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 비유에 이어서 곧바로 주님께서는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다. “또 ~과 같으니”라고 시작하시면서(14절)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 또한 주가 다시 오실 때 맞닥뜨리게 될 천국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임을 분명히 드러내셨다(1절). 열 처녀가 돌아올 신랑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했던 것처럼, 달란트 비유 속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하며 기다려야 했다. 열 처녀 중에서 절반은 미련하고 나머지 절반은 슬기 있었던 것처럼, 달란트를 맡은 종들도 두 사람은 착하고 충성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르다. 그리고 각각 그 판결을 받는다.
두 비유 모두 그 대상이 주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주님은 우리 중에 두 부류가 있다고 분명히 지적하신다. 준비하지 않는 자, 악하고 게으른 자는 교회가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죄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참으로 충격적인 경고를 하신다. 그날에 누가 진실로 천국 성도가 될 것인가? ‘주 오심을 충성스러운 삶으로 준비하라’라는 분명한 천국 원리를 배우고 실천하자.
1. 천국 비유(14-30절)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제자들에게 익숙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14절).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종들에게 그 일부를 맡겨 선용하게 했는데, 다른 지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그만큼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만큼 종들에게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맡겼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종들이 받은 달란트는 무게 단위를(27~30kg) 말하는데(삼하 12:30), 금 한 달란트의 값은 6천 데나리온, 16년 치 품삯 정도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어림잡아 30억(10만원/일, 80년) 정도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12억, 한 달란트 받은 종은 6억 정도를 받았다고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겼다(15절). 능력에 따라 책임질 수 있는 양만 맡겼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모두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교회의 각 성도에게 은사를 맡기신 것과 매우 유사하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한다(엡 4:7). 그리고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눅 12:48). 우리는 각각 받은 은사의 분량은 다르지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다(고전 4:2).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한 달란트 받은 종만 가지고도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을 비교하며 교훈을 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자를 등장인물로 두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천국은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가가 아니라 맡기신 것에 얼마나 충성했는가로 결산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아침 일찍부터 고용되어 일한 품꾼과 오후 늦게 고용되어 일하러 간 품꾼에게 포도원 주인이 같은 품삯을 준 이야기를 통하여 천국은 신앙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는지가 아니라 각자 맡기신 일에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달렸다는 분명한 천국 원칙을 알려주셨다(마 20:1-16).
그러면, 맡기신 것에 충성 또는 불충하는 성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충성스러운 종들의 모습을 보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16-17절). 그들 모두 즉시 순종했다(바로 가서). 그들에게 맡겨진 자본을 가지고 장사하여 두 배의(100%) 수익을 냈다(100% 충성). 반면, 불충한 종은 어땠는가? 그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18절). 당시 돈이나 귀중품을 보관하는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맹렬한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은 그를 무섭게 책망하고 또 충격적인 심판을 내린다(수익 0%). 왜 그런지 이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중요한 건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했다는 사실이다(19절). 열 처녀가 신랑이 더디 와서 졸며 잠든 것처럼(5절), 종들도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나태하고 게을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은 마침내 약속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들에게 맡긴 것을 회계하는 결산이 시작됐다. 우리 주님도 약속하신 그날에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다. 우리 생각엔 오랜 후에 그날이 올 것 같지만, 주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확실히 약속하셨다(계 22:12). 우리에게도 결산의 날이 있다.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결산의 날 주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하는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주인 앞에서 각각 어떻게 충성했는지 기쁨으로 아뢸 때(“보소서”, 20, 22절), 주인은 둘 다 완전히 똑같이 이렇게 그들을 칭찬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절). 어떤 주석가는 “잘 하였도다”를 “브라보!”와 같은 환희와 기쁨을 섞어 설명했다. 주인은 종의 착한 성품과 성실한 행실에 진실로 감격했다.
그들은 주인을 사랑하여 주인의 재물을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여기고 주인에게 유익과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종들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자기의 것을 더 많이 나누고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도록 영접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성도는 이와 같이 칭찬을 얻게 될 것이다. 천국은 쉬러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더 많이 섬기러 가는 곳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적은 것에 충성된 자인지 검증을 받는 셈이다. 주님은 적은 것에 충성된 성도에게 천국에서 더 높은 신분과 더 많은 역할을 맡기실 것이고 천국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실 것이다.
한편, 불충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결산은 어땠는지 들여다보자. 그는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절).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했다(26절). 그가 한 말에서 그 악한 성품이 발견된다. 그의 악함은 주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는 주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24절). 파종과 타작을 할 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결실만 얻으려 하는 굳은 사람 즉 엄격하고 가혹하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정죄한다.
하지만, 그의 정죄는 잘못됐다. 주인은 그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맡겼다. 자기 재물을 관리하며 함께 먹고 살 수 있도록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주인의 재산이 늘어나면 그도 함께 유익을 누릴 수 있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주인의 영광이나 기쁨이나 유익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주인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불충한 종을 딱 꼬집어 책망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26-27절).
‘만일 네가 나를 무자비한 주인으로 두려워했다면 적어도 이렇게는 했을 것 아니냐’라고 그가 핑계된 이유를 논박한 것이다. 그는 성전에 돈을 맡기거나 이방인 고리대금업자를 통하여 종은 무시무시한 주인을 조금이라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주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한 열심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위하여 정말 바쁘게 또 부지런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을 위하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철저한 게으름을 피웠다. 주인에게 있어 그는 철저히 “무익한 종”이었다(30절). D. A. 카슨은 “은혜는 무책임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불충한 종은 한없는 주님의 은혜에 무책임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삶을 대표한다.
그런 사람은 주께 최후통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절). 주를 믿지 않는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려질 영원한 형벌이다. 주님은 맡기신 달란트에 불충한 제자들은 천국 백성이 아니라 영벌에 처할 죄인으로 주가 오시는 그날에 발견될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한 경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는 영적 은사뿐만 아니라 재물, 시간, 체력, 건강, 정신, 관계 등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모든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달란트를 남긴 종들처럼 몇% 수익으로 딱 떨어진 계산이 나오기는 힘들다. 하지만, 비유 속 종들이 100% 또는 0%의 수익을 남긴 것을 통하여 우리는 참 성도라면 0%가 아니라 100% 충성하는 삶의 길로 언제나 나아가려고 힘쓴다는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천국 백성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롬 14:8). 천국 백성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전 10:31). 0%의 삶이 아닌 100% 삶이다.
2. 천국 원리(29절)
그런데 누가 100%의 충성을 보일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그게 가능하다 해도 우리는 명령하신 일을 다 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눅 17:10). 그러니 현실적으로 70%, 50%의 충성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런 ‘움츠리고 주저하는’ 태도가 천국 원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천국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절). 불충한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충성한 종에게 주면서 주인이 한 말이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충성이 있는 자 혹은 없는 자 둘 중 하나다. 물론 항상 100% 충성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적당한 수준에 안주하는 것도 옳지 않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거나 주를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거나,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위하여 살고 죽는 것이다. 주님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를 미워하신다(계 3:15).
천국 백성은 완벽한 충성에 항상 도달한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게으르고 나태한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 주님께 날마다 더욱 충성하려고 애쓰는 자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더 풍족하게 주실 것이다. 반대로 계속해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향한 충성을 타협해 나가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실 것이다. 은혜에 무책임한 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다.