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왜 읽어야 할까요? 솔직히 지루합니다. 재미없습니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왜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읽으라고 하니까 읽고 안 읽으면 왠지 잘못하는 것 같아서 읽는 것뿐입니다. 재미있는 만화, 영화, 웹툰, 기사, 드라마 등이 매일 쏟아지는 세상에 살면서 왜 재미없고 지루한 성경을 읽어야 할까요?
사실 성경에 대한 이같은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죄가 진리에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악인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힘들어하고 읽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이거나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죄와 계속해서 싸우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빛이신 주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를 증거하는 성경을 왜 읽고 싶겠습니까? 주를 모르는 자에게 성경은 지루한 책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요 10:27).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체 속에서 우리 마음과 싸워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롬 7:23). 이것이 바로 옛 자아, 옛사람 혹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고 싶고도 읽고 싶지 않은 책이 됩니다. 주를 아는 자에게도 성경은 읽기 힘든 책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전서의 한 말씀을 통해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흥미롭게도 오늘의 본문(베드로전서 1장 23절~2장 3절)은 주를 모르는 자와 주를 아는 자에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2장 3절까지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본문을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1장 23~25절) “말씀”과 “거듭남”을 두 번째 부분은(2장 1~3절) “말씀”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을 연결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말씀”과 “중생”, “말씀”과 “성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두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 1: 말씀은 우리를 태어나게 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를 모르고 그래서 주의 말씀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면 당신에게는 성경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당신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우리의 인생을 들풀과 들꽃에 비유합니다. BC 690년경에 쓰인 이사야 40장 6절과 8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고대의 사람이나 베드로 시대 사람이나 사람의 삶이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모든 육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베드로가 묘사하는 삶의 특징은 여전합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유약하고 제약에 갇혀 있습니다.
풀은 한 계절만 살다가 사라지는 식물로 예수님은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이라고 설명하시기도 했습니다(마 6:30). 풀이나 그 풀의 꽃이 가진 영광이 어찌 대단하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다음 날이면 마르고 시들며 아궁이에 던져져 사라져 버릴 유한한 존재입니다.
이 표현으로 인생은 정리됩니다. 사람이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 아름다움, 명성, 인기 등은 언젠가 끝이 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라질 것이고 썩어질 것이며 쇠하고 가치를 잃어갈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산다는 데 있습니다. 한 계절만 살다 간다는 것을 모릅니다.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순간이 금방 찾아온다는 것을 모르고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살려고만 노력합니다. 썩어질 것을 쌓고, 사라질 것을 구하며, 영원의 관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일에 삶을 온통 투자합니다. 즐기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누린 자로서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 하실 줄 알라(전 11:9)
장례식장에 가면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피부로 느낍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가까운 가족이라면 더 사무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죽음이 절대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그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착하게 살았고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았으니 괜찮을까요? 교회에 다니기도 했고 예배에 빠진 적도 적으니 괜찮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평안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사망”의 판결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판결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대 앞에서 “죄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이미 선포하셨는데 말입니다(롬 3:23).
성경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판결이 옮겨지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 베드로전서의 본문의 말로 옮기면 “썩지 아니할 씨”를 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고 말합니다(롬 10:17).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 심판에 이르지 않는 것, 영생을 얻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남”(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어로 “born again”인데(“다시 태어나다”) 헬라어가 의미하는 것으로는 “하늘로부터 난다”(born from abov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자는 마치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난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요 3).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 중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주권적인 사역을 이루시는데 무언가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듣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새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들음을 통해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유일한 인생을 썩을 것을 즐기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기 원한다면 성경을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말처럼 계속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되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원한다면, 영생을 누리며 살고 싶다면, 당신에게는 성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은 당신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필수 약입니다. 들음이 없이는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운명이 이 책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 2: 말씀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당신이 주를 안다면 그래서 악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한 마음이 있다면 당신에게는 성경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이 당신을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면 성경이 너무 사랑하게 될까요? 자동으로 눈을 뜨면 성경이 읽고 싶어지고 언제든 손에서 놓고 싶지 않으며 거듭남과 동시에 삶이 180도 달라져 성인군자 같은 삶을 살게 될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매로 그 구원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열매를 맺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숙하고 자라는 데는 인내와 수고가 요구됩니다.
구원을 확인해보고 점검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으로 구원의 여부를 증명하지 못하면 거듭나지 않은 것이라고 못 박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런 방식을 요구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구원의 확신은 말씀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회심 이후에 그 크기가 작든지 크든지 참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베드로가 묘사한 다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1) 악을 미워하는 삶 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삶 3) 주를 경험하는 삶
먼저 신자는 악을 미워하는 삶을 삽니다. 본문은 모든 종류의 악을 포괄적으로 말하고 나서 또 다른 “모든”을 써서 더 구체적인 죄를 나열합니다(기만, 외식, 시기, 비방). 이것에서 멀어지라고 베드로는 명령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삶이며 기대되는 모습입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것은 거룩한 아버지를 둔 자녀들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죄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거룩하심을 위해 택하심을 받은 자이니 죄로부터 구별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도가 죄에서 멀어지는 일에 함께하심을 확신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신자는 또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원합니다. 태어나 성장하고 싶지 않아 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매일 배우고 매일 더 성장하려고 노력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은 칭의만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 하나의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시작된 구원은 부르심과 칭의 그리고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릅니다(롬 8:29-30).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삶이란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삶입니다(딛 2;1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새사람을 입는 일입니다. 셩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갈 5:22-3).
신자는 주를 경험합니다. 순종의 삶을 살 때 그리스도를 체험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나와 내 아버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하는 자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아들 하나님의 사랑도 임합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한 영광과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같이 죄를 멀리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며 주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자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젖, 영적 양식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갓난아기들 같이 말씀을 사모하라”고 명령합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그들에게 젖이 얼마나 자주 절실하게 필요합니까? 젖을 먹지 못하면 금방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존재가 갓난아기입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서 시간 간격마다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웁니다. 엄마는 아기의 상태를 보면서 6개월까지는 4시간 간격으로 6주까지는 2시간 30분 간격으로 태어나 3일은 아기가 원할 때마다 먹이려고 합니다.
그만큼 젖은 아기에게 필요한 것이고 아기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베드로는 주를 아는 자에게 이와 같은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만큼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자주 간절하게 말씀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굶어 죽을 아기처럼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말씀은 정말 필수적입니다.
죄를 멀리하는 삶은 오직 말씀이 가능하게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말해주며 악한 행동에서 선한 행동으로 교정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 역시 성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인지 교훈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도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어차피 하늘 나라는 갈 테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행하는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요 17:17).
만일 당신이 어차피 열심히 노력해도 죄를 범하는 나약한 자신에 실망하여 자포자기한다면 그래서 더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길을 가고 싶지 않다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주인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악한 주인이라고 비방한 게으르고 악한 종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성령의 거룩함으로 택하셨고 당신을 부르셨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의롭다 하셨으며 거룩하게 하셔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못 믿는 어리석은 종이 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모든 죄를 능히 이겨내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날마다 더 그분을 닮아가기 원한다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동행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풍성히 경험하기 원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