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늘은 시편 1편을 통해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성경을 읽는 태도와 방법 그리고 그것이 의인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시편을 읽고 해석할 때 우리는 시편이 노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논리적인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노래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예술적 표현 방식입니다. 시편 1편 역시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분명한 진리를 전달해줍니다.

특별히 히브리 시의 특징은 평행법인데 2행이 1행의 내용을 보강하거나, 2행이 1행의 내용을 더 발전된 설명으로 반복하거나, 내용을 대조하여 설명하는 등의 방식입니다. 시편 1편에는 1절이 보강을, 2절과 5절이 설명을, 1~3절과(의인) 4~5절을(악인) 대조하며 노래하는 평행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 시는 또한 이미지를 강조하여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는데 시편 1편에서 의인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하는 장면이 바로 시라는 장치가 사용하는 이미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는 노래로서 감정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가 주목하기 원하는 감정의 절정은 바로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2절).

스티븐 스미스는 “본문이 이끄는 장르별 설교”라는 책에서 “시편 그대로 이해하기 전에 신약의 신학을 주입해 읽음으로, 시편을 엉망으로 만들지 말라”고 권면합니다(221p). 저는 스미스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이 말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접근하여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자, 시편 기자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시편에 “복”이라는 단어는(아쉬례)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은 다 이 있도다(시 2:12; 34:9).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5)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이로 보건대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가려진 자,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조하며 복 있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와 먼 사람입니다. 그것이 의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의인은 악인의 생각을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의 생각은 악합니다. 대홍수 전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던 것처럼 악인의 마음에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21-23). 물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는 망가졌지만 올바르거나 선한 생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생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생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악인의 생각을 따르지 않습니다. 악하고 거짓되고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바르고 선한 생각을 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진리에 따라 생각합니다.

의인은 또한 악인의 삶을 걷지 않습니다. “길”은 어느 방향으로 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길”은 삶의 방향, 삶의 형태, 그 삶을 이루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죄인은 죄를 낳는 삶을 삽니다. 시편 14편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삶에 대해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의인은 이러한 죄인의 삶에 발을 올려 두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걷지 않습니다. 악한 생각뿐만 아니라 악한 삶을 따르지 않습니다. 거기서 멀어져 선하고 의로운 삶을 선택하여 걷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인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영어로 scoffers, mocker인데 잠언에만 14번 등장하는 이 단어는 대부분 “거만한 자”, “교만한 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기본적인 특징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게 자신을 높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리”라는 말을 씁니다. 이는 교만한 자들이 거하는 장소, 그들이 머무는 곳을 의미합니다. 마치 식당에서 서로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앉듯 악인은 악인들끼리 모여 서로를 격려합니다. 시편엔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인들을 이렇게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일어날 법한 일처럼 들립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시 53:3)

바울도 로마서 1장 32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의인은 교만한 자들이 거하는 곳에 가지 않습니다. 그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하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습니다.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 될 수는 있지만, 함께 삶을 나누고 멍에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인 그들을 품어주고 사랑하지만 죄악 된 삶을 인정하거나 함께 공유해줄 수는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형통한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제 복 있는 사람의 형통한 삶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히브리 시의 특징인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의인의 삶의 이미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머릿속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연상 될 것입니다. 무슨 나무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는데 필요한 맑고 깨끗한 물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시내가 언제나 영양분과 필요한 물질을 부족함 없이 공급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참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시편 기자는 이 나무의 그림이 바로 의인의 형통한 삶의 모습이라고 노래합니다. “그 하는 일이 모두 다 형통하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이 말하는 것을 잘못 파악합니다. 그래서 “형통”이라는 말만 보고는 의인의 삶은 탄탄대로처럼 모든 하는 일이 다 성공적이고 잘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이 그림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그림에서 나무가 겪는 환경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태풍이 불고 있는지 가뭄이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나무의 상태입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에게는 아무런 고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늘 성공적이고 행복한 일만 경험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환경과 관계없이 혹은 그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의인은 건강하고 생명력 있게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형통함입니다.

