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본문: 요한계시록 20장 1-6절

설교자: 조정의

천년왕국은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교리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1~3세기에 천 년에 관한 뜨거운 논의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합의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종말에 관한 견해를 비본질적 진리로 구분한다. 중요하지만 우리와 다른 견해에도 관용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진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1. 언제: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 년 동안

본문은 분명히 “천 년 동안” 무저갱에 사탄이 결박될 것과(1-3절)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을 예언한다(4-6절).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이후에 일어날 것으로 본다. 몇 가지 성경적 근거가 이를 확증한다. 1) 요한은 “또 내가 보매”라는 형식으로 항상 순차적인 사건에 관한 환상을 소개한다(1절). 2) 계시록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종말 계획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다(종종 미래의 승리와 심판의 예고를 빼고). 3) 본문이 묘사하는 상황은 과거에 이미 일어났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천년을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① 후천년설, ② 무천년설, ③ 전천년설.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 땅에 유토피아 같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고 그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본다. 교회는 세상을 천년왕국처럼 만들 의무와 책임이 있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재림 이전까지의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본다. 낙원같은 세상이 실제로 이 땅에 펼쳐지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 안에서 영적으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 다 천 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각자 정의한 천 년의 기간 이후로 둔다.

두 가지 견해의 치명적 문제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사탄무저갱결박하여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성경의 주장에 반한다는 것이다(2-3절). 만일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가 실질적 혹은 영적 천년왕국에 해당한다면, 우리는 현재 마귀가 결박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믿어지는가? 베드로 또한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는 성도들에게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했다(벧전 5:8, 계 2:10). 

예수님의 오심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 상태에 이른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셨는가?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미혹, 전쟁, 기근, 지진, 박해, 불법,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 하셨다(마 24:3-31). 정확히 계시록에 기록된 순서대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미래에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이다. 주가 오시기 전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 아니라, 주가 오셔서 만드실 세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 임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2. 어디에서: 이 땅에서

천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세우실 장소는 바로 이 땅이다. 일부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이들 중에는 지상 왕국을 부정하면서 하늘나라가 바로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계시록 본문의 앞뒤 문맥을 보면 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장소는 이 땅이 분명하다(이 땅에 재림하여 땅에서 전쟁, 이후에 새하늘과 새땅). 베드로는 이 기간을 “만물을 회복하실 때”라고 설교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그리스도를 “받아 두리라”라고 예언하셨다(행 3:21).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는 천년왕국 때 회복될 만물을 아름답게 노래했는데,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했다(사 11:7-9). 또한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고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다(사 30:23).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다(사 35:7).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그치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사 2:4).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고 하겠고”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사 65:20).

천 년 동안 우리는 마귀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한 피조세계의 회복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이 땅의 아름답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상태를(심히 좋은) 충분히 맛볼 것이다.  

3. 누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천년왕국의 시민은 누구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 감추어졌던 신비라고 밝혔다(롬 11:25). 바울은 자기 혈육인 이스라엘이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확증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롬 11:26-27).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의 회복과 구원에 관하여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또 분명하게 예언한다.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되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다(행 1:6-7).

대환난 기간에 하나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유대인 전도자 144,000을 특별히 세우시고 많은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실 것이다(계 7장). 세상이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하고 하늘에서 심판의 대접이 쏟아질 때, 그 환난이 미치지 못하는 광야를 예비하시고 자기 백성을 그곳에서 보전하실 것이다(계 12:6, 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반대편에 선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능 아래 모두 살육당하지만, 끝까지 그리스도 편에 선 자들은 천년왕국의 백성이 될 것이다. 본문 4절 마지막에 나오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을 말한다.

또 누가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까? 그리스도와 함께 백마를 타고 다스리러 온 성도들이다. 본문 4절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보좌에 앉은 자들이라 말한다.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계 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들 중에는 순교자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로마 시대 흔했던 사형 방식).

4. 어떻게: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4절에 보면 천년왕국 시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말씀한다. ‘살다’를 뜻하는 단어인 쟈오(ζάω)는 ‘살아나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분명히 부활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5절).

성경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구분한다. 첫째 사망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를 가리키고, 둘째 사망은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되는 사망,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은 둘째 부활을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모든 신자는 한 번의 부활, 곧 생명의 부활을 입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때 무덤에 묻힌 자부터 살아있는 자 순서로 부활한다(살전 4:16-17). 환난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살아(나)” 천년왕국에 참여한다. 시기는 달라도 모두 한 번의 부활에 참여하는 을 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은 모두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둘째 사망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5. 무엇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주님은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주님은 또 두아디라 교회에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말씀하셨다(계 2:26). 주를 위해 인내하는 자는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다(딤후 2:12).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한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롬 8:17).

6절은 천년왕국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되어 통치할 것을 약속한다: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이 표현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연상시킨다. 천지의 창조주이자 통치자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8). 마귀의 반역에 동참한 죄인은 결국 동산 밖으로 쫓겨났지만, 그리스도가 만물을 회복시키실 때, 다시 그 나라 백성에게 섭정의 역할이 부여될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만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다.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6. 왜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 천 년의 통치 기간을 계획하신 것일까? 재림과 함께 지금의 땅과 하늘을 불사르고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성도들은 영생을 온전히 누리게 하시고, 원수들은 영벌에 처하게 하시면 더 좋지 않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한다. ① 신실하신 하나님. 천년왕국은 하나님께서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유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에 신실한 사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예언하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영원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넘어짐과 실패가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으니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떻겠냐고 물었다(롬 11:12).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충만하게 하실 이때, 더욱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②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 우리는 타락한 피조세계를 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찬양한다: 가을 하늘, 멋진 노을, 울창한 숲과 장엄한 산들, 드넓은 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 소리에 익숙하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세상은 역사가 아니라 거의 전설로 취급된다. 하지만, 천년왕국은 회복된 피조세계, 마귀가 망칠 수 없도록 보호받는 심히 좋은 세상을 보게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을 만물을 통해 더욱 풍성히 보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것이다.

③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죄책을 마귀와 세상에 떠넘기는 것을 좋아한다. 마귀가 미혹하지 않으면, 세상이 악하지 않으면 충분히 선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주권적이긴 하지만, 정말로 공의롭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천년왕국 기간에 마귀는 결박당해 힘도 못 쓰고 세상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때,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지 않는 악인들, 그래서 천년 후 마귀가 잠시 놓일 때 미혹을 받아 반역하게 될 이들이 땅의 사방에서 바다의 모래 같이 나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지,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공정하고 의로운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④ 상 주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히 11:6). 천년왕국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운다. 제자들 처럼 더 크고자 싸우고, 부자들 처럼 더 많이 가지려고 싸운다.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싶어하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세상에 속한 것을 갖추려고 애쓴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좇으라고 하셨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분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다른 모든 것을(목숨까지) 포기하는(투자하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한 만큼 보상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