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 1

본문: 시편 110편

설교자: 최종혁

 

누구나 살면서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물에 빠지거나 불이 난 건물에 갇혔는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럴 것이다. 그럴 땐 소방관(구급대원)이 영웅이 될 수 있다. 어떤 질병 때문에 삶이 무너질 때는 의사가 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재정적 도움을 주는 사람을 기대할 수도 있다. 삶의 어떤 고민이 계속되어 답답함을 느낄 때 그런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어떤 영웅을 우리는 기대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나를 대신해서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항상 필요한 때에 이런 영웅이 등장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이스라엘 가족이 고생할 때는 요셉이 영웅으로 등장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며 신음할 때는 모세가 영웅으로 등장했었다. 이스라엘이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는 여호수아가 영웅이었다. 사사들도 당시의 영웅들이었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그 후 일어났던 선한 왕들도 영웅들이었다고 할 수 있고, 포로기에서의 귀환을 이끌었던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도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이스라엘은 암흑기를 겪었다. 귀환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헬라와 로마라는 대국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배 아래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전처럼 그들에게는 구원해 줄 영웅이 필요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던 그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라고 한다.

이 시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스라엘 안에서 커져갔던 것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올 왕이 이방 나라들을 굴복 시키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상 가운데 세울 것을 기대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혹 그가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은 절대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했지만(요 1:20),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실 메시아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라고 직접 말하지 않으셨고, 권위 있는 말씀과 이적들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계속해서 의문을 가졌다. 예수님은 메시아인 것 같았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일들을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모아서 로마를 대적하려는 어떤 계획도 말하거나 시도한 적이 없다.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하기도 했는데 예수님은 딱히 그런 모습도 보이신 적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그들이 기대했던 그 일을 마침내 예수님께서 하실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정확히 선지자 스가랴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뒤에 이어지는 말씀도 여호와께서 원수를 멸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있어 바로 이 말씀의 성취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맞이하듯 자기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면서 이렇게 소리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지만 이렇게 환영 받았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그리고 로마인들에게는 ‘황제반역’을 이유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유대인들은 결론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지도자에 의해 공회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마 26:63)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었다.

26: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의 말씀을 자신이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던 것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영웅, 메시아와 달랐을 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했던’ 메시아이셨지만,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진짜 필요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영웅은 이전에 있었던 그런 영웅들처럼 그들을 이 땅에서의 괴로움에서 구원해줄 영웅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과 영혼을 구원할 궁극적인 영웅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과정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그리고 온 인류의 궁극적인 영웅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기 전에 나귀 새끼를 타야했다. 권능의 우편에 앉기 전에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 이전의 영웅들은 바로 이 궁극적인 영웅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그들도 영웅으로 불릴 수는 있지만, 메시아로 불릴 수는 없다. 메시아는 그 누구와도 다른, 견줄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110편에 기록되어 있다.

시편 110편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말씀이다(직간접적으로 25회 이상). 특히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해서 말씀하기도 하셨고, 베드로가 유명한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예수님과 베드로 모두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증언했다.

그래서 시편 110편은 의심의 여지 없는 메시아 시편이다. 다윗이 기록한 시이지만, 시편 22편처럼 다윗의 어떤 상황이나 경험이 바탕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 시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다윗은 조금도 이 시편의 주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시편 110편은 그 어떤 왕에게도, 부분적으로라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닌 실체에 대해서 말한다. 예언적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이다.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그리고 믿어야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자. 우리가 기대해야할 영웅은 바로 이 예수님이시다.

이 시편은 크게 3부분에서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를 말한다.

  1.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1-3절)
  2.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4절)
  3.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심판자(5-7절)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1-3절)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 하셨도다”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 주를 향한 여호와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이어지는 내용을 역사적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그나마 가능한 상황은 다윗에 대한 계시를 다윗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전달하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내 주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다윗이 기록한 다윗의 시’가 아니라 ‘다윗에 대하여 누군가 기록한 시’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실 때,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등이 예수님을 고소할만한 거리를 잡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했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일곱 형제와 모두 결혼한 여자는 부활의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지혜롭게 답하신 후에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

바리새인들은 고민 없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했다. 전혀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던 것이다. 사무엘하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직접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은 시편에서도 확증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서고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했고(사 11:10), 예레미야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셔서 그가 왕이 되어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예언했다(렘 23:5-6).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면서 도움을 구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도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환호하며 환영했었다. “다윗의 자손”은 사실 메시아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정도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극히 상식이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 비해서 너무 쉬운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이 가소롭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한 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22:43–45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 110:1을 인용하셨고, 이 말씀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기록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이 말씀은 다윗이 그가 “주”라고 불러야하는 다른 대상에 관하여 기록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다윗의 주가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편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임을 확언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동일한 생각이었기에 예수님은 이 사실을 논증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이 동의 위에서 그들에게 진짜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왜 시편 110편의 저자인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가? ‘주’라는 표현, 특히나 ‘나의 주’라는 표현은 자신의 자손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닌데, 왜 다윗이 그렇게 했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 질문에 누구도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이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시편 110:1이 증명한다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은 많았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메시아는 아니었다. 그들은 다윗의 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주의 통치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판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는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여호수아 10장을 보면 아모리의 왕들을 사로잡은 후에 여호수아가 지휘관들에게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고 하여 그들이 그렇게 하는 장면이 있다(수 10:24). 실제로 당시에는 이렇게 하여 완전한 승리를 선포했었는데, 후에는 단순히 승리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렇게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메시아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메시아에게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앞서 109편에서는 재판의 자리에서 오른쪽에 서는 이미지가 사용되었었는데, 여기서는 왕궁에서 오른쪽에 앉는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온 우주를 통치하는 왕이시다.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스리는 자리, 보좌의 오른쪽에 앉으라는 의미다. 존중을 넘어서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 통치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가 궁극의 통치자, 왕이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세우신 왕이 될 것이다. 성령님은 이런 왕에 대해서 다윗에게 말씀해 주시고 기록하게 하셨던 것이다.