의인의 삶이 그러합니다. 풍랑을 맞이할 때도 있고 가뭄이 드는 날도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 노출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영혼이 말라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언제나 깨끗하고 신선한 생수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시편 기자는 의인의 삶이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라고 말합니다(6절).

그렇다면 악인의 삶은 어떨까요?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추수 때 알곡과 쭉정이를 공중에 날려 구분하는 타작 마당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무거운 알곡은 땅으로 떨어지고 가벼운 겨는 바람에 날려 멀리 떨어집니다. 이런 쭉정이는 모아서 불에 던져 버립니다. 이 구별되어 불에 태워지는 심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5절에 바로 이어서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직접 선포합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 “겨”의 종착지처럼 악인의 종착지는 “영원한 불못” 입니다(계 20:15).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완벽한 분리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큰 구렁텅이로 서로 건널 수 없음을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견디지도 못할 크고 무서운 심판을 받으며 의인의 무리로 피해 들어갈 수도 없는 악인의 삶은 결론적으로 망한 삶입니다(6절).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론 의인과 악인의 삶이 반대로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악인이 더 잘 살고 의인은 가난하고, 악인은 잘되는데 의인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솔로몬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구약의 한 선지자도 이해할 수 없다며 하나님께 질문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도 솔로몬에게도 동일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의 결과는 영원한 복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시편의 감정선의 절정 부분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을 떠나 선을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명력, 그가 누리는 복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대답은 2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붙들고 있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복 있는 사람의 의로운 삶의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멀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그를 붙들고 있는 성경이 악한 생각을 책망하고 바른 생각으로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의로운 삶으로 그를 교육하고 잘못된 삶을 바르게 교정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복 있는 사람의 삶을 형통하게 해주는 시내, 그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물질을 부족함 없이 날마다 풍성하게 공급하는 물줄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습니다.

의인이 어떻게 이 생명의 근원을 하찮게 여기겠습니까? 어떻게 여기서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의인이 이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그는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즐거워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계속해서 그 생각을 멈출 수 없고 틈만 나면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얻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즐거운 그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컴퓨터 게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운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감상이나 책을 보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인에게 있어서 즐거운 그 일은 바로 성경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말씀을 즐거워하는 저자들의 다양한 표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8)

얼마나 성경을 사모하며 즐거워하는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주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의 말씀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하여 새벽과 아침 혹은 저녁에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자신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또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습니다.

“묵상”의 또 다른 말은 “읊조리다”입니다. 이것은 단지 말씀을 주문처럼 줄줄 외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자세히 관찰해보며 깊이 생각해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 느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은 원래 기록하신 뜻을 벗어난 의미로 우리를 감동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래 기록된 의미를 발견하게 해달라고 구하며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읊조리는 것”, “묵상”입니다. 그 의미를 벗어나 어떻게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의미를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은 타로카드를 읽는 법이나 포츈쿠키를 해석하는 방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방식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성령이 기록하신 그 본래의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시대,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문맥상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문자적이라는 말은 책이 기록된 일반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디로 갔다”는 기록은 주인공이 어디로 이동했다는 뜻이지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오늘날 내게 적용 가능한 핵심 원리를 발견하여 오늘 순종하는데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 깊이 성경을 읊조려야 합니다.

이것이 의인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깊은 사고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 말씀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의인을 형통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결론

시편은 의인의 삶의 노래입니다. 때론 하나님께 부르짖고 때론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함께 동행하면서 부르는 삶의 노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시편 1편은 모든 시편의 도입입니다. 150편의 시편의 첫 시작은 “복”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복은 그분을 알아 경외하고, 그분에게 의인으로 인정받으며, 그분과 동행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2편에서 150편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삶의 노래를 “복 있는 사람”으로서 부르기 위해 우리는 1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복”을 누리는 사람이 악인의 생각과 삶과 자리에서 멀어질 수 있었던 힘, 그가 생명력 넘치는 형통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었던 힘의 근원, 모든 시편의 초석처럼 여겨지는 시편 1편에서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주 앞에 복된 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책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 인정받는 형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책을 사모하십시오. 깊이 묵상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이 책은 당신의 삶을 거짓에서 멀어지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 책은 당신의 영혼을 형통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경은 당신의 영혼에 모든 필요를 공급하는 맑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