그때 어떤 지혜를 구했는지 그리고 어떤 지혜를 얻었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다윗의 침묵(1~3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1절)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절)

다윗은 먼저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자신의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잠잠하겠다고 다짐했다.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말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2).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에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윗은 지금 특별한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혀로 범죄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그렇게 하겠다고 한 부분이다.

다윗의 표현을 보면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을 ‘죄를 범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자신이 입을 열어 말을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말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9절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9)

다윗이 놓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고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는 일인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맞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일이라는 것은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다윗이 쇠망하도록 징벌하는 일이었다. 다윗에게 벌을 내리고 계신다. 다윗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보고 말로써 범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정리하면 이렇다. 38편에서처럼 다윗은 지금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 중에 있다. 38편에는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징계가 어떤 종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시고(11절) 다윗이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음은 알 수 있다. 마치 욥에게 임했던 그런 일을 다윗이 당한 것이다. 물론 욥은 자신의 죄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을 하는 것이 특별히 ‘악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사실 시편에서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들은 우리가 아무리 좋게 표현한다고 해도 ‘불평’과 ‘의심’의 범주 안에 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있기에 불평과 의심에서 시편이 끝나지는 않는다. 점점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윗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 믿는 자들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런 말들이 공격의 좋은 빌미가 되고 하나님을 불신할 좋은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 중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고, ‘이런 상황에서 순종이고 뭐고 무슨 소용이냐’고 분노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유혹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시작된 일이지만, 어쨌든 고난은 고난이고 어려움은 어려움이다. 분명히 힘든 상황은 힘든 상황이다. 그러니 충분히 불평이나 분노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단했다. 겉으로 표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그렇게 결단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 마음 속의 근심은 커져갔다. 다윗은 그 괴로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3절)

그 마음이 뜨거워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우리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면 ‘화병이 난다’거나 혹은 속에서 ‘열불이 난다’는 표현을 한다. 다윗이 그런 상황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다윗은 그 혀로 말했다.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3절 끝에서 나의 혀로 말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라면 다윗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다윗의 말을 생각해 보기에 앞서, 우리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아무나 친한 사람에게 지금 상황에 대한 불평하는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때로 성도들과 나누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말하기 어렵거나 혹은 성도들은 정답만 말한다고 생각해서 말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불만처럼 말하거나 실제로 불평하는 것은 좋은 간증이 될 수 없다. 다윗은 특별히 이것을 생각하여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고 말했다.

믿는 성도에게 지금 상황에 대한 불평하는 경우가 있다 성도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위로를 받고 도움을 얻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불평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해야 하는지,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얻기 위한 의도라면 당연히 다른 성도와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그저 하소연하고 불평하는 것은 성도를 힘들게 하고 실족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에게 지금 상황에 대한 불평하는 경우이다. 시편에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특히 다윗은 뛰어난 시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불평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도 있다. 39편에서 다윗이 선택한 방법이다.

치 1번를 선택할 것 같았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말했고 불평이 아닌 이 상황에서의 지혜를 구했다.

다윗의 소망(4~7절)

다윗의 고난에 대한 시편을 읽어 보면, 다윗은 고난이 있을 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원인이 없다고 판단이 들면, 당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속히 해결해 주셔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면 자신을 낮추고 대신 얼마나 자기가 고통스러운지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8편의 말씀이 딱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시편 39편은 조금 특별하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자신의 고통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4절)

다윗이 구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혹은 덧없는 자인지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알게 해달라는 말이 단지 지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이제 정확히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말해 달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다윗은 사람의 인생이 어떤 지 잘 알고 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절)

다윗은 자기의 날이 “한 뼘 길이”(가장 작은 길이 단위, 4 손가락을 합친 정도, 약 7-10cm)만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이 “든든 서 있어도” 허사일 뿐이라고 한다. 지금 아무리 건강해 보이고 힘 있어 보이는 사람도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나이가 든 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지식적으로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나중에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육체의 한계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이다.

“허사” – 5, 6, 11절. 입김, 헛됨, 텅 빔, 무의미함.

마치 우리가 잠깐만 느낄 수 있는 입김처럼 사람의 인생이 그렇다. 아무리 무병장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수백 년을 살지 못한다. 그것이 사실인데 누구도 정말 그런 것처럼 살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5절의 끝과 11절의 끝에 “셀라”를 넣어서 이 시를 읽거나 이 노래를 부를 때에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정말 우리 인생이 그렇고, 내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도 그렇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절)

다윗은 다시 한 번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한 지를 묘사한다(“헛된 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것이 아니면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다윗은 오히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을 “그림자 같이 다니는 일”이라고 말한다.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림자는 마치 실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체는 아니다. 그림자로 할 수 있는 일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짜 일로 소란하다. 바쁘다. 그것 때문에 싸우고 다툰다. 실망하고 불평하며 분노한다. 특별히 다윗은 이 땅에서 재물을 모으는 일이 허망한 것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모으지만 누가 거둘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모으면 내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재물을 모으고 후에 즐길 것을 생각하지만, 그 뜻대로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것은 생각보다 빠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실체입니다. 다윗은 5절과 6절에서 “진실로”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사실임을 강조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래서 인생무상이니 공수래 공수거 같은 말들을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욜로’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뜻으로 잘 모르는 미래는 차치하고 현재를 즐기자는 풍조다.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세상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인생이 짧고 한번 뿐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결론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허무주의에 빠진다.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복잡한 것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모으고 저축하면서 살라고 한다.