자신이 이런 왕이 아님을 다윗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왕일 뿐이었다. 그의 자손 중에서 이런 왕이 세워질 수 있다는 생각도 머리로는 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서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를 공유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를 다윗은 “나의 주”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보다는 더 높은 존재여야했기 때문이다.

다윗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이런 메시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높여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 다윗의 자손 중 한 사람을 그런 메시아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메시아는 다윗에게 “나의 주”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존재여야 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 이상이어야 했던 것이다. 이 어려운 수수께끼의 해결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었다. 사람이 사람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해법이었던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은 어떤 왕이 백성들이 잘 사는지 보려고 허름한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실제로 사람이 되셨다. 사람처럼 살다가 불편하면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시기를 멈춘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온전한 사람이셨다. 다윗의 주이시며 다윗의 자손이 되신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성육신의 방법이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위대한 왕의 탄생 설화처럼 들릴지 모른다.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또한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에 어떤 신비감을 주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나셔야 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남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셔야 했다. 하지만 죄인으로 태어나선 안되기 때문에 자연적인 잉태가 아닌 초자연적인 잉태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남자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

1:31–33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약속된 메시아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날 것을 천사가 말해준 것이다. 이에 마리아가 묻는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 이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마리아는 자연적인 잉태가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초자연적인 잉태를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거룩한 이”가 될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며 마리아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렇게 다윗의 주인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셔서 시편 110:1의 말씀을 이루셨다.

그 예수님은 그럼 지금 어디 계신가?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에게서 완전하게 승리하게 하실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날에 대한 묘사가 2-3절이다.

110:2–3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이 두 구절은 원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말씀 중 하나로 악명이 높다. 확실한 것들만 살펴보자.

1절에서 메시아는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온에서부터”, 즉 이 땅의 예루살렘에서 주의 권능의 규가 내보내질 것을 말씀한다. 여기 “권능의 규”는 통치자의 지팡이다.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하늘에 계시던 메시아는 이 땅에서 그 권능을 나타낼 것이고 그 때 원수들을 완전히 다스리실 것이다. 땅에서의 통치다. 그리고 그 때 즐거이 헌신하는 메시아의 백성들이 있을 것이다. 계시록은 이기는 자들이 이런 메시아의 통치에 함께 할 것을 말한다.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메시아의 백성들은 거룩하고 즐거이 헌신하는 자들이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표현은 표현 자체가 시적으로 아름다워서 청년들을 지칭할 때 많이 인용되지만,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청년들의 순수한 열정?)는 아닐 것이다. 이 표현은 청년과 같은 활력을 메시아가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거나, 혹은 앞서 언급한 주의 백성에 평행한 표현으로서 그런 주의 청년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둘 다 문맥상 가능하고 전체 의미에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주인 메시아가 하늘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그 권능을 나타낼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 원수들은 (어쩔 수 없이) 정복될 것이고, 백성들은 (즐거이) 함께 통치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이 비교할 수 없는 왕의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의 원수의 편에 서든지다. ‘난 그런거 상관 없고,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해야하는데?’라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해야 한다.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메시아의 원수의 편에 서는 것이다.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질 수 없다. 그분이 홀로 하나이신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이 되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진정한 다윗의 주로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다. 그날에 대해 예수님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이야기하면서 ‘대통합’을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 땅에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대통합이 아닌 대분열을 예수님은 가져오실 것이다. 끝까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여 악의 세력에 서는 자들은 주의 권능의 날을 두려움으로 맞게 될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심판을 내릴 것이다.

반대로 그 메시아를 내 삶의 메시아로 영접한 자들은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편 109편의 부르짖음이 모두 응답될 것이기 때문이다. 109편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애통과 슬픔이 응답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수고가 보상받을 것이다. 눈물이 씻겨질 것이다. 상처가 치유될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긍휼과 공의를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들이 원하는 영웅은 따로 있다. 예수님에게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웅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영웅은 바로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 삶의 일부를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부를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동화나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예언의 성취였던 것처럼, 다윗의 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말씀도 단순히 겁을 줘서 정신차리고 살게 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인 메시아가 우리에게 있다. 누구도 그분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실 것이다. 내가 원하는 영웅을 기다리며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인지, 아니면 그 메시아가 내게 필요한 영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그분께 헌신할 것인지, 아니면 그분의 발판이 되어 복종하게 될 것인지, 그 선택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어느 편에 서기 원하는가? 베드로는 시편 110:1을 인용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적용이다.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말고,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라.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즐거이 따르며 헌신하는 그분의 백성이 되라.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이신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삶을 경험하고, 그분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