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2)
본문: 요한복음 15장 9-11절
설교: 조정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는 본문 말씀의 9절에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누리던 친밀한 관계를 우리와 누리기를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그런 깊은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죄를 용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시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우리와 함께 누리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영원토록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 주님이 얻으실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 그와 같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3:1). 예수님께서 모든 조롱과 핍박, 고난을 담당하신 이유는 우리와 이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는 어떻게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고, 11절에서는 왜 그렇게 명령하시는지 그 목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9절에서 아름답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제안하셨는데 10절에 와서는 갑자기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계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교회에서 이것저것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많으니 무거운 멍에나 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참 많습니다. ‘하라’는 명령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사랑하라” 등이 있고 ‘하지 말라’는 명령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차별하지 말라”, “의심 하지 말라” 등이 있습니다. 이런 ‘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약성경에만 1050개의 명령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한다고 주신 명령입니다. 뭔가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계명들을 무조건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자로서 피조물에게 강제로 행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이 말씀은 계명에 대한 주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즉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 즉 율법을 주셨습니다. 당시 그들은 애굽의 식민지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런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어려움 중에 있는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들은 매순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로우신 분,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분임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6-7)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시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만일 세상에서 가장 신실하고 이해심 많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아내는 이런 남편과 깊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짐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아마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가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는 이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율법을 단 한 마디로 종합하자면,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율법이 주어진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버거워했습니다. 미가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많은 양의 제물을 드리면, 더 질 좋은 것을 드리면 만족하시겠냐’고 묻습니다. 말라기를 보면 병들고 저는 짐승을 제물로 가지고 와서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입술은 나를 사랑하지만 마음에서는 먼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이 나를 구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주님은 자신이 바로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본(本)’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1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자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사랑을 돌려드립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교훈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8-29).
주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늘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까’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을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시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심히 고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겨운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으셔야만 구원 사역이 이뤄진다는 사실, 이것을 아버지께서 원하셨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입니다. 이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지 의무감에서나 강제로 이뤄진 행동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신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수고를 할 때는 그저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저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면 아내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는 그 일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들이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셔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기쁨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을 받고 계셨고, 아들 예수님 또한 순종의 삶으로 다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연합의 관계가 있었고 거기서 오는 큰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쁨을 우리와 함께 누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완벽한 연합을 이루어서 기쁨이 넘치게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원해서 얻게 되더라도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기쁨들이 제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잊혀지고, 잊혀지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그것들을 썩어질 것들, 더럽혀질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부부가 서로 가까워지며 더욱 연합되어 기쁨을 느끼게 되듯,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도 우리가 주님을 더 닮아가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연합의 큰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충만한 기쁨을 누리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순종함으로 그 사랑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지만 우리에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충만케 되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사랑 안에 거하기를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닫고, 여러분이 누리는 특권과 행복이 무엇이고 영광과 부르심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달으셨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즐겁고 복된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