다윗의 결론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결론이 다른 이유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달라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짧은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어쩌다가 우리가 마주한 운명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 그렇게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5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없는 것과 같다. 그분은 영원시기 때문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그분 앞에 우리는 없는 것과 같다.

그분이 주권자이시며 심판자가 되신다. 그 하나님이 세상의 나라를 세우고 쇠하게 하시며 왕을 일으키고 폐하신다. 그분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있다. 이 땅에서의 삶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삶도 그 분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대한 결론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지를 알게 해달라고 구한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이 어려움의 의미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절)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주관자 되시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소망은 그분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 삶의 결론이다. 우리가 지금의 삶을 즐길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해 대비할 수도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어려움 중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안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이다.

다윗이 이것을 그동안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난의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이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단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현재 자신의 상황을 그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상황 밖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시적인 세상의 시각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다시 자신의 문제로 돌아와서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내려놓고 구한다.

다윗의 간구(8~13절)

‘하나님 제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것이 이 간구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지금의 징계가 끝나는 것이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8절)

죄에서 건져 달라는 것은 형벌로서의 징계를 그쳐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10절(“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에서 말하는 것처럼 징벌로 인해서 다윗이 완전히 쇠망하게 되면, 즉 그가 죽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우매한 자에게 욕을 당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심지어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민족의 왕이 이런 결과를 맞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좋은 놀림감이 되고 하나님을 비방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된다. 현재 그렇게 되는 것을 다윗은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윗은 잠잠했다(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다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결국 하나님께 그 삶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셀라)”(11절)

“영화”라는 표현은 ‘귀중한 것’,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계하실 때, 하나님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가시곤 한다. 그것이 건강일 수도 있고, 외모나 지식일 수도 있다. 권력이나 재물일 수도 있고, 어떤 관계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취하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느부갓네살 왕이 좋은 예다. 그가 교만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들의 짐승처럼 살게 하셨다. 하나님의 징벌의 때가 다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이성을 돌려 주셨을 때, 왕은 하나님이 주권자이며 모든 일을 의롭게 하심을 찬양하였다. 다윗이 지금 그런 상황에서 이 삶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다윗의 마지막 기도는 감정에 기초한 호소에 가깝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12절)

다시 한 번 다윗은 자신이 영원의 삶에 비추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언급한다. 그는 이 땅에서 나그네다. 정착민이 아니라 떠도는 자다. 다만, 그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다. 다른 의지할 것이 없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나그네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지금까지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는데, 이 마지막 구절에 와서야 다윗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밝히 말한다. 마치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이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용건을 꺼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징계를 거둬 주시기를 구한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3절)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다른 변역본에서는 “다시 미소 짓게 하소서”, “즐겁게 살다 가게 하소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꼭 건강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말입니다. 38편의 연장선에서 보면 건강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39편 자체를 보면 꼭 하나님의 징계로 육체적인 건강 상의 문제를 겪고 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무엇이든 다윗은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에 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이 땅을 떠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남은 삶을 다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다.

도전

시편 39편의 상황은 38편과 유사하다. 둘 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는 자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다. 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중한지에 초점을 맞췄다. 즉, 고통 속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밖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렸다.

39편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39편도 고통 속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안에 있기 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라본다. 영원의 시각,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라본다. 39편의 처음 3구절만 읽어보면 4절부터 다윗은 뭔가 엄청난 불만과 분노를 쏟아 놓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도의 끝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하여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그네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혜였다. 자신의 삶을 바로 볼 지혜가 필요했다.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바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시편의 다윗처럼 죄 때문에 직접적인 징계를 받는 일은 많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려움은 항상 우리 곁에 있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다윗과 같은 근심에 빠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몇 가지 선택, 혹은 유혹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다. 우리의 삶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다.

그 지혜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얻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절대 얻을 수 없는 수준 높은 것은 아니다. 그 지혜라는 것은 그저 우리가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냥 나그네가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다. 간단한 지혜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잠깐의 고난도 아니고 잠깐의 만족도 아니다. 우리의 종말과 연한을 알고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히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한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한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셨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주를 하라고 말한다. 여러 감정과 생각이 뒤엉킬 것이다. 고난과 불평, 감사가 나올 상황도 나온다. 어떨 때는 기쁨의 춤을 추고 어떨 때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가 몰아친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종말과 연한이 어떠한지 알고 영원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어딜 가도 나그네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나그네가 아니다. 이 땅에서든지 하늘나라에서든지 변하지 않는 것은 둘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을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만든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그네이기에 다른 사람과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기억하라. 다윗이 얻은 지혜를 꼭 얻길 바란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그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