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변의 하나님, 영원의 위로 2
본문: 시편 102편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면된다. 하나님을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하면된다. 하나님을 툭하면 이유 없이 분노하는 존재로 알고 있다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탄식할 일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면 탄식의 때에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시편 102편의 저자는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 같은 상황에서 탄식했지만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탄식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탄식이 가식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고통과 눈물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믿는 자의 탄식은 다른 것이다. 계시지 않는 하나님을 계신 것처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지금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의 탄식은 단순히 불평이나 불만이 아니다. 슬픔에 잠식된 좌절이 아니다. 실체 없는 자기 위로가 아니다. 믿는 자의 탄식은 인내이며 기다림이다. 하나님 주신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오늘 본문인 12-28절에서 바로 그런 기대와 신뢰를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탄식의 순간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영원의 위로가 무엇인지 배워보자.
영원의 위로(12-22절)
시 102: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의 시선은 급격하게 달라진다. 자신에게서 여호와로 시선을 옮긴 것이다. 1-2절에서도 고난 중에서도 탄식을 들으시는 여호와를 기억하면서 “여호와여”라고 부르며 도우심을 구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1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계속해서 “나”가 중심인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땅을 보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보며 탄식하는 것이다. 다윗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넘어져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시 37:24). 넘어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태다.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겪는다. 넘어져서 탄식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있어서는 안된다. 넘어진 아이는 까진 상처 때문에 울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넘어뜨린 돌뿌리를 잠시 노려볼 수도 있다. 그런 반응 자체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일어서야 한다. 혼자 일어서기 어려우면 도울 수 있는 부모를 찾아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때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기 연민을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연민의 눈으로 봐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 받기 원하고 돌봄 받기를 원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 넘어져 있거나 때론 일부러 넘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안타깝지만 정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사탄이 우리를 죄로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연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굳이 사탄이 개입하지 않아도 그런 순간에 우리는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을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고, 나에게 좋은 어떤 것을 주는 것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고통의 문제가 더 크게 보인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니 이런 건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죄로의 유혹에 취약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탄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신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고 사탄은 그것을 노렸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나를 중심에 놓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고통의 순간에도 그렇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12절 첫마디 말이 중요하다. 그는 1절에서처럼 여호와를 부르지만 1절과는 다르게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주는”이라고 말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본다. 계속해서 “나”가 중심이었던 말씀이 이후로는 “주”(하나님) 중심으로 바뀐다. 고통 중에 잠시 탄식했지만 이제는 고개를 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의 ‘다르심’이 보인다. 자신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은데,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다. 자신은 이제 시들어 사라질 이름 없는 풀과 같은데, 하나님은 대대에 기억될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통해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그런 위로는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진짜 위로는 ‘다름’에서 온다. 예전의 만화영화(애니메이션)를 보면 누군가 악당에게 잡혀가서 그 사람을 구해내는 스토리가 많았다. 내가 악당에게 잡혀있을 때, 누군가가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어서 싸우다가 잡혀서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게 위로가 될까? 아니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나를 구해내면 그게 위로가 될까? 나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위로가 될까, 나와 다른 사람이 있으면 위로가 될까? 상황을 절대 바꿀 수 없다면, 아마 전자와 같은 경우가 위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위로가 된다.
시편 기자도 어쩌면 사람들에게서 순간의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를 찾아와서 이제는 괜찮아질거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그래, 시간이 해결하겠지’라며, 혹은 ‘그래, 나만 이런건 아니니까’라며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로는 순간일 뿐 근본적인 위로가 되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정말 그의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같은 사람’인 이상 근본적인 위로를 줄 수는 없다. 진짜 위로는 다름에서 온다. 나보다 약한 다름이 아니라 강한 다름에서 온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우리 중에 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누군가가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시겠다고 하신 일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은 그냥 영원히 계시기만하는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돌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있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뜻을 가지고 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 뜻의 일부를 드러내셨고, 시편 기자는 그 약속을 지금 기억한다.
시 102:13–22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일어난다”(13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작하실 것에 대한 표현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며 “시온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대표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13절부터 시작해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상기한다. 그 말은 현재는 이스라엘이 회복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시대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3절 끝에서 “정한 기한”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일시적 회복과 궁극적 회복 사이의 경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편도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시온이 회복되면 뭇 나라와 모든 왕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15절), 민족과 나라들이 모여서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을(22절) 언급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메시야의 나라(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당연히 이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쁨이 되고(14절),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행하신 일을 예배하고 선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18, 21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 일이기 때문이다(16, 19절). 이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 뿐 아니라 그 후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18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에 대해 구약의 예언서는 많은 분량을 사용하여 기록했다.
사 60:10–14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1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슥 1:12–17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 16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7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시편 102편의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난의 때에 그 약속을 기억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하신다면 자신도 지금의 환난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일반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하시는 분이시기에 나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구체적인 면에서 이런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 슬픔이 기쁨이 되고 근심이 찬송이 될 구원의 날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고 그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저자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고 멸시하지 아니하실 것(17절)과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고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실 것(20절)을 강조했던 것도 이런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그 약속이 자신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그의 슬픔과 근심을 하나님은 기쁨과 찬송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지금 시편 기자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시거나 혹은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괜찮을거야. 다 잘 될거야.”라고만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는 그런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약속이 우리의 위로가 된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약속을,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자신의 위로로 삼았다.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속한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이 되신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보고 있는 예언의 말씀은 언젠가 우리가 보고 경험하게 될 현실이다. 그 영원이 지금 나에게 위로가 되어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끝내실 것이다. 이 고통에서 하나님은 나를 건져내실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한다.
그럼, 그때가 될 때까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시편 기자는 이런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끝으로 이렇게 기도한다.
지금의 기도(23-28절)
시 102:23–28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을 비교한다. 하나님은 한결같으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시작부터, 아니 그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세상이 끝나고도 계실 분이시다. 사실은 세상을 시작하시고 끝내실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다. 누구도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세상이니 하나님께서 끝내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그런 주권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쇠약하게 하시고 그의 날을 짧게 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은 오래 살게 하시고,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사람들은 오래 살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는 이렇게 하시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전에 그렇게 따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불변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위에 서있다. 자신은 불변하시지만 다른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따질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님을 그는 안다. 하나님의 종들의 자손들은 계속 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무슨 협상 같은 것을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 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좀 더 허락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 약속은 확실하다. 시편 기자가 구하는 것이 ‘지금’ 그렇게 하여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확실함은 내가 원하는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확실한 약속에 기초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우리는 충성스럽게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구할 수 있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 우리의 필요를 위해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영원의 관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태도다.
도전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102:25-27의 말씀을 인용해서 아들이신 예수님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시편 기자처럼 두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유혹이 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예수님을 버려야 해결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대로 상황이 해결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포기한다면, 이 땅에서 굳이 불필요한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순간을 탄식하지 않을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궁극적인 결과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베푸실 그날에 탄식하게 될 것이다. 그 탄식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그 슬픔도 영원할 것이다. 구원의 날이 심판의 날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의 고난 중에 끝까지 하나님을 붙든다면 그 결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다. 지금 탄식할 수 있지만 영원의 위로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는 분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변하는 것을 믿으며 살 것인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 것인지, 지금 나의 선택이 나의 지금과 영원을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실 그 때, 나의 기쁨이 슬픔이 되고 나의 노래가 근심이 되지 않도록, 지금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이 땅의 순간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